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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에 눈감고 입닫은 국회

등록 2006-12-13 15:00 수정 2020-05-02 19:24

여야 정쟁에 휘말려 예산 문제에 부딪혀 계류 중인 관련 법안이 17개…산재한 장애인 문제를 총괄 처리하는 기관이나 제도적 장치 고민해야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오직 할 수 있는 것이 안마뿐인 시각장애인에게, 안마는 직업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 그 자체입니다.”

“국회의원 다시 하고 싶지 않다”

5월25일, 헌법재판소에서 시각장애인만 안마사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보건복지부령 안마사에 관한 규칙 제3조가 위헌 판결이 나자 수백 명의 안마사들은 마포대교에서 위험한 고공시위를 했다. 안마밖에 할 게 없는 시각장애인들에게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생존을 위협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들의 절박한 분노를 어루만지기 위해 휠체어 하나가 바쁘게 움직였다. 장향숙 열린우리당 의원이다.

장 의원은 비지땀을 닦아가며 마포대교 장애인 농성장에 찾아가 장애인들을 다독이고, 다시 국회로 돌아오면 각 의원실을 방문해 안마사 자격증 취득을 시각장애인으로 제한하는 ‘의료법 개정’을 추진하자고 의원들을 설득했다. 휘어진 척추가 심장을 압박해 숨을 쉬는 것도 힘겨웠지만 쉴 틈이 없었다. 결국 장 의원과 시각장애인인 정화원 한나라당 의원의 노력으로 의료법 개정안은 다른 법률안과는 달리 초고속으로 통과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시각장애인 안마사 문제는 동정 여론에 힘입어 해결됐지만, 그 밖의 장애인 문제는 여전히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장향숙 의원은 요즘 ‘장애인 차별 금지 및 권리 구제 등에 관한 법률안’(이하 장차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당대표,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를 만나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동료의원들의 협조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17대 국회에서 통과된 장애인 관련 법안은 4개에 불과하다. ‘장애인’이란 단어가 들어간 법률안은 모두 19개가 계류 중(표 참조)이고 통과된 법안은 4개에 불과하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비례대표 몫으로 장애인인 두 의원을 공천할 때만 해도 장애인들은 기대가 컸다.

장향숙 의원은 “국회의원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다”며 “개인적으로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심경을 밝혔다. 지난 3년간 ‘휠체어 의정 활동’이 녹록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장애인을 위한 입법 활동이 쉽지 않은 이유는 뭘까? 무엇이 장 의원을 행복하지 않게 만든 것일까?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은 의원들의 ‘무관심’을 이유로 꼽았다. 나 의원은 “장애인 문제에 큰 관심이 없고 그들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며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약자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다들 ‘정치’에만 몰두한다는 것이다. 장향숙 의원도 “다들 장애인을 위해야지 말은 하면서도 정작 장애인 문제에 직면하면 한마디도 안 한다”고 했다.

예산 문제도 장애인을 위한 입법을 좌절케 하는 주요 원인이다. 예를 들어 65살 이상 노인 또는 64살 이하의 치매·중풍 등 ‘노인성 질병’을 가진 사람에게 수발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인수발보험법’에 장애인도 서비스 대상으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장 의원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노인수발보험법 서비스 대상에 장애인을 넣을 경우 추가 예산은 1년에 200억원에서 많게는 300억원 정도로 늘어난다. 정부는 물론 의원들도 장애인을 위한 법안들은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국회 통과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장애인 의원의 역할은 ‘스마일맨’?

국회에 장애인특별위원회를 두자는 요구도 국회의 예산상 문제와 의원들의 무관심 때문에 묵살되고 있다.

장애에 대한 무관심은 장애를 가진 의원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으로도 이어진다. 정화원 의원은 “국회의원들한테 보이지 않는, 미묘한 차별이 있다”며 “우리가 (능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향숙 의원의 백기승 보좌관은 “처음 국회에서는 동료 의원이나 당에서 (장향숙 의원을)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백 보좌관은 “장애인 의원은 당에서 좋은 일만 하면서 당 이미지나 높여주고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 ‘스마일맨’이 돼주기만을 바라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물론 모든 의원들이 장애인 문제에 관심이 없고 비협조적인 것은 아니다. 몇몇 의원들은 장애인을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다.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은 장애아를 위한 의원 연구단체인 ‘위캔’(WE CAN)을 2004년 7월에 발족해 매달 장애체험 행사, 전문가 초청 토론회 등 장애아 관련 행사를 벌여왔다. ‘위캔’에는 여야 의원 40명이 가입했지만 정작 토론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은 한두 명뿐이다. 이계안 열린우리당 의원도 장애인 문제에 애정이 많은 의원 중 한 명이다. 이 의원은 국정감사를 할 때마다 은행, 기업, 재정경제부 등 피감기관이 장애인 의무 고용 비율을 준수하는지 여부를 엄격하게 감사하고, 이들 기관과 수시 회의를 통해 장애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갖도록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이렇게 소수 의원들이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국회에서 장애인을 위한 입법이 쉽지 않은 것은 구조적인 요인이 크다. 17대 국회는 거대담론을 둘러싼 여야 정쟁에 휩싸여 민생 법안들을 게을리했다. 장향숙 의원은 “국방개혁법, 국민연금법, 사학법안과 같은 쟁점 법안에 대해 여야가 권력 투쟁을 하거나, 부동산·세금과 같은 실체적인 화두가 제시되는 시기에 특히 장애인 문제가 소홀히 다뤄진다”고 말했다. 이계안 의원은 “국회가 파행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결국 장애인과 같은 소수 약자들에게 피해를 줬다”고 설명했다.

장애인 문제를 총괄하는 기관이나 제도적 장치가 없는 것도 장애인 문제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예를 들어 장애인 문제는 여러 행정 부처에 걸쳐 있다. 장애인 고용촉진법은 노동부에, 장애아 특수학교는 교육부, 장애인 편의시설은 건설교통부로 분산돼 있다. 결국 업무가 여러 부처에 걸쳐 있다 보니 해야 할 일을 상대 부처에 떠넘기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백기승 보좌관은 “산재해 있는 장애인 문제를 종합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대통령 직속기관이나 업무를 일괄 처리할 수 있는 ‘원스톱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선거 때만 찾지 말길…

다운증후군을 앓는 아이를 둔 나경원 의원은 “장애아를 가진 부모들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가장 듣기 싫다”며 “이런 안타까운 말이 나오지 않고,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장애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는 선거 때만 장애인 의원을 찾고 장애인을 위하는 따뜻한 정당이 되겠다고 말하지 말고, 계류된 법률안을 꼼꼼히 따져보고 필요한 경우엔 제때에 처리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그들도 좀더 나이가 들면 장애인이 된다. 소모적인 정쟁의 피해자는 국민이고, 더 큰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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