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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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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스퀘어] 로봇과 나, 하나 둘 하나 둘

장애인·공학자가 함께 참가하는 사이배슬론 국제대회
등록 2020-11-21 14:59 수정 2020-11-23 01:16
김병욱 파일럿이 11월13일 대전 카이스트 본원 스포츠컴플렉스에서 열린 ‘사이배슬론 2020’에 출전해 워크온 슈트를 착용한 채 경사로를 통과하고 있다.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김씨는 장애인과 공학자가 팀을 이뤄 미션 수행 실력을 겨루는 이 대회에서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공경철 교수팀으로 참가해 금메달을 차지했다. 20개국 53개 팀이 참가한 이 대회는 코로나19 탓에 각 나라에서 경기를 진행했고, 생중계를 통해 성과와 순위를 판정했다.

김병욱 파일럿이 11월13일 대전 카이스트 본원 스포츠컴플렉스에서 열린 ‘사이배슬론 2020’에 출전해 워크온 슈트를 착용한 채 경사로를 통과하고 있다.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김씨는 장애인과 공학자가 팀을 이뤄 미션 수행 실력을 겨루는 이 대회에서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공경철 교수팀으로 참가해 금메달을 차지했다. 20개국 53개 팀이 참가한 이 대회는 코로나19 탓에 각 나라에서 경기를 진행했고, 생중계를 통해 성과와 순위를 판정했다.

2020년 11월13일 오후 대전 카이스트 본원 스포츠컴플렉스. “삐, 삐, 삐, 삐-.” 경기 시작을 알리는 기계음과 함께 김병욱 파일럿의 오른발이 출발선을 통과했다. 매끈한 흰색 로봇이 그의 하반신을 감싸고 있었다. 파일럿은 자신이 착용한 로봇을 조종해 여섯 개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첫째 미션은 ‘앉았다 일어서서 책상의 컵 정리하기’였다. “앉기. 앉기 선택. 시작.” 파일럿이 크러치(목발처럼 몸을 지탱하는 도구)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로봇이 행동을 안내했다. 파일럿과 로봇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때를 대비해, 공학자와 물리치료사가 앞과 옆에서 함께 걸었다.

이주현 파일럿이 미션 수행을 마치고 결승선을 통과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이씨를 끌어안고 있다.

이주현 파일럿이 미션 수행을 마치고 결승선을 통과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이씨를 끌어안고 있다.

최적의 로봇 리듬을 따라

“갑시다!” 김병욱 파일럿이 둘째 미션인 ‘지그재그 걷기’를 앞두고 외쳤다. 장애물 사이 좁은 길을 통과할 때는 “하나 둘, 하나 둘” 박자에 맞춰 크러치와 로봇발을 번갈아 내디뎠다. 1년6개월 동안 훈련해서 얻은 최적의 ‘로봇 리듬’이었다. 심판은 미션 성공을 알리는 초록 깃발을 들어올렸다.

다섯째 미션인 측면 경사로. 전날 리허설 때 여기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던 김병욱 파일럿은 또다시 “하나 둘, 하나 둘” 구호를 외치며 로봇과 자기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인 채 빠르게 걸어갔다. 비탈길을 내려오는 마지막 미션까지 실수 없이 마치자,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기록은 3분47초, 미션 점수는 100점 만점. 장애인과 공학자가 팀을 이뤄 미션 수행 실력을 겨루는 사이배슬론(Cybathlon·인조인간을 뜻하는 사이보그(Cyborg)와 경기를 뜻하는 라틴어 애슬론(Athlon)의 합성어) 국제대회 ‘강화 외골격 로봇 경기’ 종목 최고 기록이었다.

1998년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김병욱씨는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공경철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의 일원으로 사이배슬론 대회를 준비해왔다. 2016년 제1회 대회에 함께 참가해 동메달을 딴 이들은 “대한민국 로봇이 세계 최고임을 보여주기 위해” 2020년 제2회 대회 출전을 결심했다. 공 교수는 기계공학, 재활공학, 재활의학, 디자인 분야의 여러 기관을 모아 팀을 꾸렸다. 파일럿 후보 7명을 선발해 웨어러블로봇 개발회사인 엔젤로보틱스, 세브란스재활병원, 재활공학연구소, 국립교통재활병원에서 각각 훈련했다. 2020년 2월25일 카이스트에서 열린 선수 선발전에서 김병욱·이주현씨가 팀 공식 파일럿으로 뽑혔다.

이주현 파일럿은 2019년 처음 로봇을 보았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2019년 1월 사고를 당한 뒤, 세브란스재활병원에서 치료하던 그에게 연세대 의과대학 나동욱 교수가 대회 출전을 제안했다. 2020년 3월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이씨는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온라인 수업과 오프라인 훈련을 병행 했다.

경기용 로봇에는 ‘완성’이란 개념이 없다. 시험, 수정, 재시험, 재수정의 연속이다. 김병욱 파일럿이 시제품을 먼저 입고 시험한 뒤 그의 의견을 받아 공학자들이 로봇을 수정했다. 기계장치를 고치고 보행 알고리즘을 수정하느라 훈련 일정이 늦춰지기 일쑤였다. 이주현 파일럿은 2019년 11월 하순에야 자신이 착용할 로봇을 받았다. 이후 몸에 로봇을 꼭 맞추기 위해 하드웨어와 알고리즘을 조정하는 데도 몇 달이 걸렸다.

사이배슬론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종목에 참가한 선수가 스위스 취리히에서 뇌파로 아바타(가상현실에서 자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캐릭터)를 조종해 컴퓨터게임을 하고 있다.

사이배슬론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종목에 참가한 선수가 스위스 취리히에서 뇌파로 아바타(가상현실에서 자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캐릭터)를 조종해 컴퓨터게임을 하고 있다.

“이제는 몸의 일부처럼 느껴져요”

이주현 파일럿은 무겁고 불안했던 자신의 로봇 ‘그린이’가 “이제는 몸의 일부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가 직접 고른 그린이의 짙은 초록색은 이화여대의 상징색이다. 그는 그린이를 타고 능숙하게 미션을 수행하기까지 선배 파일럿 김병욱씨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로봇을 입고 서는 법, 리듬을 타며 걷는 법 등 모든 노하우를 전수해준 김씨는 이씨를 자신의 ‘복사판’이라고 했다. 그린이를 몸의 일부로 느끼고 선배에게서 “이제는 더 가르쳐줄 게 없어”라는 말을 듣고 나니 대회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김병욱 파일럿이 최고 기록으로 경기를 끝낸 다음 이주현 파일럿이 마지막 3차를 시도했다. 1년 넘게 이주현씨를 돌본 물리치료사 전선씨가 왼쪽 뒤에서 함께 걸었다. 평소 그가 어려워하던 계단 오르기 미션을 시작하자 경기장 옆에 서 있던 팀원들이 “배 내밀어, 배” 하고 외쳤다. 비탈길을 올라 문을 여닫는 마지막 미션을 할 때쯤 경기 기록 시계는 4분42초를 지나고 있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비탈길을 올라 문을 열기 직전, 마지막 왼발 걸음을 앞두고 이주현 파일럿과 로봇이 멈췄다. 왼쪽 다리가 접힌 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손으로 간신히 난간을 붙잡은 상태에서 8초가 흘렀다. 결승점 부근에 앉아서 지켜보던 김병욱 파일럿이 소리쳤다. “오른쪽 크러치를 뒤로! 뒤로! 밀어! 밀어!” 오른쪽 크러치를 뒤로 멀리 짚자 이주현 파일럿이 힘을 주고 발을 뻗어 균형을 되찾았다. “그렇지, 장하다!” 박수가 터졌다. 문을 닫고 비탈길을 내려오니 5분51초였다.

경기 다음날인 11월14일 밤 11시, 스위스의 사이배슬론 조직위원회에서 모든 팀의 경기 결과를 집계해 순위를 발표했다. 김병욱 파일럿은 금메달, 이주현 파일럿은 동메달을 받았다. 김병욱 파일럿은 “밤에 고장 나면 아침에 탈 수 있게 밤새워 연구한” 사람들에게 공을 돌렸다. 이주현 파일럿은 4년 뒤 대회에 또 참가하고 싶다고 했다. 참가자 모두 사이배슬론을 통해 조금씩 다른 걸음을 걷게 되었다.

이주현 파일럿이 워크온슈트를 착용한 채 장애물을 통과하고 있다.

이주현 파일럿이 워크온슈트를 착용한 채 장애물을 통과하고 있다.

‘강화 의족’ 종목에 참가한 스위스 선수가 짐을 든 채 계단을 통과하고 있다.

‘강화 의족’ 종목에 참가한 스위스 선수가 짐을 든 채 계단을 통과하고 있다.

‘강화 의수’ 종목에 참가한 스위스 선수가 의수를 이용해 컵쌓기 미션을 하고 있다.

‘강화 의수’ 종목에 참가한 스위스 선수가 의수를 이용해 컵쌓기 미션을 하고 있다.

사이배슬론 전동휠체어 종목에 참가한 스위스 파일럿이 경사로 미션을 통과하고 있다.

사이배슬론 전동휠체어 종목에 참가한 스위스 파일럿이 경사로 미션을 통과하고 있다.

대전=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ETH) 사이배슬론 제공

글 강미량·신희선(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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