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가 끝나 딱히 일이 없는 농한기이지만 이른 아침부터 임실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마을 노인 서넛이 모여든다. 초겨울 이른 아침의 푸르스름한 한기가 세 평 남짓한 대기실로 밀려 들어오는 노란 햇살에 부딪힌다. 저마다 주고받는 이야기에 묻어 나오는 하얀 입김까지 섞이면 실내는 금방 훈훈해진다.
“이젠 좀 한가한게 병원 가야지.” 마을 할머니들이 버스를 타고 군 소재지에 나가는 목적은 치료가 대부분이다. “에구, 난 허리를 꿈쩍도 못하것어.” “난 무르팍이 아파 펴지도 못허것승께.” “늙으면 왜 이냥 아프나 몰러?” 서로 임실 가는 목적을 얘기하다 곧 서울 간 아들·딸 이야기로 돌아간다. 버스가 도착하고 기다리던 주민들이 차에 오르면, 조금이나마 북적이던 시골 버스터미널이 다시 한산해진다.
전북 임실군 운암면 ‘운암버스터미널’. 낡은 철제 간판에 쓰인 ‘터미널’이란 문구가 없었더라면 이곳이 버스가 서는 터미널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만큼 후미지고 조그맣다. 이곳에서만 40년 넘게 터미널을 운영해온 김교만(92) 할아버지가 손님이 지나간 자리를 정리한다. 1960년대엔 운암면 인구가 1만 명이 넘었고, 초등학교가 다섯 군데나 있었다. 운암장이 서는 날이면 사람들로 제법 북적였고, 터미널 수입도 꽤 괜찮았다고 한다.
“그땐 전주 가는 차비가 200원 정도 했는데, 하루 세 번 (버스가) 다녔는데 사람들로 꽉 찼어. 지금은 모두 떠나 장도 없어지고, 이용하는 손님도 없고… 담배 사는 손님 아니면 벌써 문 닫을 건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텨온 ‘운암버스터미널’이 곧 없어질 운명이다. 준공된 지 40년 넘은 인근 섬진댐의 리모델링이 마무리되는 내년에는 댐 수위가 5m 정도 올라가게 되는데, 그러면 이곳이 수몰지구가 되기 때문이다. 창밖을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에 파인 주름 위로 햇살이 내려앉는다. 주인의 깊게 팬 주름만큼이나 수많은 사연을 함께 지켜온 터미널도 이젠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시간도, 사람도, 그곳을 지켜온 장소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임실=사진·글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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