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내가 누구인지 나도 알지 못합니다. 숫자 464(진도군청이 부여한 세월호 희생자 유품·유류품 관리번호)와 그 숫자가 파생한 숫자들로 나는 추정될 뿐입니다. 희생자 304명(사망자 295명·실종자 9명) 중 한 명일 나는 464번으로 명명된 검정색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그날’(2014년 4월15일) 저녁 늙은 배에 올랐습니다.
수학여행 전날 나는 ‘아메리칸투어리스터’ 캐리어 안에 9개 혹은 그 이상의 물건을 가지런히 정돈했습니다.① 아끼던 갈색 ‘게스’ 반팔 티셔츠(462-1)부터 개어 넣었습니다.② 갈아입을 청바지(상표 PLAC Jeans·허리둘레 29인치)도 한 벌(464-2) 담았습니다.⑦ 목이 긴 남성용 흰 양말 2켤레(464-3)를 접어 구석에 놓았고,⑥ 세면도구들(샴푸 샘플 2개·휴대용 치약 1개·칫솔 1개)은 비닐 지퍼백(464-4)에 모았습니다.③ 며칠 면도하지 않으면 턱에서 듬성한 수염이 돋는 탓에 1회용 면도기도 쌌습니다. 여드름이 많은 나이였습니다. 피부 걱정에 1회용 화장품 8개(464-5)와 미스트 1개(464-6)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여행용 티슈(464-7)는 하나만 가져갔습니다. 멀고 거친 바닷길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붙이는 멀미약(464-8)을 사서 귀밑에 붙인 뒤 남은 약을 챙겼습니다.④ 엄마 친구의 아들(혹은 딸)이거나 나의 사촌조카일지 모를 ‘김도윤의 첫돌기념(2012. 11. 17)’ 수건을 한 장 넣었습니다.⑤
②
③, ④, ⑤, ⑥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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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리지 않는 464번 캐리어를 힘으로 열었을 때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한숨이 세월호 유족들의 가슴을 뚫고 나왔다. 캐리어에서 유품이 마른 흙과 비벼져 쏟아질 때마다 ‘그날’ 배에서 옮겨온 공포와 물속에서 따라온 참혹들이 시각 신호로 바뀌어 펼쳐졌다. 인양 당일 군청 직원들이 물로 씻어내 말렸으나 소금기와 펄은 그대로 남아 참사의 흔적을 간직했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유류품을 전수조사하고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이 지난 1월5일 진도군청(전남 진도군 진도읍) 지하 강당에서 이뤄졌다.⑫⑭⑮ 참사 이튿날부터 수색 중단이 선언된 날(2014년 11월11일)까지 잠수사들과 해경 등이 선체 내부와 사고 인근 해역에서 건져올린 물품들이었다. 가족이 찾아가지 못한 유류품들은 진도군청 뒤편 컨테이너 두 동에 보관돼 있었다.⑬ 진도군은 세월호 가족들이 팽목항에서 아들·딸과 형·동생의 귀환을 기다리며 묵던 숙소를 옮겨 보관소로 썼다.
진도군이 정리해 번호를 붙인 유류품 1162묶음은 낱개로 2천여 점에 달했다. 누구의 것인지 확인되지 않는 유류품들을 희생자 가족들이 사진으로 식별할 수 있도록 전문가들이 재촬영했다. 사진가 한 명마다 자원봉사자 한 명이 촬영을 도왔다. 캐리어·가방이 열릴 때마다 부모들은 눈에 익은 유품이 나오길 애타게 기다렸다.
현금 4만원,⑨ 마스크팩 3개, 손거울 1개, 샤워타월 1개, 머리끈, 교복 치마, 교복 와이셔츠, 교복 조끼⑪…. 232번 가방에선 동그란 안경이 같이 나왔다.⑩ 한 어머니가 휴대전화에 저장된 단원고 학생들의 사진을 일일이 살폈다. 비슷한 안경을 쓴 여학생을 찾아 부모에게 맞는지 물었다(불일치). 바닷물을 증발시키지 못하고 흡수한 종이 뭉치에선 깨알만 한 이름이 보였다. 건드리면 해체돼버릴 종이를 숨죽여 살피던 한 아버지가 동명의 아들을 둔 아버지에게 전화해 확인했다(불일치). 체형이나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작은 단서라도 보이면 현장에 있던 부모들은 현장에 오지 못한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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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우리 아이들의 살점입니다.”
2학년5반 오준영(4월23일 발견)군의 아버지 오홍진씨는 아들의 어떤 물건도 찾지 못했다. 준영군은 트레이닝복 바지와 하얀색 티셔츠만 입고 올라왔다. 배의 복도에 누워 사진을 찍을 때(4월16일 아침 9시께)까지 착용하고 있던 안경과 슬리퍼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준영군의 휴대전화를 해지하지 않았다. 아들의 번호를 포기할 수 없는 아버지는 전화요금을 계속 납부하고 있다. 보험도 해약하지 않았고 사망신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촬영장 곳곳을 돌며 아들의 물건이 있는지 보고 또 봤다. 그에게 찾지 못한 아들의 유품은 그 자체로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나의 일상과 취향을 담은 캐리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건져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배에서 끝까지 나의 곁을 지켰는지, 나와 헤어져 먼 바다까지 떠내려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진도군청이 세월호 희생자의 464번째 유류품으로 접수(2014년 6월25일)했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파랗게 부식된 캐리어 지퍼는 펜치로 끊어야 열렸고, 펄과 소금기로 범벅된 몸통은 가위로 잘라내야 안을 드러냈습니다. 티셔츠·청바지·양말엔 파도가 새긴 얼룩이 선명했습니다. 멀미약 상자와 티슈는 묽은 죽처럼 뭉개졌습니다. 오직 나로서 온전했던 나는 ‘464들’과 더불어 흩어지고 조각났습니다.⑧ 주인이 확인되지 않는 세월호희생자들의 캐리어들이 진도군청 지하 강당 복도에서 촬영팀의 촬영을 기다리고 있다. 깨진 상처와 펄의 흔적을 가진 채 줄지어 선 캐리어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에 따라 구조를 기다리던 희생자들의 모습과 닮았다.
⑨, ⑩, 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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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에 쓸려간 유품의 양은 미지의 영역에 속했다. 진도대교(군내면 녹진리) 밑 해안가, 나리방조제(군내면 나리) 해안가, 관매도해수욕장(조도면 관매도리) 인근, 서거차도(조도면 서거차도리) 북방 4마일에서 건져지거나, 우이도(신안군 도초면) 서방 3마일과 매물도(경남 통영시 한산면) 남방 4마일 해상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대마도 서남쪽 끝에서 찾은 가방(610)도 있었다.
수학여행의 설렘이 바다를 떠돌다 육지에 닿자 유품이 됐다. 둘러앉아 흥을 돋우었을 기타 줄은 녹이 슬어 끊어졌고, 배가 빵빵한 과자봉지는 뜯기지도 않고 파도를 견뎠다. 짝을 잃고 홀로 돌아온 운동화와 슬리퍼들이 짝 잃은 운동화·슬리퍼들과 섞여 ‘슬픈 무더기’를 이뤘다. 고대 미라의 옷처럼 갈가리 찢긴 티셔츠도 있었다. 플라스틱 도시락의 남은 밥에선 발효한 곡식이 뿜는 악취가 짙었다. 2014년 4월15일부터 2016년 1월5일까지 바다와 육지에서 길고 고된 시간을 견뎌온 참담한 밥알들이었다.
이준석 선장이 배에 두고 내린 가방은 세월호 5층 우현(6월11일)에 있었다. 약병 1개와 효자손 1개, 반바지 1벌과 물에 젖어 찌그러진 급여통장이 나왔다. 2014년 4월10일 청해진해운이 입금한 그의 마지막 월급(3월치)은 370만1700원이었다.
돌아왔으나 돌아갈 곳 없는 물건들은 애달팠다. 재촬영 뒤에도 ‘발견’되지 못하는 유품들은 4·16가족협의회 기억저장소가 인수해 경기도 안산 합동분향소에 임시 보관한다. ‘세월호기록물보관소’가 만들어지면 보관소 서고 안에 영구 보존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기억은 국가 기록으로 격리되지 않고 언제든 가족·시민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망국의 국민인가.” 김종천 기억저장소 사무국장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유가족과 시민이 하고 있다”고 했다. 중앙정부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유품을 보존할 예산과 인력 지원에 무관심하다.
2학년7반 정동수군은 5월6일 발견됐다. 아버지 정성욱씨는 아들의 가방에서 찾은 옷 한 벌과 점퍼 하나를 태우지 못하고 빈방에 뒀다. 아들의 방문은 항상 열려 있다. 엄마가 손빨래만 8차례 했으나 빠지지 않은 펄 냄새가 집 안을 떠돈다. 그 진창의 냄새가 동수군의 마지막 냄새다. “그 냄새라도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버지는 소원했다.
420번 검정색 아디다스 가방은 6월13일 세월호 4층 선수 좌현에서 찾았다. 가방 안에서 주인을 알 수 없는 손목시계가 나왔다. 유리는 깨어졌고 부품은 산화했다. 시계의 날짜는 4월17일을 가리켰다. 시침은 오후 4시, 분침은 39분에, 멈춰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 순간에, 멈춰 있다. 쉼없이 진행된 촬영이 7시간 만에 끝났다. 신원이 확인된 유품은 한 조각도 없었다.
⑫
⑬
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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