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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의 우향우 실험

등록 2008-01-18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낡은 좌파 이념’을 대선 패인으로 분석하고 ‘신진보’ 좌표 설정한 대통합민주신당 손학규 대표</font>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산은 첩첩하고 물은 겹겹이라, 길이 없을 성싶지만, 저 너머에는 분명 꽃향기 풍기는 마을 있습니다.”

신당 앞에 펼쳐진 길이란다. 지난 1월11일 대통합민주신당의 새 ‘선장’으로 뽑힌 손학규 대표의 취임식 인사말 중 일부다. 손 대표는 신당을 “꽃향기 풍기는 마을”로 이끌 수 있을까?

‘새로운 진보’ 설명하는 ‘실용·중도·실천’

손학규 대표는 ‘대통합민주신당호’의 좌표를 새롭게 설정했다. 그래야 꽃향기 풍기는 마을로 갈 수 있다는 게 그의 확신이다. 그가 강조한 변화의 필요성은 사실 언급할 필요가 없다. 신당의 그 누구도 변화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변화의 방향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손 대표는 취임사 및 취임 기자회견 준비를 많이 했던지, 그가 제시한 좌표는 총론과 각론을 두루 갖췄다. 총론, 즉 변화의 큰 방향과 원칙은 한마디로 “새로운 진보”다. ‘새로운’을 한자(新)로 바꾸면 말 그대로 신진보가 된다. 손 대표는 각론을 제시하기에 앞서 신진보가 “중도적 가치, 실용적 정신이 반영되는 진보다. …막연한 몽상이 아닌, 실증적이고 실천 가능한 ‘과학적 진보주의’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던진 ‘실용, 중도, 실천’ 등의 단어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정치적 이미지이자 리더십의 특징들이다.

왜 이런 답이 나왔을까? 지난 대통령 선거 패배에 대한 손학규식 진단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는 “80년대식의 낡은 틀로 21세기 현실을 재단할 수는 없다. 이제 고정관념과 편견을 버리고 보다 유연한 사고와 행동으로 21세기에 맞는 진보의 가치를 실현해나가야 한다”고 에둘러 참여정부와 신당이 걸어온 길을 비판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손 대표의 이런 패인 진단과 대안 모색이 정답이라고 했다. 그는 과의 통화에서 “보수가 신보수로 집권했기 때문에 진보도 신진보로 갈 수밖에 없다”며 “자율과 성장, 경쟁 등 보수의 핵심적 가치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진단은 과거 열린우리당이 너무 왼쪽을 지향했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김 교수는 영국의 노동당이 재집권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것도 블레어가 중심이 돼 너무 왼쪽으로 가 있던 노동당을 중간으로 옮겨놨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손 대표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김 교수와 똑같이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을 벤치마킹의 사례로 들었다. 손 대표는 “내가 80년대 영국에 있었기 때문에 노동당이 어떻게 낡은 좌파의 이념을 갖고 이념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쇠락해갔는지 보았다”며 “또한 제3의 길을 추구하면서 실천적인 국민의 이익에 봉사하는 그런 진보노선을 추구해나가는 모습도 보았다”고 말했다.

탈당한 이해찬도 ‘노동당 제3의 길’

하지만 ‘손학규식 길’이 가야 할 ‘제3의 길’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이들이 있다. 지난해 당 대선 후보 선출 과정에서도 집요하게 한나라당 출신인 손 대표의 과거 경력을 문제 삼았던 이해찬 전 총리는 손 대표 체제가 들어서자 신당을 탈당했다. 그는 신당을 떠나면서 “손 대표가 이끄는 신당은 인간의 존엄성, 성숙한 민주주의, 한반도 평화공동체 등 자신의 가치를 지키지 못하고 어떤 정체성도 없이 좌표를 잃은 정당으로 변질됐기 때문에 당을 떠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엄동설한에 몇 명이나 그를 뒤따를지 회의적이다. 그는 새로운 정당을 구상하면서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벤치마킹하겠다는 제3의 길은 공교롭게도 손학규가 말하는 제3의 길과 같지만, 서로 생각하는 길의 내용은 다르다.

정상호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는 손 대표의 대선 패배 분석부터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그는 “부드러운 진보는 다시 실용으로 가겠다는 것”이라며 “참여정부가 실용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진보를 표방했기 때문에 진 게 아니라, 진보의 내용과 콘텐츠가 일관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일자리 등 핵심적 의제 설정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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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재 정치컨설턴트(변호사)의 진단도 비슷하다. “손학규가 이명박과 다른 게 뭐냐”라고 말하는 그의 분석은 정당의 차별성에 초점을 맞췄다. “정당의 존재 이유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플랫폼’(정강정책)을 국민들에게 호소해 선택받는 것”이라며 “다른 정당과 분명한 차별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면 정당이 존재할 이유 또한 없다”고 말했다. 친노 의원으로 꼽히는 김형주 의원도 “총선에서 지고 나면 한나라당과 어느 정도 대립각을 통해 다시 힘을 모을 수 있을 텐데, 이제 노선도 잃고 대안적 세력으로서 정체성도 잃었다”고 말했다.

좌표, 즉 당의 정체성 설정은 분명 논란거리다. 언뜻 보면 손학규를 대표로 뽑았기 때문에 당의 신진보 노선도 추인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안 부재론 속에서 손학규가 당대표가 된 것과 정체성 재설정은 다른 문제다. 정상호 연구교수는 “손학규란 인물이 대표가 된 게 문제가 아니라, 그가 대표가 된 뒤 하는 얘기가 문제”라고 말했다.

규제 완화 추진에 한나라당 “환영”

총선을 앞두고 당내 분란을 자제하는 동력이 크게 작용하겠지만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이 불거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손학규가 제시하는 신진보의 각론은 갈등을 부추길 수도 있다. 그는 한나라당 인수위보다 부동산 거래세 인하와 양도소득세 완화를 서둘러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한나라당은 환영했다. 또 규제 완화와 경제 활성화 조치에 대해서는 이명박 정부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협력적인 측면만 부각한다면 불공평할 것이다. 그가 “신당은 우리 정당사에서 가장 협력적인 야당, 동시에 가장 단호한 야당이 될 것”이라고 얘기한 것처럼, 각론에서 ‘단호한 야당’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경부운하, 사교육비 증가시키는 이명박식 교육정책, 재벌 위주로 가는 정책을 견제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과거 한나라당 경력과, 신보수와 맥이 닿아 있는 신진보의 정체성 등으로 ‘협력’의 이미지를 도드라지게 하고 있다. 이런 좌표 설정을 통해 한나라당을 지지하지 않는 절반의 국민을 끌어올 수 있을까?

신당은 손학규를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올렸다. 마치 무난한 ‘합의점’처럼 보였다. 총선 전 정체성을 둘러싼 당내 투쟁을 건너뛸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2004년 탄핵 역풍에 침몰할 뻔한 한나라당을 살린 박근혜가 될 수도 있다. 박근혜는 한나라당 당사를 천막으로 옮기는 등 국민 앞에 한없이 낮췄고, 총선 공천을 통해 인물을 대폭 물갈이했다. 하지만 손학규에겐 아직 그런 힘(공천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처참한 패배가 예상되는 신당의 총선 결과를 크게 희망적으로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는 이는 찾기 힘들다. 총선에서 패배한다면 정체성 논쟁은 더 거칠고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다.

총선 패배하면 정체성 논쟁 거칠 듯

김윤재 정치컨설턴트는 △노무현과 관계없는 인물 △무능한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둔 인물 △수도권 지역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 △진보 이미지가 아닌 인물 등 당대표가 될 네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건 손학규밖에 없었다고 분석한다. 크게 이견이 없는 분석이다. 총선을 앞두고 신당이 어떤 대표를 필요로 했는지는 대선 패배 원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당의 정체성과 관련해, 대선 패배를 분석하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노무현 정부가 좌충우돌 일관성 없이 정책을 추진하면서 진보개혁 세력을 분열시키고 지지 기반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 분석이 맞다면 손학규식 실험이자, 신진보로의 좌표 설정은 오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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