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증거 없어도 추론만으로 유죄

이석기 RO ‘단체성’ 검찰 수사 진행 중인데 이를 받아들인 수원지법
“타격 계획 구체성 떨어져” 반론에도 유죄 인정
등록 2014-02-25 05:07 수정 2020-05-02 19:27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항소심에서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지면서 헌법재판소가 심리하고 있는 진보당 위헌정당해산 심판에도 영향이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은 지난 2월17일 1심 선고 공판 때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항소심에서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지면서 헌법재판소가 심리하고 있는 진보당 위헌정당해산 심판에도 영향이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은 지난 2월17일 1심 선고 공판 때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대학을 졸업하고 한전 시험을 봤다. 한전 노조를 장악해서 서울시의 불을 일체 다 끄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불이 다 꺼지면 서울시에 일대 혼란이 일어나서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손학규(67) 전 민주당 대표가 2011년 9월 한국전력이 초래한 대규모 정전 사태를 꼬집어 했던 말이다. 실제 1980년까지 노동·빈민운동을 하면서 혁명가를 꿈꿨던 청년 손학규는 한전에 합격까지 했으나 출근하지는 않았다. 치기 어린 몽상가의 회고담으로 치부되던 이 얘기엔 이젠 ‘내란음모’라는 무시무시한 죄명이 덧씌워질지 모른다. 2월17일 이석기(52) 통합진보당 의원 등에 대한 수원지법의 1심 판결 이후였다면 말이다.

지시대로 모였으니 일사불란하다?

이번 판결은 ①세부 계획은 없었지만, ②RO(혁명조직)는 체계를 갖춘 일사불란한 조직이므로, ③실질적 위험성이 있다는 논리로 구성된다. 유죄판결을 떠받치고 있는 핵심 전제는 ‘RO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단체’라는 명제다. 이 명제가 성립해야 RO는 무시무시한 내란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재판부는 RO의 존재를 인정했다. 근거는 국가정보원 제보자 이아무개(47)씨의 진술과 이씨가 홍순석(50)·한동근(47)씨와 함께 꾸렸던 소모임의 활동, 5월10·12일 모임에서의 발언이 전부다. 그리고 “모임 참석자들 130여 명은 모두 RO의 구성원들이라고 볼 이유가 상당하다. 따라서 RO는 내란의 주체인 조직화된 다수인의 결합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조직 강령, 조직원 명부 등 조직의 실체를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추론에 의한 결론이다. “RO는 도대체 언제 생겨나 안착된 조직인가. 내란음모의 주체인데 이 조직의 시작과 중간과 끝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런데도 RO가 이미 안착된 조직이라는 전제를 깔고 판결했다. 그 전제가 흔들리면 모든 게 다 흔들린다.”(현직 부장판사 ㄱ)

애초 RO의 ‘단체성’을 입증하는 건 검찰의 목표였다. 하지만 RO의 결성 시기와 북한과의 연계성, 북한 자금 유입 여부 등을 명확히 밝히지 못해 기소하지 못했다. 검찰은 이번 판결 뒤에야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에 대해서는 아직 수사 중이다. 완료되면 추가 기소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종합하면, 검찰도 아직 RO의 단체성에 대한 수사를 완료하지 못했는데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인 셈이다.

재판부는 RO의 일사불란함을 인정하기 위해 모임에서 이 의원의 지시조 발언 등을 언급하고 있다. “지난해 5월10일 모임에서 이석기는 다시 모일 것을 지시했다. 강제성을 띤 ‘그래도 되겠습니까?’라는 발언 외엔 참석자들에게 모임 해산의 양해를 구하는 발언은 없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불과 이틀 후인 일요일 밤에 그대로 참석했다.” 명령조로 말했는데 반발이 없었고, 지시한 대로 이틀 만에 모였으니 일사불란하다는 취지다.

하지만 판결문엔 “홍순석은 조직 차원의 지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마지못해 쫓아가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간부와 총책 간 정세 인식의 불일치가 이 사건 모임 개최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는 부분도 있다. “이석기가 5월12일 모임 강연에서 ‘10일 모임을 긴박하게 취소한 것은 간부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도 했다. 주요 간부들 사이에 이견이 있어 모임을 열었지만 그 뒤에도 의견 통일이 안 됐고, 애써 모인 130여 명의 사람을 해산시킬 만큼 간부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도 내란을 준비할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일단 50점 깔고 30점 쌓아 내논 판결”

내란음모가 성립하려면 구체적 모의가 있어야 한다. ‘저놈 죽이자’라는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 말과 관련한 앞뒤 행동을 살펴보고 실행 가능성을 판단해야 한다. 재판부는 이석기 의원 등이 두 달간 치밀한 사전 준비를 했다고 봤다. 근거는 말뿐이었다.

“김아무개는 5월12일 모임에서 ‘부산 국제시장에서 총을 구입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알아보았지만 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상호는 2010년 군사훈련자료를 인용해 경기도 평택에 소재한 유류저장소 벽의 두께와 재질을 언급했다. 또 ‘검토한 바에 의하면 기간시설의 경비가 삼엄하지 않다’거나, ‘검토받은 바에 의하면 화약을 생산하는 곳은 주로 북부에 위치해 있고, 남부에는 2곳밖에 없다’거나, ‘조사한 바에 의하면 무기고나 화학약품이 있는 곳의 주소가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으나 실제와 다르다’는 등 마치 사전 조사가 있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석기 역시 ‘인터넷 사이트에 보스턴 테러에 쓰인 사제폭탄의 매뉴얼이 게시되어 있다’고 언급했다. 이같은 발언들은 사전 정보수집 없이 즉석에서 나올 수 없다.”

인터넷 검색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이 대부분인데, 이런 수준의 언급만으로 내란음모를 적용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거세다. 발언을 행동으로 옮기려 했는지도 불분명하다. 공안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의 지적이다. “모아서 보면 구체성이 있는 것 같지만, 개별 시설별로 떼어놓고 보면 각 시설에 대한 타격 계획의 구체성이 떨어진다. 타격 계획이 구체화돼야 위험성이 발생한다. 시설마다 방호체계 등이 있을 텐데 그걸 알아보는 수준은 돼야 한다.”

이석기 의원은 징역 12년,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나머지 피고인들에게 각각 징역 4~7년, 자격정지 4~7년을 선고했다. ㄱ 판사는 “80점에 이르면 유죄를 쓸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RO가 존재한다’는 판단으로 일단 50점을 깔고, 기타 정황으로 그 위에 30점을 쌓아서 내놓은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김원철 법조팀 기자 wonchul@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