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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소 밖 유권자의 힘

유권자 입 막는 선거법 개정에 ‘유자넷’ 등 시민 직접 나서… 입법청원안 제출한 뒤 개정 반대 정당·의원 공개로 압박 예정
등록 2011-06-23 07:36 수정 2020-05-02 19:26

‘유권자는 표 찍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생각은 한국에서 일반적인 정치의식이 된 듯하다. 지난 6월4일 가 시민정치 운동단체 ‘내가 꿈꾸는 나라’와 함께한 ‘시민의 정치의식 및 참여도’ 조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하는 좋은 예다. ‘정치인들이 민의를 대변하지 못할 때 시민들이 직접 정치 및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의견이 10명 가운데 7명꼴이었다. ‘시민들이 특정한 정치적 사안에 직접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정치 발전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응답자의 83.6%나 됐다.

유권자 참여 발목 잡는 선거법

여러 사람의 생각이 모이면 실천이 된다. 국회 스스로는 ‘국민 참여형’으로 고칠 생각도 가능성도 별로 없는 선거법과 공천제도 등의 개선을 시민들이 직접 요구하고 나섰다. 지난 6월1일 출범한 ‘유권자 자유 네트워크’(유자넷) 준비모임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개별 시민단체 차원에서 제각각 이런 의견을 내왔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이런 움직임에 참여하거나 시민단체들이 공통된 의견을 낸 적은 없었다. 내년 총선·대선을 앞두고 술렁이는 정치권에, ‘연대하는 유권자의 힘은 투표할 때 말고도 발휘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유권자자유네트워크 회원들이 6월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선거법 개정을 촉구하는 펼침막을 들어 보이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유권자자유네트워크 회원들이 6월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선거법 개정을 촉구하는 펼침막을 들어 보이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돈은 묶고 말은 푼다’는 취지의 현행 공직선거법(선거법)은 자의적 잣대로 시민의 입을 가로막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인터넷, 심지어 개인 블로그에 정치 패러디물이나 특정 후보 비판 글을 올려도, 뉴스 기사에 댓글을 써도 검찰이 잡아가고 법원이 처벌한다. ‘선거법 위반’이라는 딱지 가운데 가장 남발되는 사례다. 후보 이력을 근거로 낙선운동을 벌이거나, 지지자들이 후원금을 마련하려고 저금통을 나눠줘도 마찬가지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낙선운동을 벌인 총선시민연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이 아이디어를 낸 ‘희망돼지 저금통’이 그렇게 철퇴를 맞았다.

지난해 지방선거 땐 ‘투표 인증샷’을 트위터에 올린 20대에게 자신의 판화를 선물하겠다고 한 임옥상 화백 등이 선거법 제230조 ‘매수 및 이해유도죄’에 걸렸다. 배옥병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 상임운영위원장은 ‘여당의 선별급식 반대, 친환경 무상급식 찬성’이라는 펼침막을 붙인 ‘죄’로 1심에서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았다. 투표율을 올리려는 투표 독려 활동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도 하는 일이고, 무상급식은 지난해 선거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정책 의제다. 국가 기관도 하는 일에 동참하고, 국민 대부분이 관심 갖는 사안으로 ‘정책 선거’를 만들려는 노력이 선거법에 발목 잡히는 현실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유자넷 준비모임이 지난 6월1일 떴다. 유자넷은 유권자의 참정권과 표현의 자유 보장을 위해 선거법 개정 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누리꾼 등의 모임이다. 이들은 인터넷 실명제(82조), 시설물 설치 금지(90조), 선거 6개월 전부터 정치적 논의의 광범위한 제한(93조), 각종 집회 제한(103조), 서명날인 운동 금지(107조), 매수 및 이해유도죄(230조), 사전선거 운동 금지(254조) 등을 독소 조항이라고 지목한다. 이 조항들 때문에 유권자가 선거에 참여하기 어렵고, 정책 선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후보자·정당 지지·반대의 권리 △정책 호소의 권리 △투표 권유의 권리가 보장되도록 선거법을 고치라는 게 이들의 요구다.

올 10월 초 ‘유권자 총회’ 열어

정치권이 좋아하는 ‘국제 기준’에 비춰보더라도 선거법은 비상식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지난 6월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17차 회의에서 ‘한국의 의사와 표현의 자유의 권리에 관한 보고서’를 공식 채택했다. 보고서는 특히 선거법과 관련해 △선거 6개월 전부터 정치적 논의를 광범위하게 제한하며 △선거운동과 단순한 의견 개진을 모호하게 구분해 자의적으로 적용하며 △선거 쟁점과 관련한 정책 캠페인을 규제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곤 “선거 당일에 이르는 중요한 시기에 선거 및 후보자 관련 주요 사안에 관한 정보와 의견의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교류를 포함해 표현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전면 보장할 것”을 권고했다.

이를 근거로 유자넷은 선거법의 문제점을 분석한 보고서를 지난 6월8일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들에게 전달했다. 이들은 선거법 개정 관련 입법청원안을 만들어 제출하고, 개정에 반대하는 국회의원·정당의 정보를 공개해 내년 총선·대선에서 ‘선택의 기준’도 마련할 계획이다. 10월 초엔 ‘유권자 총회’도 연다. 10월은 내년 총선의 6개월 전으로, 선거법 93조에 따라 정치적 의사 표현에 제한을 받기 시작하는 상징적인 시점이다.

정당의 공천제도 개선 방안도 시민사회에서 제시된다.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국민의 명령)은 6월16일 국회에서 이와 관련한 토론회를 열었다. 물론 국민의 명령이 정파등록제에 기반을 둔 야권 단일 정당 건설을 주장하는 만큼 공천제도 개선안 역시 ‘통합의 기술’로 제시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정치 발전과 민주화의 토대가 민주적 공천임을 고려하면 이들의 목소리는 흘려들을 일은 아니다. 더구나 당원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상향식 공천제는 정당에서도 간간이 논의되지만, 국회의원들의 기득권 때문에 번번이 무산되어온 터다.

6월16일 토론회에서는 대규모 국민참여경선이 주로 논의됐다. 김두수 국민의 명령 집행위원은 전문성·개방성·대중성에 입각한 공천제도를 주장했다. 전문가와 국민 신청자 절반씩으로 구성된 배심단을 만들어 후보자를 공개 심사하고, 당원을 포함한 국민참여경선을 실시하자는 것이다. 배심단 평가와 국민참여경선 결과는 일정한 비율로 합산해 최종 공천자를 가린다. 조성대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부)는 1인2표제로 국민참여경선을 실시해 진보 정당을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성근 국민의 명령 대표는 지난 5월31일 지역구 후보의 70%는 경선으로 뽑고, 30%는 정파별 득표 비율에 따라 전략공천을 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국 시민사회단체 430여 곳의 연대조직인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도 정치제도 개선안을 마련 중이다. 선거법은 물론 비례대표 확대, 석패율제 관련 의견, 지방자치 강화 방안 등 전반적인 정치관계법 개정을 고민하고 있다. 단체들의 의견을 모아 7월까지 단일안을 만들고, 국회와 논의체를 구성해 각 정당이 좀더 적극적으로 정치제도를 개선하는 데 나서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권리를 행사할 힘의 원천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노르베르토 보비오는 저서 에서 민주화의 진전 기준을 이렇게 설명했다. “관련 있는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권한이 있는 참여권자의 수가 얼마나 증대되었느냐 하는 것보다는, 이러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나 영역의 폭이 얼마나 증대되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권리를 행사할 상황이나 영역의 폭’을 늘리는 건 정치인이 아니다. 그들의 운명을 좌우할 힘을 가진 유권자의 참여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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