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행정체제 개편을 위한 정치권의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행정체제 개편의 키를 쥐고 있는 한나라당의 개편안과 추진 일정도 윤곽을 드러냈다.
국회 지방행정체제개편특위(개편특위) 소속 한나라당 의원들은 3월16일 첫 번째 자체 회의를 열고 행정체제 개편에 대한 구체적 방향과 추진 일정을 논의했다. 개편특위 위원장인 허태열 최고위원을 중심으로 권경석·차명진·이학재 의원 등이 참석했다. 특히 이날 회의에서는 올 하반기까지 행정체제 개편 국민투표를 완료하겠다는 계획이 처음으로 제시됐다. 그동안 여야는 국회 특위를 구성해 행정체제 개편 방향을 논의하겠다는 수준의 합의에 머물러 있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개편특위 관계자는 “허태열 위원장이 올해 안에 ‘지방행정체제개편특별법’(가칭)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늦어도 올 11월까지 이를 바탕으로 국민투표를 완료하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이 입수한 관련 회의 자료를 보면, 한나라당은 ‘향후 추진 일정(안)’ 항목에서 국민투표에 부치는 시기를 “2009년 하반기”라고 못박았다. 행정체제 개편을 위한 국회와 정부의 구체적인 입법 내용이 확정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뜻이다.
국민투표는 헌법을 개정할 때나 그 밖의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때 하게 돼 있다. 헌법 72조는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헌법을 고칠 때만 국민투표를 했다. 마지막 국민투표는 1987년 10월27일이었다(표 참조). 한나라당 계획대로 올 하반기 행정체제 개편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면, 이는 건국 이후 정책 추진을 위해 국민투표를 치른 첫 사례로 기록될 전망이다.
한나라당이 올 하반기 국민투표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유는 두 가지다. 행정체제 개편이 국민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 사안인 만큼, 여야가 마련하게 될 ‘지방행정체제개편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더라도 국민투표로 정당성을 확보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또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 행정체제 개편에 반대하는 전국 시·도지사의 기득권을 소멸시키려면 올 하반기에 국민투표를 마쳐야 한다는 것이 한나라당의 계산이다.
한나라당 회의 자료에 따르면, 전국 230개 시·군·구는 행정체제 개편에 따라 60~70개 ‘통합광역시’로 통폐합된다. 또 각 광역시·도는 산하 시·군·구의 3분의 2 이상이 통합되면 폐지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도가 없어지면 전국을 5~7개 대광역권으로 나눠 광역청(가칭)을 설치한다. 도가 담당했던 일부 국가 사무 기능을 처리하기 위해서다. 결과적으로 행정계층은 ‘중앙정부-광역시·도-시·군·구’에서 ‘중앙정부-통합광역시’로 단순화된다. 이런 방안은 여러 가지 논란거리를 품고 있다. 이번 회의에서는 주요 쟁점에 대한 한나라당의 견해도 드러났다.
회의 자료에서는 가장 큰 쟁점이던 ‘도 폐지’에 대해 “행정계층 축소가 지방행정체제 개편의 핵심 과제로서, 중간 단계인 도의 폐지는 필수”라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가까운 차명진 의원은 반대 의사를 강력히 피력했지만, ‘도 폐지’에 대한 논리가 우세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문수 지사는 ‘도 폐지’를 가장 반대하는 단체장 가운데 한 명이다.
특별시와 광역시의 분할 문제도 주요 쟁점이다. 특히 서울 분할 문제는 찬반 양론이 팽팽한 사안이었지만, 한나라당 개편특위의 잠정 대안은 “인구·경제력 등에서 월등한 특별·광역시의 존치는 현행 도보다 규모가 작은 통합광역시 간의 불균형과 피폐화를 더욱 심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분할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도의 기능을 일부 대체할 광역청의 지위 문제도 논란이 많았다. 한나라당은 광역청의 국가기관화가 바람직하다는 대안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허태열 최고위원은 과의 인터뷰에서 “도가 폐지될 경우 국가 사무를 대행할 기관이 필요하다”며 “따라서 광역청은 도의 국가 사무 기능만 가져올 뿐 지방자치 사무는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광역청을 자치단체로 존속시켜야 한다는 자유선진당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부분이다.
한나라당의 이번 회의에서는 이 밖에도 올 하반기 국민투표 실시를 위해 △4월부터 정치권과 학계 인사를 중심으로 지방행정체제 개편에 관한 중앙 공청회 시작 △5월부터 전국 각 지역 순회 공청회 개최와 해외 사례 수집 △10월까지 정부 행정체제 개편준비안 완성 △11월까지 국민투표 회부 및 확정 등 세부 추진 일정도 제시됐다.
한나라당 계획에 따르면, 당장 행정체제 개편 공청회가 시작되는 4월부터 국민투표가 예정된 올 하반기까지 정국은 온통 행정체제 개편 소용돌이에 빠져들 전망이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행정체제 개편 논의를 본격적으로 꺼낸다는 것은 곧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개편특위 관계자도 “이르면 4월부터, 늦어도 4월 재보선이 끝나는 5월부터 행정체제 개편에 대한 논쟁이 뜨거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한나라당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마침 한나라당 개편특위가 첫 회의를 했던 3월16일 행정안전부는 지방자치단체의 자율적 통합을 유도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이웃 시·군과 스스로 통합하는 지자체에 재정적 인센티브를 제공해 시·군 광역화를 꾀하겠다는 취지다. 정부는 이를 위해 ‘기초자치단체 자율통합지원특례법’(가칭)을 마련해 5월까지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정부와 한나라당이 행정체제 개편에 갑자기 속도를 내는 이유는 이명박 대통령의 의중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행정체제 개편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박희태 대표부터 행정체제 개편에 신중한 쪽이었다. 한나라당 출신 김형오 국회의장은 행정체제 개편보다 개헌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청와대는 행정체제 개편을 위한 지방행정체제개편특위 구성안이 빨리 통과돼야 한다고 여당을 재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개편특위 구성안은 언론 관련법 논란으로 정국이 어수선했던 3월3일 조용히 국회를 통과했다. 여권 관계자는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내에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해야 할 사업으로 행정체제 개편을 꼽을 만큼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 학계에서 우려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행정체제 개편의 필요성과는 별개로, 올 하반기에 국민투표까지 마치겠다는 주장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약 600년 전의 8도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지금의 행정구역을 바꾸려면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필수라는 지적이다.
“국민투표 대상 아니다” 반론민주당 행정구역개편 태스크포스 간사를 맡아 관련 논의를 주도해온 우윤근 의원은 “행정체제 개편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야 한다”며 “정권이 업적으로 삼기 위해 토목공사를 하듯 그렇게 속도전으로 밀어붙여서 될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 의원은 “해당 주민들이 준비할 시간도 필요한 만큼 내년까지 법을 만들되, 내년 지방선거는 현재 체제로 치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기우 인하대 교수(법학)는 아예 행정체제 개편에 대한 국민투표가 성립할 수 없다는 해석을 내놨다. 이 교수는 “행정체제 개편은 국가 안위에 대한 정책이라고 볼 수 없다”며 “설령 정치권에서 국민투표를 강행한다고 해도 그 결과가 법적 구속력을 가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국민투표를 통해 행정체제 개편을 일괄 추진한다는 것은 지역의 사정을 무시한 채 우격다짐으로 행정체제 개편을 강행하겠다는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행정구역 개편은 대한민국 지도를 새롭게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4월 이후 행정체제 개편의 내용과 방식에 대한 격렬한 논란이 불가피하게 됐다. 국민투표 실시 여부와 시기는 첫 번째 뇌관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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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체제 개편 일정이 어떻게 되나.
=여야 간 논의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내년 지방선거 전에는 (행정체제 개편 관련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도 지방선거에 임박해서 만들면 부작용이 따를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올해 말까지는 확정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너무 빠른 것 아닌가.
=행정체제 개편이 중차대한 사안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 17대 국회에서도 꾸준히 논의돼왔기 때문에 국민적 공감대는 상당히 형성돼 있다. 4월 정기국회부터 개편 특위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 많은 언론 보도가 나올 것이다. 17대 국회 때는 지역 순회 공청회를 하지 않았는데, 지역 주민이 지방자치 주체인 만큼 공청회를 열 것이다.
-정치권을 제외하면 내용을 잘 알지 못할 텐데.
=행정체제 개편에 대한 해법은 거의 나와 있다. 여야 간 쟁점이 많은 것도 아니다. 행정체제 개편은 일차적으로 지역 주민을 위한 것이고, 큰 틀에서는 국가 경쟁력을 위한 사업이다. 국론이 분열되고 혼란이 생기면 안 될 사안이라고 본다. 이런 과제는 시간을 많이 끄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핵심 쟁점인 ‘도 폐지’에 대해 당내 공감대는 형성돼 있나.
=이론이 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다수가 오해에 기인하고 있다. 언론도 ‘도 폐지, 시·군·구 통합’ 이런 식으로 소개하는데, 사실 시·군·구 통합이 먼저다. 지금의 시·군·구는 너무 협소하고 인구가 적다. 그러다 보니 지방자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경기도의 경우 31개 시·군·구를 통합하다 보면 10개 정도로 축소될 것이다. 충북은 3개, 충남은 5개, 이런 식이다. 예컨대 충북의 경우 3개의 통합 시·군·구를 위해 도가 필요한가. 그래서 시·군·구 통합의 결과로 도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도는 이제 역사적 사명을 다했다.
-한나라당 출신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도 폐지에 강력히 반대한다.
=정치적 배경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를 따르는 정치인들도 함께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경기도 산하 시·군이 통합하지 않고 김 지사와 더불어 계속 현행 체제를 유지하겠다면 경기도는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3분의 2 이상의 산하 시·군이 통합해서 (도 체제에서) 분리돼 나가면 그때는 도를 없애야 한다. 김 지사가 도를 폐지하는 것에 그렇게 반대한다면 시·군에 서비스를 잘해서 통합하지 않도록 하면 된다.
-이명박 대통령의 의지는 어떤가.
=굳이 내가 소개할 것도 없는 것이, 이 대통령은 이미 지난해 청와대회담에서 야당과 행정체제 개편에 대한 큰 틀의 합의를 봤다. 100대 국정과제에도 처음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대통령이 넣으라고 한 것이다. 첫 번째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행정체제 개편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것만 봐도 행정체제 개편에 대한 이 대통령의 의지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나.
최성진 기자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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