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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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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트윗- SNS·팬덤 정치의 명암

트위터, 그게 뭔교? VS 박근혜 팬덤의 역습
등록 2012-04-19 02:14 수정 2020-05-02 19:26
트위터, 그게 뭔교?

수도권 하위문화적 특성, 지방의 사회문화적 장벽 드러낸 트위터

 

@kdoosik 같은 편만 결집하는 트위터가 아니라, 다른 편을 설득하는 트위터를 만들어야…. 그러려면 적에게 적용한 기준을 우리 편에게도 적용하는 공정성이 필요하다는 반성을 해본 아침이었습니다.

“내 타임라인만 보면 제1당은 진보신당이다.”

고백하건대, 총선 전날 한 트친이 올린 이 판타스틱한 멘션을 보며, 나도 찰나 설렜더랬다. 그러나 곧바로 현실감이 역습해왔다. 실현 가능성이 ‘0’으로 무한 수렴된다는 점에서, 이 멘션이야말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관한 얼마나 역설적인 고백인가. 진보신당은 1.13%의 득표율로 정당 해산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SNS가 정치적 취향이 같은 동호인들의 자족적인 놀이터에 머물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SNS는 무엇보다 강한 행동을 추동한다. SNS 선거운동 합법화 당시, 선거운동의 혁명을 내다보는 언설이 무성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SNS에서 ‘입진보’가 욕설로 통용된다는 사실도 이 수다기계의 우점종이 정작 행동파라는 것을 방증한다. 수다의 내용도 흔히 행동을 요구한다. 이번 선거에서는 따르르한 명사들이 삭발, 번지점프, 미니스커트 착용 등을 약속하며 투표를 독려했다.

그러나 SNS가 선거와 만나는 풍경은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 무엇보다 SNS를 하는 자와 하지 않는 자 사이에는 장벽이 존재한다. 김순자(@kimsunja0411)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는 출마 뒤에야 트위터를 배웠다. 수도권에서 비(非)새누리당의 선전을 SNS 효과로 100% 환원하더라도, 지역 변수가 새로 등장한다. 새누리당이 석권한 강원도와 충청도 앞에서 SNS는 급정거, 아니 후진한 셈이다.

여기서 SNS가 맞닥뜨린 건 기술적 장벽이기 전에 사회·문화적 장벽인지 모른다. SNS에서 공유되는 문화는 다분히 도회적 취향의 하위문화(Subculture) 성격이 강하다. 농어촌 지역에 강하게 남아 있는 전통문화와는 긴장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SNS 주류 사용자는 미국 사회의 ‘양키’와 흡사한 면이 있다. 이 속어의 기원설 가운데 하나가 미국 북부 도시 사람들에 대한 남부 농촌 사람들의 경멸이라는 점은 SNS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는 이번 총선 결과를 색깔로 나타낸 지도를 보고 ‘깜놀’했다. 역대 미국의 선거 결과 지도들과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이미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수도권에서 승리하면 전체에서도 승리한다’는 공식이 깨진 것은 이번 선거의 보기 드문 성과다. 서울과 지방이라는 식민 관계는 선거 때가 아니면 좀체 폭로되지 않는다. 지금 한국의 SNS는 지독히 중앙적이며 도회적이다.

이번 선거에서 SNS를 휩쓴 ‘반MB’ 담론은 그 전형이다. 여기에는 인민의 삶이 증류돼 있다. 삶의 목소리는 비난을 무릅써야 했다. 이것은 누가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규정하는가의 문제다. 반MB 담론은 다른 이슈들을 철저히 비가시화했다. 최근 SNS에서는 노동 이슈가 거의 실종됐다. 이른바 ‘야권 연대’가 울산과 경남 창원에서 전멸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층민의 고통에 핍진하지 못한 가치 투쟁은 그 자체로 배제의 속성을 띤다. 어제의 지방 민주시민과 오늘의 지방 꼰대의 모집단이 같은 건, 그래서 미스터리가 아니다. 문제는 SNS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펼쳐지는 참주선동이다.



안영춘
한겨레 신규매체추진팀장


지난 4월3일, 충남 공주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유세에 몰려든 군중. 19대 총선 결과를 통해 새삼 서울과 다른 지방의 박근혜 팬덤이 표로 확인됐다. <한겨레> 강창광

지난 4월3일, 충남 공주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유세에 몰려든 군중. 19대 총선 결과를 통해 새삼 서울과 다른 지방의 박근혜 팬덤이 표로 확인됐다. <한겨레> 강창광


박근혜 팬덤의 역습안철수·문재인보다 장구하고 촘촘한 서사로 구축된 박근혜 팬덤의 정점
@GoEuntae(고은태) 제발 박근혜를 ‘수첩공주’라고 업신여기지 좀 말자. 업신여기는 상대에게 쩔쩔매는 건 더 쪽팔리지 않음? 상대를 무섭게 보고 진지하게 임해도 될까 말까 한 판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구 출신이다. 친척들의 대화를 늘상 들었고, 그 지역 사람들의 정치의식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그건 이 지역의 특수성이라기보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어떤 경향성의 극대화다. 할머니는 1997년에 이회창을 “많이 배웠고 너무나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나와 비슷한 사람보다, 더 똑똑하고 잘 배운 사람이 나를 대표하기 바라는 의식. 청소노동자 경험이 있는 어머니에게 청소노동자 김순자 여사를 비례로 내건 정당을 설득하려 해도, “난 똑똑한 사람이 좋더라”란 답변을 들을 수 있는 게 인생이다.

물론 ‘박근혜 팬덤’의 결속력은 이런 기본적인 요인을 넘어선다. 지난 10년간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란 ‘지위’를 활용해 그것을 넘어서는 ‘서사’를 구축해왔다. 그것은 비록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지금 야권 후보들보다는 훨씬 강력하다. 어머니가 죽은 뒤 퍼스트레이디, 아버지가 죽은 뒤 ‘왕국’을 잃고 떠돌다 정계 입문, ‘제왕적 총재’이던 이회창에게 밀려 당을 떠났다가 다시 합류, 이명박에게 또 한 번 패했지만 나가선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기에 절치부심으로 버티고 숙인 그녀의 ‘역사’는, “여자는 안 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문화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영남의 노년층들에게 그녀를 받아들이게 할 만큼 오랫동안 구축돼온 스토리다. 영화가 드라마보다 짜임새가 있더라도, 사람들은 보통 오랜 기간 방영되는 드라마에 더 감정이입을 하지 않던가. 안철수와 문재인의 ‘서사’가 적어도 정치 영역에선 아직 박근혜에 뒤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혹자는 팟캐스트 방송 를 필두로 한 팬덤정치를 기성정치와 대립시키지만, 사실 팬덤정치야말로 오히려 한국 정치의 기본값이다. 특히 1990년대 팬덤문화를 적절히 흡수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태동 이후부턴 더욱 그랬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금지당했기에 ‘인물’과 ‘서사’에 치중하게 된 것이 한국 정치였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박근혜 팬덤’의 확장성에서 한계도 보여줬다. 많은 수도권 시민들은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외국인 친구들 보기에 면구스럽다 생각하는 듯하고, 새누리당의 1당을 가능케 한 강원도과 충청도의 지지는 조건부일 뿐이다. 지금껏 수많은 검증을 당한 박근혜에게서 특별히 다른 약점이 튀어나오지는 않겠지만, 정수장학회 문제 등은 넘어서야 할 부분이다.

팬덤정치에 열광하는 듯한 수도권 시민들이, 팬덤정치의 한 조류인 ‘박근혜 팬덤’과 맞서는 이 상황, 한국 정치의 역동성을 ‘이성과 감성의 대립’ 따위의 수사에 가두는 한가한 정치평론이 부질없는 이유다.



한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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