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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선거법!

오로지 반부패에 맞춰진 공직선거법 황당 열전, 자기를 찍어달라 호소하면 선거법 위반, 국회의원 아닌 사람이 정책연구소 만들면 선거법 위반… 4월1일 정개특위 시작되지만 선거법 개정 논의 미지수
등록 2015-04-02 14:20 수정 2020-05-03 04:27

영화 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한창 미국 대선이 벌어지던 시기, 민주당 지지자인 아버지(이선 호크)는 차 트렁크에 버락 오바마 대선 후보를 홍보하는 깃발을 잔뜩 넣어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어린 자녀들에게 집집마다 현관문을 두드리면서 오바마 지지자인지 물어보게 한 뒤 집 앞에 그 깃발을 꽂는 일을 시킨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자식들이 어릴 적 이혼해 주말에만 만나는 다소 철없는 캐릭터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자식들을 교육하고 보듬는다. 아들 메이슨과 딸 사만다는 그런 아버지를 좋아하고 따른다. 아이들에겐 민주당 지지자인 아버지의 선거운동 방식이 일종의 정치 참여 교육이었을 것이다.
이 상황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진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이 벌인 모든 행위가 불법이다. 일단 우리나라에서는 공직선거법 제58조에 의해 선거 기간에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를 지지하는 내용의 행위’를 할 수 없다. 자신의 집 앞에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홍보하는 깃발을 꽂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 “나는 OOO를 지지하는데 그를 뽑아달라”고 얘기도 못한다. 그리고 같은 법 제60조에 의해 미성년자(19살 미만)는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 없다. 아이의 부모가 직접 선거에 뛰어든 후보자라고 해도 자식이 미성년자라면 부모의 지지를 호소할 수 없다는 얘기다. 미국 대선 후보들이 선거운동 기간에 어린 자녀를 포함한 가족을 대동하고 다니는 일을 자주 목격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이다.

지난해 6·4 지방선거에서 선거운동원들이 기초의원 후보자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선거운동을 하려면 선거운동원으로 공식 등록해야 하며, 자신이 운동원임을 알리는 목팻말을 매달고 다녀야 한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지난해 6·4 지방선거에서 선거운동원들이 기초의원 후보자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선거운동을 하려면 선거운동원으로 공식 등록해야 하며, 자신이 운동원임을 알리는 목팻말을 매달고 다녀야 한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지난 3월16일 권선택 대전시장(새정치민주연합)이 선거법 위반으로 1심에서 당선무효형이 선고됐다. 이 형이 확정되면 그는 시장직을 잃게 된다. 그의 혐의는 지난해 6·4 지방선거 과정에서 유사선거기구를 차려놓고 사전선거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권 시장이 고문을 맡아 활동해온 대전미래경제연구포럼이 ‘유사선거기구’로 판단됐다. 선거법 제87조, 제89조에 의하면 현직 정치인이 아닌 사람은 당선을 목적으로 특정 조직을 만드는 일을 할 수 없고, 어떤 단체도 후보자를 위한 선거운동을 할 수 없게 돼 있다. 권 시장 쪽은 포럼 활동이 선거운동이 아닌 “통상적이고 일상적인 정치활동”이라고 주장했지만 1심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권 시장의 변호를 맡은 여운철 변호사는 “이 판결에 의하면 (정치에 의지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럼 등에 속해 있으므로 전부 선거법 위반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새정치연합도 이 판결 뒤 “포럼 활동이 사전선거운동에 해당된다면 현직 정치인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사회활동이나 정치활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방어하고 나섰다.

정책연구소가 ‘유사선거기구’, 당선무효형

문제는 이러한 항변에는 힘이 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선거법 위반=부패’라는 공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누군가 ‘선거법 위반’에 대한 문제제기라도 할라치면 ‘부패를 두둔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강력한 프레임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한번 바꿔보자. 선거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권 시장의 사례에서 선거법을 위반했느냐 아니냐를 따지기 이전에 ‘현직 정치인이 아닌 사람이 조직을 꾸리든 지지를 호소하든 통상적인 선거운동을 하는 일’ 자체가 잘못이라고 볼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다른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김경미 정치발전소 정책팀장은 “정치를 하고 싶은 사람이 연구소를 만들어 정책을 준비하고 돈을 모으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선거법은 힘없는 이들이 자율적 결사체를 만들 수 있는 토양을 없애버리는 부작용을 만든다”고 지적했다.

한국 선거법의 기본 방향은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정치인과 유권자의 정치 참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을 보장’해주는 방식이 아니다. 오로지 ‘반부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공직선거법 제7장 ‘선거운동’ 부분만 살펴봐도 65개의 조항 대부분이 △연설 금지 △시설물 설치 금지 △집회 제한 등 ‘금지’와 ‘제한’으로 점철돼 있다. 이 조항들에서는 ‘정치인은 유권자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필연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접촉 빈도를 줄여야 한다’는 강박이 느껴진다.

더구나 이 금지와 제한 항목이 너무 복잡하고 모호한 나머지 정치인과 유권자 모두 선관위의 유권해석 없이는 선거운동을 하기 힘들고, 선관위마저도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유권해석을 내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당선된 300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26.3%인 79명이 선거법 위반으로 입건된 것도 이런 ‘이상한 선거법’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당시 언론에서는 ‘국회의원 당선자 79명 선거법 입건’에 대해 ‘극심한 선거 혼탁 과열 양상’으로 분석했을 뿐이다. 선거법 자체를 문제 삼는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이상한 선거법’은 각종 황당한 사례들을 양산한다. 지난해 7월 참여연대와 정치발전소 등이 공동주최한 토론회 ‘이상한 나라의 선거법, 이제는 고쳐야 한다’ 자료집을 보면 이런 사례가 나온다. 6·4 지방선거 직전이던 지난해 4월 서울 양천구에서 시의원 후보들을 대상으로 뉴타운 문제를 논의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주민들이 후보들의 정책 방향을 잘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토론회였음에도 토론회 홍보를 위한 포스터 부착 등은 금지됐다. 후보들은 토론회에서 자신의 이름과 기호가 들어간 어깨띠를 착용할 수 없었고, 토론 과정에서 “나는 이런 정책을 가지고 있으니 나를 뽑아달라”는 말도 못했다. 이 가운데 한 후보가 옷 자체에 이름이 새겨진 상의를 입고 와 속옷만 입고 토론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자 선관위는 즉석 회의를 거쳐 ‘예외적으로’ 후보들에게 어깨띠를 허용하는 일도 있었다. 더 황당한 것은 관객이 특정 후보에게 편중된 박수를 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후보에게 똑같은 강도의 박수를 치라는 것이 선관위의 요구였다. 후보의 발언 도중에 치는 박수도 금지되며 모든 후보의 발언이 끝난 뒤 ‘고른 박수’를 보내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이상한 선거법이다.

모든 후보에게 똑같은 강도의 박수를…

정치인과 유권자를 갈라놓는 선거법의 부작용은 결국 민주주의의 후퇴로 돌아온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힘없는 계층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조직을 만들고 돈을 모아 특정 정치세력에게 이를 보냄으로써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런데 현행 선거법에서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불법이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이러한 선거법의 기원에는 권위주의 정권의 ‘민주주의 파괴를 통한 기득권 지키기’가 있었다고 분석한다. 서 위원은 “이승만 정부에서부터 전두환 정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기존 권위주의 정권들은 스스로의 필요나 권력부패가 발각될 때마다 ‘반부패’라는 이름으로 정당(정치인)과 유권자의 정치활동을 제한해왔고 그 오래된 기원은 이승만 정부였다”고 말했다. 선거운동 기간 제한, 선거운동 방식 제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인적 제한 등이 명시된 현행 선거법은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58년에 그 뼈대가 마련됐다.

“민주주의 파괴를 통한 기득권 지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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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민주화 이후에는 어떨까. 1994년 헌법재판소가 ‘전 국민에 대한 선거운동을 금지한 것은 국민의 참정권과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결정한 뒤 선거법이 새롭게 정비됐다. 그러나 야당을 포함한 정치권은 여러 예외조항을 통해 여전히 제한적인 선거운동만 가능하도록 했다.

서 위원은 “제1야당(민주당)으로서 최대한 보호를 받되 집권당과의 경쟁을 더 용이하게 만들기 위한 선택은, 정당 체제 내 경쟁의 구조를 더 제한적으로 만들어 집권당이 그들이 가진 상대적으로 풍부한 자원을 활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야당으로서는 선거운동 방식 등을 제한함으로써 집권당이 가진 돈이나 인력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동시에 자신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제3의 정치세력이 함부로 정치권에 진입할 수 없는 장벽을 만드는 ‘안전한’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다양성을 가진 정당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는 체계가 아니라, 보수적인 거대 양당 체계가 국회를 독점하는 비정상적인 정당 체계가 마련됐다.

권위주의 시절의 ‘반부패 담론’은 여전히 공고하다. 선거법을 개정하자고 하면 당장 나오는 소리가 ‘수많은 부패가 양산될 텐데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반론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각종 제한을 풀게 되면 금권정치가 횡행하고 선거는 혼탁해져 이로 인해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일이 벌어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대중의 생활세계 속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움직여 표와 돈을 조직할 방법을 없애면, 선거 경쟁은 어떻게 될까? 대규모 비용이 요구되는 여론조사나 홍보 기획에 의존하는 정치만 심화될 수밖에 없다. ‘신종 금권정치’가 지배하게 되는 것인데, 가난한 사람은 이제 정치할 수 없는 환경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런 구조나 조건을 그대로 둔 채 출판기념회 등을 놓고 부정부패를 말하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검찰과 언론 등 ‘반부패 담론 동맹’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자 민주적 정당정치의 위력을 약화시키는 상습 전략이다.” 출판기념회 등 ‘작은 부패’에 매달리는 방식의 각종 정치활동 제한이 오히려 더욱 거대한 부패를 양산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인식의 전환을 시도해보자. 자유로운 선거 체제 속에서 양산되는 부패는 민주주의가 치러야 할 비용으로 남겨두되, 그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민주화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한국 상황에 부합하는 게 아닐까. 이는 이미 미국, 프랑스, 독일 등 민주주의 선진국들이 하고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선거운동과 정치활동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선거법, 선거운동 기간, 선거운동 방식의 범위, 예비후보 등록 기간 등을 규제하는 선거법을 최소한의 비용 규제를 제외하고 일정한 선거비용의 범위 내에서 모든 것을 허용하는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가난한 사람은 정치할 수 없는 환경”

오는 4월1일 국회 정치개혁특위가 첫 회의를 연다. 이번에 새롭게 구성된 정개특위에서는 △선거구 재획정 △비례대표제 확대 △오픈프라이머리 도입 등 선거제도 개편에 관한 주요 사안들이 논의될 예정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정개특위 위원들이 이런 굵직한 주제들 외에 정치활동을 제약하는 선거법 개정 등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그나마 이번 정개특위에는 오랫동안 선거법 문제를 제기해왔던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출신의 김기식 새정치연합 의원이 정개특위 위원으로 참여해 선거법 개정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 의원은 “정개특위의 의제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선거운동의 방법적 제약을 명시한 지금과 같은 선거법을 어떻게 개정할지 선거법 체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제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2016년 총선에서는 시민들의 다양한 참여가 보장되는 선거운동을 목격할 수 있을까.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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