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자당은 정당 국고보조금 일부를 출연해 별도의 재단법인으로 설립키로 한 여의도연구소를 2월 발족하기로 결정. 강삼재 기조실장은 ‘여당이 정책정당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만큼 야당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느냐’며 은근히 야당의 호응을 유도.” 1995년 1월11일 가 전한 민주자유당(민자당)의 정책연구소 설립 소식이다. 야당의 ‘호응’은 거의 10년 뒤에야 이뤄졌다. 2004년 11월 열린우리당의 싱크탱크인 열린정책연구원이 설립됐다. 정당의 국고보조금 30%를 정책연구소에 쓰도록 정치자금법이 개정되면서다. 그리고 현재 야권이 열린우리당 이후 헤쳐모여를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열린정책연구원은 ‘흔적’마저 사라졌다.
“한나라당의 보수적인 이념으로는 내년 총선과 대선을 치르기 어렵다는 고민이 많았다. 보수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중도로 외연을 확대한 것이다. 예전 정책에 반할 수도 있지만, 과거보다 복지를 더 많이, 빨리 강화하려고 한다.” 2011년 7월19일 여의도연구소 비전위원장인 나성린 의원이 ‘뉴비전 보고서’를 발표했다. 0~5살 무상보육 등 진보 진영에서 주장한 복지정책을 수용한 이 보고서를 놓고 언론들은 ‘여당 싱크탱크, 정책노선 좌클릭 공식화’ 등의 제목을 달아 크게 보도했다. ‘중도 쏠림 현상’이라는 유권자 분석을 전제로 여의도연구소가 외부 전문가 100여명을 모아 2010년 8월부터 6개월 동안 연구작업을 하고, 2011년 초 의원 간담회 등 당내 공론화 작업을 거쳐 발표한 것이었다. 야당들은 “한나라당의 정체성이 친서민으로 바뀐 게 아니라 총선·대선을 의식해 정략적 목적으로 발표한 포퓰리즘”이라고 비아냥댔다. 그리고 지난해 대선에서 야권은 복지·경제민주화 등의 화두를 틀어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패했다.
‘그 화두는 우리 것’ ‘새누리당이 하면 가짜’라는 안이한 인식은 ‘실력’의 차이를 낳았다. 지난해 대선에서 18년의 ‘역사’를 지닌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소의 카운터파트는 2008년 8월 출범한 민주통합당의 민주정책연구원이었다. 일찌감치 노선의 ‘좌클릭’이란 전략을 제시하고 선거 과정에서는 여론조사를 토대로 결과를 정확히 예측했던 여의도연구소와 달리, 민주정책연구원이 대선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기억하는 이를 찾기 어렵다. 민주정책연구원의 사정에 밝은 한 야권인사는 “선거대책위, 중앙당, 민주정책연구원이 다 따로따로였다. 정책을 언제, 어떤 시점에, 어떻게 풀어놓을 것이냐는 전략의 문제인데, 현재 연구원의 여건상 정책개발도 쉽지 않지만 전략기획을 기대하기는 더 어렵다. 역량과 시스템, 리더십 등의 문제가 얽히고설켜 있다”고 말했다.
민주정책연구원이 처한 ‘여건’의 핵심은 민주당의 계파 담합 구조다. 연구원은 법률상 별도 법인으로 설립돼 있지만, 당 대표가 이사장을 맡고 원장을 임명한다. 사실상 ‘계파수장’ 역할을 해온 당 대표의 정치적 부침에 따라 연구원은 끊임없이 흔들려왔다. 당 지도부가 바뀔 때마다 연구원의 구성원이 교체되고, 특정 계파가 요구하는 단기 전술 연구에 역량이 허비됐다. 여의도연구소도 소장이 자주 바뀌지만 이사장은 외부인이 맡고 민주정책연구원보다 상대적으로 정책 전문가와 당료가 안정적으로 배치돼온 것으로 평가된다. 민주정책연구원의 전직 관계자 ㄱ씨는 “‘본당’이 엉망인데 연구원이라고 별수 있겠느냐. 여의도연구소는 노하우가 많이 쌓였고, 조직 면에서도 안정화돼 있다”고 말했다.
경비는 두 배, 지원금도 많은 여의도연구소민주당은 민주정책연구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기본 콘셉트조차 확실히 하지 못하고 있다. 여의도연구소는 전략기획·정책개발·여론조사 3가지를 핵심 업무로 삼고 있다. 특히 정책개발비 가운데 여론 및 현안조사에 70~80%가량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당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2011년도 활동 실적 정기보고서를 보면, 여의도연구소는 126회, 민주정책연구원은 36회 여론조사를 실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은 정책개발이라는 정책연구소의 ‘본연의 임무’를 강조하지만, 민주정책연구원이 정책개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정당 정책연구소가 갖고 있는 고질적 문제도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정당 정책연구소는 그동안 중앙당의 과잉 인력을 해소하는 통로로 활용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중앙당 유급사무직원(당직자)이 100명을 넘지 않도록 한 정당법 규정을 핑계로, 중앙당에서 소화하지 못하는 당직자의 ‘적’을 연구소에 걸어놓고 연구소 예산으로 이들의 인건비를 지급하는 관행이 지속돼왔다. 민주정책연구원 직원은 2011년 기준으로 56명인데, 이 가운데 연구원은 박사급 7명, 석사급 13명뿐이고, 6~7명 정도인 행정직을 뺀 나머지는 ‘무늬만 연구원’인 당직자다. 여의도연구소(2011년 기준 63명)는 박사급 7명, 석사급 4명으로 연구원 수가 더 적지만, 정책개발실·정책조사분석실·여론조사실 등에 정책 전문위원을 대거 배치했다. 활동 경비는 여의도연구소(80억원)가 민주정책연구원(43억원)의 두 배 수준이다. 민주정책연구원은 국고보조금 말고는 수입원이 거의 없는 반면, 여의도연구소는 당 지원금 등 기타 수입이 많기 때문이다. ㄱ씨는 “정책개발에만도 충분치 않은 예산(국고보조금)이 중앙당 당직자 인건비로 나가고, 당 지도부가 바뀔 때마다 조직이 흔들리는 현재 구조에서는 정책연구소로서 기본 기능을 하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정책연구소를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고민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강민 대의원은 1월9일 18대 대선 평가글에서 “민주정책연구원은 장기 전략에 집중하고 데이터를 집약해야 한다. 당명이 바뀌고 선거로 지도부가 바뀌어도, 지속적으로 자료를 관리·분석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책임단위가 필요하다”고 했다.
실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냐1995년 여의도연구소 설립 때 산파 노릇을 한 노승우 민자당 의원은 “여의도연구소는 민자당 전체의 자산으로 당이 있는 한 영속성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 1월16일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의 구조를 선진국형으로 바꿔 당이 정책정당·교육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현재 당의 진로를 연구하고 있고 최대한 빨리 확정하겠다. 특히 당의 교육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 중심에는 여의도연구소가 있고, 여의도연구소 개편 문제도 검토하겠다.” 실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18년 전이나 지금이나, 보수의 두뇌집단이 먼저 움직이고 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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