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못·미.
과연 이럴 때 쓰는 말인 듯하다. 노회찬 진보정의당 의원이 2월14일 의원직을 잃었다. 삼성과 검찰, 법원과의 싸움에서 ‘정의’의 승리를 바라는 건 역시 무리였나.
노 의원이 ‘삼성 X파일’ 사건의 떡값 검사 명단을 공개한 지 8년 만에 이날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확정됐다.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 노 의원은 국회 정론관 기자회견에서 “오늘의 대법원 판결은 최종심이 아닙니다. 국민의 심판, 역사의 판결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법 앞에 만명만 평등한 오늘의 사법부에 정의가 바로 설 때 한국의 민주주의도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오늘 국회를 떠납니다”라고 말했다. 약간 잠긴 목소리였지만, 때론 환한 웃음도 지었다.
“노회찬 대법원 선고 한 줄 요약. 떡값 준 놈 무죄, 받은 놈 무죄, 알선한 놈 무죄, 국민에게 알린 사람은 유죄.”(RT @toxicalice)
사건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은 옛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도청 전담팀인 ‘미림팀’이 1997년 도청한 녹취 파일을 입수한다.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과 홍석현 중앙일보사 사장이 이건희 삼성 회장 등의 지시로 정·관계 고위 인사들에게 명절 ‘떡값’을 제공하기로 논의하는 내용이었다. 노 의원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앞서 ‘떡값 검사’ 7명의 실명과 대화 내용이 담긴 보도자료를 국회 기자단에게 배포한 뒤, 이 보도자료를 자신의 누리집에 올렸다. 떡값 검사 명단에 올랐던 안강민 전 서울지검장은 노 의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2007년 5월 검찰은 노 의원을 명예훼손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다. 1심 유죄, 2심 무죄로 판결이 엇갈렸다. 대법원은 2011년 5월 명예훼손은 무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은 유죄 취지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허위사실이 아니라는 점, 보도자료 배포가 면책특권에 해당한다는 점은 2심 재판부와 같았지만, 보도자료를 누리집에 올린 게 면책특권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굳이 전파성이 강한 인터넷을 이용해 불법 녹음된 대화의 상세 내용과 관련 당사자의 실명을 그대로 공개한 행위는 방법의 상당성을 결여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대법원은 밝혔다.
여야 의원 159명은 지난 2월5일 벌금형이 없고 징역형만 있는 통신비밀보호법의 ‘가혹함’ 등을 이유로 개정안이 제출돼 있는 만큼, 법을 고칠 때까지 선고를 미뤄달라는 탄원서를 대법원에 제출했지만 소용없었다. 노 의원의 폭로에 앞서 삼성 X파일 녹취록을 보도했던 이상호 MBC 기자와 김연광 편집장(현 국회의장 비서실장)도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은 바 있다. 반면 검찰 수사 과정에서 “떡값 준 놈, 받은 놈, 알선한 놈” 등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검찰은 이건희 회장을 소환 조사하지 않았고, 2심 재판에서 증인으로 채택된 홍석현 회장은 출석을 거부해 과태료 300만원 처분을 받았다. 떡값 검사로 지명된 전·현직 검사 7명도 모두 무혐의 처리됐다.
“한마디로 삼성-검찰-법원으로 이어지는 어둠의 삼각동맹이 정의를 쓰레기더미에 묻은 것.”(@psmlife) “부패한 재벌과 검찰은 무죄, 이를 폭로한 노회찬은 유죄. 대한민국 법원은 유죄인가 무죄인가?”(@redianmedia)
그래서 분노는 “떡값 준 놈, 받은 놈, 알선한 놈”뿐 아니라 검찰과 법원에 쏟아진다.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삼성 X파일에 담긴 삼성그룹의 정·관계 로비 의혹은 한 줌도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필 삼성 X파일 사건의 수사를 지휘했던 이가 박근혜 정부 첫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황교안 전 고검장이다. 2005년 12월 검찰 특수수사팀이 삼성 관련 인사들과 떡값 검사들에 대해 무혐의로 수사를 종결한 뒤 는 그해말 “올해 우리에게 세상 사는 맛을 안겨준 새뚝이(남사당놀이에서 기존 놀이판의 막을 내리게 하고 또 다른 장을 새롭게 여는 사람)들을 소개한다”며 황 후보자를 사회 분야 새뚝이로 선정했다. 당시 기사에는 “법에 따라 원칙대로 수사하면 숨어있는 진실을 밝힐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라는 황 후보자의 말과 함께, “옛 안기부의 불법 도청 수사가 진행된 143일 동안 이 원칙을 충실히 지켰다. 검찰 공안부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답게 수사 과정에서의 인권침해 시비나 수사 기밀의 외부 유출 등 작은 실수 없이 수사를 말끔하게 마무리했다. 국가기관에 의해 자행된 불법도청의 최고 책임자들을 단죄함으로써 유사한 사태의 재발 방지를 위한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선정 이유가 나온다.
그리고 ‘말끔히 마무리된 수사’는 대법원의 기계적인 법 적용으로 마무리됐다. 노 의원은 “국내 최대의 재벌 회장이 대선 후보에게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건넨 사건이 ‘공공의 비상한 관심사’가 아니라는 대법원의 해괴망측한 판단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보도자료를 언론사에 배포하면 면책특권이 적용되고, 인터넷을 통해 일반 국민에게 공개하면 의원직 박탈이라는 시대착오적 궤변으로 대법원은 과연 누구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나? 지금 한국의 사법부에 정의와 양심이 있나?”라며 대법원을 강하게 성토했다.
삼성 X파일 사건을 덮는 일을 주도한 사람이 법무부 수장으로 지명된 다음날에 국회를 떠나게 된 노 의원은, 그러나 이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font size="3">“나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font>“8년 전 그날, 그 순간이 다시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불의가 이기고 정의가 졌다고 보지 않는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론으로 공개된 것은 테이프 2~3개지만, 280개가 넘는 비공개 테이프가 서울중앙지검에 보관돼 있다. 어떤 불법행위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다. 국회와 국민이 노력하면 테이프 공개를 결정할 수 있다. 역사에는 시효가 없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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