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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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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 긴장하게 만드는 ‘유승민 정책’

‘용감한 개혁’ 내걸며 당선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친서민’ 정책 강조하고 ‘증세 없는 복지’ 비판…
‘위태로운 정당’ 새정치민주연합은 서민 관련 의제마저 새누리당에 밀릴 수 있다는 불안감 커져
등록 2015-02-13 05:12 수정 2020-05-02 19:27

어떤 국회의원의 당대표 출마 선언문이다. 누구일까?
“부자들은 돈이 많아 주체를 못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이 과연 보수입니까? 재벌 대기업은 수십조원 이익을 보는데,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죽어가는 걸 내버려두는 것이 보수입니까? 4대강에는 22조원이나 쏟아부으면서 밥을 굶는 결식아동, 수천만원 빚에 인생을 저당 잡힌 대학생, 월 1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는 비정규직, 쪽방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면서도 기초생활보호도 못 받는 할머니·할아버지, 이분들을 위해선 ‘예산이 없다’고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내뱉는 것이 보수입니까? 공정을 말하면서 공정하지 못하게 대기업과 가진 자의 편을 들고, 끼리끼리 나눠먹는 자세를 고치겠습니다. 수천억을 버는 재벌과 100만원이 없어서 자살하는 사람들, 이 양극을 두고는 공동체를 유지할 수도, 국민 통합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2월2일 “블랙 먼데이”

당대표를 뽑는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2월8일)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내용이다. 이 글은 2011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 선거에 나선 유승민 의원의 출마 선언문이다. 언론이 “과감한 정책 좌회전”이라고 평가했던 그의 소신은 더 나아간다. 그는 “복지를 위해서도 (대기업 법인세 인하 등) 감세는 중단”해야 하며, “토목경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 돈을 써야 한다”고 했고, “차별 사각지대에 놓인 사내 도급 근로자들을 차별 금지 대상에 넣겠다”고도 했다. 당시엔 “무상급식·무상보육의 정책 목표도 옳다”며 수용의 뜻을 나타냈다. 이 선거에서 그는 2위의 파란을 일으켰다.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선거에 나선 문재인·이인영·박지원 의원(왼쪽부터)이 지난 2월1일 경기 지역 합동연설회에서 밝지 않은 표정으로 함께 서 있다.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선거에 나선 문재인·이인영·박지원 의원(왼쪽부터)이 지난 2월1일 경기 지역 합동연설회에서 밝지 않은 표정으로 함께 서 있다.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지난 2월2일 새누리당 원내대표 선거에서 ‘용감한 개혁’을 내걸며 당선된 유 의원은 ‘소속 정당’을 헷갈리게 할 만한 발언을 내놓았다. “용감한 개혁은 우리 당의 지향점을 부자, 대기업이 아니라 제일 고통받는 국민들한테 두자는 것”이라면서 “청와대의 불통”과 “정부·여당의 민심 이반”이 “두렵다”고 우려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추락하고 있다”는 표현도 썼다. 집권 여당의 원내대표 입에서 ‘야권이 쓰던 언어’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탓에 유 의원의 당선은 제1야당에 긴장감을 넣는 연쇄반응을 몰고 왔다. 안규백 새정치연합 원내수석부대표는 “유승민 원내대표는 개혁적이고 우리랑 생각도 비슷하다. 의제 주도권을 우리가 먼저 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걱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새정치연합이 납세 거부감이 큰 여론을 의식해 ‘부자 감세 철회’ 주장에 집중해온 사이 유 원내대표는 최근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증세 논쟁의 주도권마저 틀어쥐었다.

새정치연합의 불안감은 유 의원이 당선된 ‘2월2일 월요일’에 증폭됐다. 이날 문재인 의원이 당대표 선출 방식 중 하나인 ‘여론조사’ 규칙의 변경을 당에 요구해 수용되자, 박지원 의원이 반발하며 감정싸움으로 치달았다. 같은 날 방송토론회에선 “친노의 횡포, 비열”(박 의원), “저질 토론”(문 의원)이란 용어가 오갔다. 새정치연합의 한 의원은 이날을 “블랙 먼데이”(검은 월요일)라고 탄식했다. 개혁을 표방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배출과 대조적으로 진흙탕 공방을 벌인 새정치연합 당대표 후보들의 모습에서 암울한 당의 미래를 엿봤다는 뜻이다.

“네거티브 선거전으로 염증만 키웠다”

새정치연합은 당대표 선거 과정을 혁신의 기운을 모아내는 기회로 삼지 못했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 패배 이후 공동대표(김한길·안철수)가 사퇴하고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진 ‘위태로운 정당’의 절박감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내 지도부의 한 의원은 “네거티브 선거전으로 염증만 키웠다”고 했다. ‘저 사람이 당대표가 되면 안 된다’는 따위의 견제용 공방이 부각되면서 ‘어떤 당이 될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를 각인시키지 못했다는 자성이다. 수도권 재선인 정성호 의원은 “새로운 당대표를 배출하는 과정에서 당 지지율이 오르는 ‘전당대회 컨벤션 효과’도 (거의) 없다. 대표 선거에 출마한 문재인·박지원 의원을 도왔던 의원들 사이에 갈등이 잘 해소될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수도권 의원은 “이럴 때 보면 새누리당이 우리보다 낫다는 자괴감이 든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야당이 주장하던)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차용하더니,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위기라고 하니 대통령에게 할 말을 해온 유승민 의원을 원내대표로 세우지 않나”라고 토로했다.

새정치연합이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란 ‘외적 변수’를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야당의 정책 영역이 크게 침범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탓이다. 실제 실현 여부와는 별개로 유 원내대표가 ‘친서민 정책’을 줄곧 강조하는가 하면, 청와대를 향한 비판적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다. 그가 여당 내부에서 ‘야당 같은 존재감’을 보이면, 새정치연합의 선명성이 흐려질 수 있다. “친박근혜계 후보로 불린 이주영 의원이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되는 게 우리한테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주영 의원을 ‘친박 원내대표’로 몰아가면서 각이라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란 목소리가 새정치연합 일각에서 나오는 이유다.

새정치연합의 정책을 양산하는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으로 영입된 우석훈 박사는 자칫 서민 관련 의제에서 새누리당에 밀릴 위험이 있다고 우려한다. 그는 진보 진영의 경제학자로 꼽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해 생각이 서로 달랐던 것을 빼면, 그동안 대운하·4대강 사업, 조세 분야 등에서 유승민 원내대표의 의견이 (거의) 나와 비슷했다. (때론) 유 원내대표가 새정치연합보다 더 왼쪽의 정책을 내놓을 수도 있다. 최근 새정치연합의 정책 방향은 중산층 복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때 유 원내대표가 서민 관련 의제를 끌고 나오면 어떻게 될까? 새정치연합은 중산층을 강조하고 새누리당이 오히려 서민을 얘기하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는 다른 걱정을 더 이어갔다.

“유 원내대표가 추진하는 것이 이뤄져 서민에게 도움이 된다면 국가로서 좋은 일이고, 야당도 격려해줄 일이다. 문제는 유 원내대표가 하려는 일(서민정책)을 청와대가 받아들이지 않을 때다.”

유 원내대표가 추진하는 정책의 방향이 맞다면 그를 옹호해줘야 하지만, 이럴 경우 제1야당이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후방 지원하는 존재로 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새정치연합에선 유 원내대표가 결국 청와대와 대립각을 크게 세우지 않는 선에서 행보를 이어갈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당·청 갈등이 새누리당에 악재가 될 수 있어 유 원내대표도 발언의 톤을 조절할 것이란 얘기다. ‘유승민 정책’에 대한 여권 내부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목소리도 있다.

“더 전향적으로, 중도로, 서민 쪽으로”

하지만 새누리당을 상대해야 할 새정치연합으로선 유 원내대표의 최근 발언 중 흘려들을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비정규직 대책이든, 저출산 대책이든, 실업 대책이든 지금부터 당이 주도권을 잡고 해나가면 야당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경제·노동·교육·복지 등 민생 전반에서 더 전향적으로, 중도로, 서민 쪽으로 가야 한다.”

유 원내대표가 야권이 유능하게 대변하지 못한 영역에 발을 성큼 뻗고 있는 것이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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