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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루크’ 이상호의 힘!

등록 2005-01-25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양말장수에서 국민참여연대의 ‘배후’로… 여권에 강력한 영향력 행사하는 그의 비밀은 무엇인가 </font>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다들 뭘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국참연대는 사실 ‘미키루크’로부터 시작됐다.”

정치권 안팎에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국민의 힘’ 등 ‘장외 친노 세력들’이 주축이 돼 지난 1월16일 출범한 국민참여연대(의장 명계남·이하 국참연대)의 배후와 목적에 대한 관심과 억측이 날로 증폭되고 있지만, 국참연대 관계자들은 이렇게 입을 모은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장외 친노 세력과 정 장관의 제휴’ ‘노무현 대통령의 당 장악 시나리오’ 등 ‘설’이 무성하지만 사실은 ‘미키루크’ 이상호씨로부터 모든 게 나왔다는 것이다.

노사모를 주도한 바로 그 사람

실제 국참연대는 지난해 10월21일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판결 직후 이씨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국민의 힘’ 공동대표를 지낸 그는 장외 친노 인사들을 상대로 “탄핵 역풍에 숨죽였던 헌법재판소가 여권에 여론이 불리하게 작용한 행정수도 문제로 반격을 가한 것”이라며 “국민과 호흡하고 소통하지 못하면 참여정부도 열린우리당도 모두 실패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대안은 “국민의 자발적 참여로 승리한 2002년 12월19일 대선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당원들이 열린우리당을 접수하고 바꾸는 운동”이었다. 이씨의 문제 제기에 따라 ‘국민의 힘’ 초대 대표인 정청래 의원, ‘노사모’ 회장 출신인 명계남씨 등 핵심 인사 8명이 본격적인 논의를 벌였다. 그리고 11월22일 인터넷을 통해 “세 불리기에만 혈안이 돼 있는 사이비 개혁주의자들에게 당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면서 ‘당원들에 의한 당 장악’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이후 이씨가 조직사업을, 정청래 의원은 원내 창구를 담당하는 방식의 동조자를 규합했고, 50여일 만에 현역 의원 30여명, 핵심 회원 2천여명, 전국 243개 국회의원 선거구별 조직책까지 갖춘 정치적 실체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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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배지나 유력 정치인 중심의 정치 담론에 익숙한 일반 국민들에게는 그의 이름조차도 생소할 수 있다. 하지만 여권과 ‘장외 친노 세력들’ 사이에서 그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조직과 홍보의 달인” “무작정 밀어붙이는 ‘미친루크’”라는 호평과 악평이 공존하고, ‘미키루크는 또 하나의 권력’이라는 얘기까지 나돌 정도다.

미키루크는 어떤 인물이기에 그의 언행이 여권의 역학 구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로 위상을 굳힌 것일까.

올해 39살인 이씨는 부산 출신이다. 최종 학력은 고졸. 부산동고 졸업장이 정규 교육 증명서의 끝이다. 정치권과 지속적으로 끈이 닿던 인물도 아니다. 고등학교 졸업 뒤 10년 가까이 부산백화점 상품판매·구매 당담자로 근무했다. 이후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으로 만든 양말을 백화점 등에 유통시키는 양말장사로 변신해 꽤 많은 돈을 번 그는 불법 주차 차량을 견인하는 주차단속 요원과 심하게 몸싸움을 벌여 ‘특수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을 정도로 ‘제 잘난 맛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양말 유통업으로 대박을 터뜨려 연간 수십억원의 돈을 벌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어깨에 쓸데없이 힘만 주고 살던 시절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무명의 양말장사였던 이씨의 변신은 노사모의 성공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온라인 쇼핑몰로 양말 판매처를 넓히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던 그는 2001년 우연히 노사모 홈페이지에 접속했고, 자생적인 열혈 노사모가 됐다. 이후 친척, 회사 직원 등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회원가입 운동을 전개했고, 자신이 설득한 사람들이 실제 가입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상호, 나 가입했다”는 글을 홈페이지에 올리도록 했다. 그런데 그의 ‘화려한 회원 확장 실적’에 탄복한 노사모 회원들이 그를 찾아내 오프라인 팀장직을 맡겼다.

오프라인팀장이 된 그는 2002년 대통령 선거에 대비해 20대 젊은 층의 가입 확대, 서포터스 조직 등 오프라인 조직 강화 방안을 놓고 논란과 토론을 거듭하던 부산 노사모에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면서 주도적 인물로 떠올랐다.

2000년 6월 ‘노무현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느슨한 연대’를 지향하면서 출범한 노사모 안에서 그는 백화점 직원과 양말장사로 터득한 상품 판매와 고객관리 기법을 동원해 오프라인 회원을 급속히 확대했고, 취약 지역에서 노사모 조직을 건설하는 등 두각을 나타낸 것이다.

‘희망돼지’와 ‘노란손수건’아이디어를 내다

당시 그가 선보인 기법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 ‘인간사슬형’ 조직관리 기법이다. 자신이 운영하는 양말유통 회사의 직원을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이들의 학창 시절 동아리, 친구·선후배를 소개받아 직접 공략한 것이다. 둘째, 회원가입 권유를 넘어 적절한 역할을 부여해 끊임없이 오프라인 공간으로 끌어냈다. 실제 2001년 9월 부산국제신문 강당에 자신이 확보한 180명의 회원을 모아놓고, 이들을 부산지역 17개 지역 조직책으로 선정했다. 셋째, ‘재미있는 정치판’ 개념을 도입했다. 정치 참여를 기피하는 사람들을 끌어내기 위해 ‘정치야 놀자’라는 대중 프로그램을 만들고, ‘노사모 밴드’를 결성해 정기 공연을 벌이는 등 정치 참여를 연성화한 것이다. 그의 이런 시도는 노사모 안에서 ‘미키루크의 조직운영 원리’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고, 핵심 회원들을 상대로 회원가입 설득 방법, 전화홍보 기법 등을 교육하는 역할까지 떠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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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민주당이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국민경선제도를 도입하자 그는 노사모 국민경선대책위원장에 발탁됐고, 여기서도 수완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경선 출마 후보들이 조직력을 총동원해 유권자를 상대로 국민경선참여신청서를 받을 때 그는 한 발짝 더 나갔다. 신청서 작성과 별도로 신청자의 신상정보는 물론 추천자의 정보까지 데이터베이스화해 자신들이 확보한 신청자 가운데 선거인단에 선정된 사람은 대부분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경선 현장까지 ‘모셔’간 것이다. 다른 후보들도 경쟁적으로 신청서를 받았지만 관리에 실패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씨는 노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뒤에도 독특한 홍보전술을 선보이며 친노 세력 내부에서 입지와 발언권을 넓혔다. 트럭을 몰고 다니며 ‘100만명에게 1만원씩 거둬 대선을 치른다’는 100만 서포터스 운동의 핵심인 ‘희망돼지 분양사업’을 주도했고, 노무현 후보의 상징인 ‘노란 손수건 착용’도 직접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이런 홍보전술에 대해 당시 민주당은 물론 친노 세력의 핵심축이었던 개혁당 그룹에서조차 그 실효성과 한가함에 의문을 제기했다. 또 선관위가 노사모를 ‘사조직’으로 규정해 사이트 폐쇄를 명령하고, 희망돼지 분양사업이 선거법 위반 시비에 휘말리는 등 역풍도 맞았다. 그러나 이씨는 노사모 회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참여에 의한 정치개혁 운동을 방해하지 말라”며 전면적인 저항운동을 펼쳤다.

이씨는 “10년 이상 백화점 근무와 양말장사를 통해 어떻게 고객과 상품을 관리해야 하는지, 또 어떤 이벤트가 그들의 관심을 촉발하고 상품판매 실적으로 연결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터득했다”면서 “그런 노하우를 노사모와 국민경선, 조직운영 및 관리에 적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노 대통령의 당선 뒤에는 노사모와 사실상 결별한다. 명계남 의장, 이기명 전 노무현 대통령 후원회장, 정청래 의원 등과 함께 ‘노사모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생활정치 현장에 뛰어들어 참여정부의 성공을 지원하자’면서 2003년 4월 ‘생활정치 네트워크 국민의 힘’을 결성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원내 진입을 통한 정치세력화를 지향하는 유시민 의원 등 개혁당 그룹과도 갈라섰고, 이는 국참연대가 ‘사이비 개혁주의자와의 차별화’를 선언한 감정의 뿌리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는 이후 주요 정치 논쟁에서 항상 전면에 등장했다. 2003년 7월 “선거자금 모금과 자원봉사 등을 통한 적극적인 국회의원 당선운동”을 선언하며 ‘국회의원 바로알기 운동’을 벌였다. 9월에는 조선일보 폐간 등을 외치며 시위에 나서는 등 안티조선 운동에 뛰어들었다.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으로부터 “4·15 총선을 겨냥한 친노세력들의 불법 선거운동’이라는 의혹과 공격을 받았지만, 친노 세력들 안에서는 그의 발언권이 더 강화됐다. 그는 2004년 3월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발의되자, ‘국민의 힘’ 회원 30여명과 함께 국회 앞에서 첫 ‘촛불시위’를 조직했고, ‘국민을 협박하지 말라’는 인터넷 카페를 개설해 국회의원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위한 온라인 서명에 돌입하는 등 저항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개혁연대’제안엔 “교란용”불쾌감

그러나 ‘생활정치’를 주창하던 그가 최근 국참연대를 결성해 집행위원장을 맡고 당 청년위원장직 출마를 공식화하자 의심의 눈초리가 쏠린다. “정동영 장관 옹립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현실정치에 발을 담그려는 게 아니냐”는 게 의혹의 핵심이다. 이상호씨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대선 때 국민참여운동본부장이었던 정동영 장관과 함께 활동하면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참연대는 노 대통령이 말한 실사구시, 실용적 개혁주의 노선이 옳으니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한번 산산이 부서져보자는 것”이라면서 “참여정부의 성공과 수구기득권 세력의 대변자인 한나라당을 이길 수 있는 후보라면 누구든 지원하고 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개혁당 그룹 김두관 전 장관의 ‘개혁연대’ 제안에 대해 “우리에게 연락도 없이 언론을 상대로 떠벌이는 그런 방식은 우리하고 맞지 않고 개혁당쪽과 감정의 골도 깊다”면서 “우리 내부에 대한 교란용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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