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이회창, 고건, 이해찬, 이수성…. 국무총리 출신으로 대통령을 꿈꾸다 실패한 쓰린 경험을 공유한 이들이다. 최근엔 범야권의 잠재적 대선주자로 분류되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총리에 임명됐다.
총리는 헌법과 정부조직법 등이 정한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권력 서열 2인자다.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하고(헌법 86조),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땐 그 권한을 대행하는(헌법 71조·정부조직법 12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다. 하지만 최규하 전 대통령을 빼면 총리가 대통령이 된 일은 없다. 최 전 대통령도 10·26 사건 이후 군부의 복잡한 권력다툼 속에서 간접선거로 당선된 ‘과도기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적지 않은 총리들이 대선에 나서거나 대선주자로 거론되는데, 왜 정작 1인자로 올라선 이는 아직 없을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총리는 선출직인 대통령이나 국회의원과 달리 임명직이어서, 주어진 권한을 활용해 자기 뜻을 펴는 데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는 총리직의 출발 때부터 그랬다. “한국 사람들은 국무총리를 원하지 않고 있으며 의원들은 이에 반대할 것이오. 그러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다만 대통령을 보좌하는 의미에서의 권한 없는 총리가 있을 수 있을 것이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고문인 로버트 올리버에게 쓴 편지다. 총리를 대통령의 ‘비서실장’ 정도로 여긴 이승만 대통령 아래에서 초대 총리 이범석도 총리의 역할과 위상을 강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그는 국회에서 총리 인준을 받자마자 “국무총리의 정견이라는 것은 대통령을 보필하여 대통령의 정견을 충실히 실천에 옮기는 것”이라고 총리의 역할을 규정했다.
역대 최대 권한 누린 장면 총리도 중도 퇴진내각제를 채택했던 제2공화국 시절 총리는 제도적으로 △국무위원 임면권 △국무회의 의장 △행정 각 부 지휘·감독 △민의원 해산권 등 역대 총리 가운데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졌다. 하지만 장면 당시 총리도 윤보선 대통령과 정치적 갈등을 빚다 여덟 달 만에 자리를 내놨다.
국무총리 정무비서관실 국장 출신으로 라는 책을 낸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은 “역대 총리 가운데 ‘밥값’을 제대로 한 사람은 이회창·이해찬 전 총리 정도다. 대부분 법에 정해진 권한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의전총리, 대독총리에 그쳤다”고 말했다.
‘책임총리제’를 대선공약으로 내걸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해찬 전 총리의 관계는 과거와 다른 측면이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매주 열리는 국무회의에 한 달에 한 번꼴로만 참석해 국무회의 부의장인 이 전 총리가 의장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 전 총리도 ‘실세 총리’라는 평에 걸맞게 노 대통령과 생각이 다를 땐 언쟁도 불사했다. “유시민 의원이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됐을 때 이 전 총리는 대통령을 찾아가 강하게 반대 의견을 폈다. 노 대통령이 ‘이것만은 양보 못한다’고 해 결국 물러서긴 했지만, 제도로만 존재했던 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을 행사한 거다.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도 이 전 총리는 반대 의견을 냈다.” 이 전 총리 측근인 김현 민주당 부대변인의 회고다.
이해찬 총리도 독자적 리더십 구축 못해하지만 이 전 총리에 대해서조차 노 전 대통령과 ‘다른 길’을 걸었다거나 총리로서 독자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평가하는 이는 찾기 어렵다. 이 전 총리 역시 “대통령의 정견을 충실히 실천에 옮기는” 총리의 속성에 충실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철희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컨설팅본부장은 “책임총리라 해도 이전보다 많은 재량권을 갖는다는 거지, 대통령을 보완하는 역할의 본질에서 벗어날 순 없다”고 설명한다. 아무리 권한을 확대해도 임명권자와 피임명권자의 수직적인 관계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총리가 대통령을 넘어 조명받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프랑스나 미국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실히 드러난다. 프랑스에서도 대통령이 총리를 지명하지만, 여당이 의회 소수당이 되는 일이 적지 않아 자연히 총리와 내각은 야당 몫이었다.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이 대등하거나 오히려 총리의 권한이 더 강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 총리를 지낸 자크 시라크는 ‘2인자’가 아니라 수평 관계의 ‘파트너’이자 ‘경쟁자’였고, 이를 기반으로 1995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 부통령을 지낸 아버지 부시가 1989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부통령이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서 선거를 함께 치러 권력을 분점했기 때문이다.
임명직이라는 말은 대통령이 필요로 하는 정치적 역할을 수행할 사람을 골라 앉힌다는 말과도 통한다. 라는 책을 낸 이재원 전 정무1차관은 “역대 대통령들은 자신의 정치적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정국 전환용 카드로 총리를 임명하거나 정당성을 결여한 정권이 이를 보완하려고 국민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을 영입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누가 총리가 되든 애초부터 역할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총리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할 말 못한 채 용도 폐기될 우려그래서인지 총리에 대한 평가는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대체로 일치한다. ‘성공한 총리’라는 평가를 받으려면 먼저 ‘성공한 대통령’이 있어야 한다. 총리 출신 정치인이 대선에 실패한 이유는 대중적 지지를 받으며 퇴임한 대통령이 없었다는 말도 된다.
단숨에 여권의 차기 대선 구도를 뒤흔들어놓은 정운찬 총리는 어찌 될까? 여권의 한 핵심 인사는 정 총리 임명 뒤 그에게 “한승수 총리처럼 하면 이명박 정부는 물론 당신도 미래가 없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대통령에게도 할 말은 하겠다”는 취임 일성대로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모두 동원해 이 대통령과 국민의 가교가 돼달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기대는 생각보다 빨리 무너질 듯하다. 청문회에 이어 국정감사에서도 다른 국무위원 못지않은 도덕성 문제가 줄줄이 터졌고, 용산 참사를 해결할 열쇠는 정부가 아닌 서울시에 떠넘기고 말았다. 이철희 본부장은 “정 총리는 계속 대선주자로서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가겠지만, 4대강 사업이나 세종시 등 난제를 매끄럽게 풀지 못한다면 그도 ‘위기관리용 카드의 하나’로 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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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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