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객, 택시 노동자, 진보정당 평당원, 언론인. ‘홍세화’의 이름에 붙는 수식어가 하나 더 늘었다. ‘정치인’이다. 이변이 없다면 그는 11월25일 당대회에서 진보신당의 네 번째 대표로 확정된다. ‘늙은 사병’은 왜 깃발을 들고 맨 앞줄에 서기로 결심한 것일까. 그보다, ‘정치인 홍세화’는 진보신당의 혼란을 수습하고 진보정치의 저변을 확대할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11월8일 서울 여의도 진보신당 당사에서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 후보를 만났다. ‘떠난 자’들을 향한 분노를 굳이 감추지 않았지만, 진보신당의 희망을 말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정치인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소회가 어떤가. 당 대표 출마선언문에선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라고 표현했는데.
(프랑스에서 2002년) 귀국해 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분당 상황에서 내 정체성에 근거를 두고 진보신당을 선택했다. 나에게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라는 대의는 아주 중요한 과제다. 그래서 평당원으로서 열심히 역할 분담을 했다. 그런데 기본적인 틀이 무너지는 상황이 왔다. 내 자신의 문제인 동시에 나와 함께 한국 사회의 대의를 공유했던 당원들이 동요하는 게 현실이다. 당원들은 이 척박한 땅에서 30년에 이르는 진보정당 운동, 진보정치, 노동자 정치세력화 과정을 겪으며 나온 소중한 열매다. 그냥 평당원 정신으로 남아 있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당원들을 추스르고 새 출발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언론인이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도 많다.
에 있으면서도 당원이라는 게 문제가 됐었는데, 교사의 정치 참여를 막는 미성숙한 현실 때문이라고 본다. 권력을 견제하고 비판했던 지식인, 언론인이 권력을 지향하는 정당인, 정치인이 되는 것에 큰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보수 정당이나 지금 강한 정당이라면 그런 비판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진보신당에 참여하는 것은 자본권력·정치권력을 견제하는 현실적인 정치적 힘을 키우는 것이다.
내년 총선에도 출마하나.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지만, (일단) 올랐으면 치열하게, 제대로, 적극적으로 하고 싶다. 비례대표도, 지역구 출마 가능성도 다 열어놓고 있다. 로 알려진 허명이, 내가 생각하는 진보적 가치와 이념을 담은 진보신당 역량을 강화하는 데 소진될 수 있다면 탈진해도 괜찮다. (웃음)
진보신당은 새로운 진보, 진보의 재구성을 주장하며 창당했다. 하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고 다시 위기에 빠졌다. 여태까지 안 하거나 못했던 걸 지금은 할 수 있는 건가.
한국의 진보정치 역량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봐야 한다. 짧은 기간에 효과적인 결과를 기대할 만한 정치적 풍토도 아니다. 3년6개월 동안 못한 걸 지금은 할 수 있겠느냐가 아니라, 3년6개월 동안 안 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할 수 있는 거다. 우리의 정체성을 토대로 장기적 전망을 갖고 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해보지 않은 채 영향력이 없다고 통합을 얘기하는 건 정체성을 뒤흔드는 일이다. 만약 장기적 전망으로 정체성을 유지하며 제대로 했는데도 한국 사회의 진보 역량이 부족하다면, 그래서 당을 운영할 상황조차 어렵다면, 산개해서 하방하고, 각자의 지역과 자리에서 활동하며 다음을 기약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각오와 자세로 우리의 원칙을 지키며 제대로 싸워보자는 거다.
당원 배가 운동을 벌이겠다고 했는데, 우리는 유럽과 달리 노조 조직률이 낮고 사회적 기반도 다르다. 특히 지금 20~30대는 반한나라·비민주 성향의 제3세력에 열광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의견그룹이 아니라 실천그룹, 행동그룹이다. 가령 삼성과 어떻게 싸우는지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토대로, 우리의 가치와 이념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면 어느 정도 열매를 맺을 수 있지 않겠나. 만약 반향을 얻지 못한다면 그게 우리 역량이니 하방이라도 할 각오가 필요하다고 한 거다. 대표단이 꾸려지면 당원들과 논의하겠지만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 되지 않도록 인문학·사회과학을 당원과 국민이 함께 공부하고 소통하는 장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민중의 집’ 같은 지역 풀뿌리 활동과 교육도 강화해야 한다.
노회찬·심상정·조승수 전 대표 3명 등 통합연대가 탈당해 민주노동당·국민참여당과 통합 수순을 밟고 있는데.
(진보정당 통합안이 부결된) 9월4일 당대회까지 회의록을 살펴봤다. 우리가 통합하지 않으면 민주노동당은 국민참여당과 통합할 거니까, 진보정치의 우경화를 막으려면 통합해야 한다는 논의가 끊임없이 나오더라. 통합연대에 참여한 분들이 한 얘기다. 자신에게 충실했으면 좋겠다. 지금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상황은 여러모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자기 행보에 책임지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당을 책임져왔고 민주노동당과 통합하자고 설득한 사람들이다. 그게 부결되자 “당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해놓고 탈당한 건, 미필적으로라도 진보신당의 소멸을 바라는 방향이라는 점에서 용납하기 어렵다.
노·심·조 전 대표와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이다. 특히 심 전 대표는 후원회장도 맡았고, 운동의 정신을 지키는 정치인이라고 칭찬한 적도 있다.
국내에서 활동한 분들과 달리 나는 외국에서 부딪히지 않았다는 부채의식의 표현이었다. (어쨌든) 나는 지도부로서 설득했는데 당이 따라오지 않았을 때 해야 할 일은 탈당이 아니라 하방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파국이다. 내가 상처받은 건 사실이다. 이럴 수가 있나.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멀고, 물이 낮은 곳으로 끝까지 흐르면 결국 만나리라고 본다.
야권 통합 문제는 어떻게 할 건가.
선거공학·정치공학으로 (무조건) 한 울타리로 들어오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정당이나 보수주의 정당과 같이할 수 없는 건 너무 당연한데 통합하라고 하는 건 폭력이다. 진보신당이 이렇게 된 것 자체가 그 문제 때문이다. ‘현실’이라는 표현에 고쳐나가야 할 현실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있다면, 한국에서는 진보 정치인조차 현실을 후자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자꾸 원칙을 흔들고, 그런 행보를 합리화하게 된다. 우리의 기조와 강령이 같으면 민주노총이든 진보교연(진보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모임)이든 사회당이든 통합해야 한다. 이쪽과는 큰 어려움 없이 갈 수 있을 것 같다.
후보 단일화 등 선거 연합은 어떻게 되나.
유연하게 참여할 것이다. 통합 얘기가 나오는 건, 나와 다른 정치세력을 적대적 관계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달라도 공존하며 경쟁하고 연대도 하는 게 정치가 성숙하는 거다. 당의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상황과 사안에 따라 적극적으로 연대할 수도 있고 척을 질 수도 있는 게 정치의 당연한 모습이다. 공자가 ‘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한다’고 했다. 소인의 정치에서 군자의 정치로 성숙해져야 한다.
내년 총선 목표는.
정당 지지율 3%는 넘길 수 있다고 본다.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도 입당했고, 요즘은 탈당보다 입당이 더 많은 날도 있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 삼성과의 싸움 등과 맞물리는, 인지도 있는 인물로 최대한 진용을 꾸릴 것이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진보신당이 현실적으로 힘이 약하지 않느냐고 하는데, 언제 언론이 현실적인 힘을 키워줘본 적 있느냐고 묻고 싶다. 언론도 (진보정당이 힘을 키우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묻기만 하는 건 무책임한 자세가 아닌가.
글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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