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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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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책장에 너를 꼽으마!

등록 2002-12-20 15:00 수정 2020-05-02 19:23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선정한 ‘올해의 책’… 8인의 감동을 당신도 느끼고 싶지 않은가

갑자기 추워진 날씨만큼 겨울이 더욱 깊어갑니다. 어느덧 2002년도 저물고 있습니다. 지난해 이맘 때처럼 각계각층 인사들에게 ‘올해의 책’을 뽑아달라고 했습니다. 지난 1년간 읽은 책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정해 각자 개인적인 주석을 붙인 글을 보내왔습니다. 여러분이 정한 ‘올해의 책’은 어떤 것인지, 한번 비교해보시면 어떨까요. 편집자

환상여행의 마력에 빠지다
/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예문 펴냄

내가 원래 사이 파이(SF)는 좋아해도 판타지 소설과는 사귈 기회가 없었다. 거기 담긴 관념론이 달갑지 않아서다. 그런데 누구나 존경해 마지않는 어슐러 르귄의 시리즈조차 안 읽은 자가 5부작 를 독파했으니 어찌된 영문일까 아마 같은 사이 파이 작가라도 젤라즈니를 조금 더 좋아해서겠지. 결국 와 의 작가가 쓴 판타지 소설이 궁금했던 거였다.

를 두고 누군가 ‘챈들러가 쓴 ’이라고 했다는데, 거참 뽀뽀해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말이다. 기억을 잃은 사나이가 병원에서 깨어난다. 탈출해서 어딘가를 찾아가니 웬 미녀가 반긴다. 이어지는 괴한들의 습격, 맞서 싸우면서 코윈은 비로소 제가 누군지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는데…. 현대 뉴욕에서 펼쳐지는 이 도입부는 전혀 안 판타스틱하다. “모든 인간 동기의 순수성에 대한, 일종의 생득적인 회의론 같은 것이 찾아와서 내 가슴을 짓눌렀다.” 이런 식의 하드보일드. 그러더니 갑자기 환상세계로의 여행이 시작되고, 이때부터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 관념론이어도 인물이 죄다 실용주의자들이라 독자가 믿고 따를 만하다. 내 연구에 의하면, 분명히 클램프는 ‘카드를 매개로 연결되는 현실과 환상’이라는 의 아이디어를 여기서 가져왔다. 이 주장이 학계에 받아들여지는 날이 꼭 오리라 믿는다.

열린책들의 ‘경계소설’ 시리즈와 시공사의 ‘그리폰 총서’의 기획자 강수백으로 더 잘 알려진 김상훈씨의 번역과 해설 역시 독자가 믿고 따를 만하다. 한국에 그가 없었다면 내 사는 재미를 어디 가서 찾았을꼬 김 선생님, 어서 5부작도 마저 옮겨주세요.

박찬욱/ 영화감독, 등 연출

마음의 짐을 덜고 싶은가
/ 맥스 루케이도 지음, 나벽수 옮김, 좋은씨앗 펴냄

지난 한달은 지옥 같았습니다. 한마디 말이 불러온 풍파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거셌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라는 항변 아닌 해명은 노한 꾸짖음 속에 묻혀버렸습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마음의 통증은 하루하루 상향 곡선을 긋다가 마지막 뉴스를 앞두고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제 앞으로 전달된 쪽지 한장이 아니었더라면 눈물을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메시지는 간결했습니다. “아녜스, 힘들 때 기도!”

그제야 기도 생각이 났습니다. 게으르고 불성실한 신앙인이지만 힘들고 고단한 굽이 앞에 서면 어쩔 수 없이 신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래서 무슨 뾰족한 대답을 얻었느냐고요 최소한 이번 경우에는 이 책, 를 통해 분명한 길을 보았습니다.

일에 매달리느라 소중한 사람과 마음 나눌 시간조차 없이 뛰어다니는 생활, 방송을 잘 해내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피로해서 어쩔 줄 모르면서도 손에 쥔 것을 절대로 놓지 않으려는 욕심, 사랑받고 싶은 욕구에 솔직하지 못한 태도, 미래에서 가불해온 걱정만 잔뜩 남은 마음…. 글쓴이는 이런 것들 하나하나를 꼭꼭 짚어가며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라고 요구합니다.

메시지를 따라가다 보니 버려야 할 짐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우선 절망의 보따리와 외로움의 짐, 두려움의 배낭부터 버리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은 자기 신뢰의 짐과 욕구불만의 짐, 질투와 의심의 짐을 덜고 싶습니다. 그게 얼마나 오래 가겠느냐고요 정말 그럴 수 있겠느냐고요 저도 모릅니다. 다만, 무겁다는 자각이 들 때마다 거듭 버리려고 합니다. 벌써부터 마음이 한결 가벼워옵니다

황정민/ 한국방송 아나운서

남자의 속내를 엿듣는 즐거움
/ 권복기 외 열다섯명의 아빠들 지음, 이프 펴냄

남성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그들이 술자리에서 목청껏 직장상사를 성토하거나 질펀한 음담패설을 나눌 때, 그런 사소한 잡담을 연막으로 하여 궁극적으로 감추려 하는 더 내밀한 속내에는 무엇이 있을까.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남성들은 자신의 감정이나 사생활을 드러내는 것이 적에게 아킬레스건을 보여주는 것과 동일한 행위라고 학습받는다고 한다. 외국의 경우 남성들은 정신과 의사나 한명 정도의 여자친구에게 고민을 토로한다고 하고, 그런 여건이 되지 않는 우리나라 남성들은 조용한 술집을 찾아가 나이든 마담에게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고 들었다. 대낮의 노래방에서 몸을 비틀며 고함 지르는 넥타이 맨 남성, 깊은 밤 취기에 절어 여기저기 전화하는 남성, 건조한 눈빛으로 옛 연인의 안부를 묻는 남성들을 만날 때, 그런 때마다 그 내면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었다. 여성들에게 아주 조금 기득권을 내어준 사실에 대해 지나치게 엄살부리거나 돌연 폭력적으로 변하는 남성들을 만날 때도 그랬다.

가 감동적인 것은 그 지점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겐 이 책이 ‘아빠들의 새로운 육아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았다. 남성들이 털어놓는 진솔한 속내 이야기를 듣는 맛깔스러움이 더 컸다. 16명이나 되는 남성들이 부모나 형제에 대해, 결혼제도나 가사 분담에 대해, 가장이나 아버지 역할에 대해, 일과 성취에 대해 저마다의 생각을 들려주는 책이라니. 치열하게 고민하고 온몸으로 살아내고, 그것을 진솔하고 담백하게 말한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간혹 펜을 들어 밑줄을 그었고 이따금 가슴을 쓸어냈다.

김형경/ 소설가

칸트와 마르크스 ‘동전의 양면’
/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사회평론 옮김

국내 지식계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낯선 인물이 아니다. 한동안 ‘죽은 개’ 취급을 당해온 마르크스에 대한 통념을 ‘낯설게 하기’와 같은 방식으로 깨뜨리는 예리한 철학적 질문들이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어온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 역시 서점에 들를 때마다 그의 저작의 새 번역본이 나왔는지 둘러보곤 한다. 두달 전 과의 해후는 다시 한번 이런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흔히 칸트는 마르크스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자유주의 철학의 대표자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고진은 이런 상식을 가로질러 칸트의 도덕철학이 오히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념의 철학적 전제라고 역설한다. “타인을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법이야말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율적 연합”이라는 공산주의의 이념을 예비하는 ‘규제적 이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이념은 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일 뿐 아니라 새로운 윤리적 패러다임으로 재독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8세기의 칸트가 21세기의 새로운 윤리의 철학적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적 이념의 철학적 기초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다. 마르크스와 칸트의 이런 접속은 분명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지식체계에 대한 “낯설게 하기”다.

이렇게 재해석된 칸트와 마르크스는 ‘죽은 개’가 아니라 오히려 21세기 탈근대적 사유의 단초를 제공한다. 근대철학과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전반의 지배적 패러다임을 깨뜨리는 지점은 그것들의 초석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진의 독법은 에드거 앨런 포의 를 닮아 있다.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문화연대 상임집행위원

시적 선율로 굴드를 읽는다
/ 미셀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동문선 펴냄

음악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음악이란 것이 본래 가장 비언어적인 예술이기에, 음악에서 얻은 느낌을 갖가지 수사를 동원하여 언어로 옮기면 옮길수록 도리어 가장 중요한 무언가는 점점 더 멀리 달아나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게 된다. “시를 다른 언어로 번역했을 때, 결국 번역되지 않고 남는 것이 바로 그 시”라는 어떤 시인의 말처럼, 음악 역시 애초에 그렇게 언어로 옮겨질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음악의 감동을 언어로 옮기려고 발버둥치는, 그것도 대중보다 우월한 위치에 선 양 권위적인 말투로 해설하려 드는 이들(자칭 평론가들)이 이 세계엔 존재한다. 생각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바보 아니면 사기꾼 둘 중 하나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허나 그렇다고 음악에 대한 글쓰기가 모두 무용하다고 할 수 있을까. 가끔 아주 가끔 보석같이 빛나는 글들을 마주칠 때가 있는데, 이를테면 지난 4월 한 팬이 피아노 치는 나의 모습이 제일 좋다며 선물한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동문선)가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캐나다 출신의 천재적인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대한 책이다. 전기라고 하자니 연대기적 구성을 찾아볼 수 없고, 그의 음악에 대한 해설 혹은 평론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몽상적인 시적 언어를 구사한다. 글렌 굴드의 필생의 천착물인 바하의 의 구조를 그대로 차용한 이 책은, 글렌 굴드의 음악관과 음악철학을 아주 세심한 어조로 좇는다. 다양한 자료와 사실들을 토대로, 그의 내면에서 일어났을 법한 고뇌와 성찰을 그의 음악의 결을 따라 재구성해낸다. 글렌 굴드는 감정의 폭발보다는 극도의 정제를, 연주회장보다는 녹음 스튜디오를 선호한 독특한 피아니스트다. 가장 '비(非)피아노적인' 방법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자 했던 모순에 찬 인물이다. 이 책은 기이한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세계가 과연 어떤 근원과 배경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완성되는지에 대한 아름다운 탐구의 결과물이다. 연주하는 동안 피아노는 사라지고 음악만 남길 글렌 굴드가 바랬듯, 책을 읽다보면 작가는 사라지고 글렌 굴드만 남는다. 그리고 아주 먼 곳에서 그의 음악이 들려온다. 그 순간 음악과 언어는 기분 좋게 화해한다.

이적/가수 www.leejuck.com

오래된 신화의 현대적 귀환
/ 질베르 뒤랑 지음, 진형준 옮김, 살림 펴냄.

은 비 사회과학도에게 만만한 책은 아니다. 서구성상파괴의 역사를 압축한 분석이나 상상계를 과학적 인식의 틀로 바라보는 시각을 기에 벅찬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회과학서도 때로는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다.

질베르 뒤랑이 한국판 서문에서 한국인들에게 간곡히 부탁한 말들은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진정어린 권고이자, 우리가 잊고 살아온 가치들을 귀환시킨다. 그는 서문에서 2천년대는 다양한 인류학적 가치들이 회복될 시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단 하나의 문화, 즉 합리적이고 실증주의적인 것에 기반해온 서구문화가 여러 다양한 문화들을 짓누르고, 자행했던 범죄와 실패로부터 벗어나길 기원한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묻는다.

“한국 불교의 ‘상징사전’을 언제나 가질 수 있을까요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신화백과사전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한국의 젊은 연구가들을 기다리고 있는 이런 작업은 얼마나 거대한 것이며 흥미로운 것인가요!”라고. 그는 이어서 역사적으로 고통스럽게, 그러나 당당하게 그 삶과 전통을 이어온 한국도 인간의 상(像)을 회복하려는 이 움직임에 합류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사람들은 사실상 상상계를 떠나 살수 없었던 시절 신화를 ‘현실세계’의 일상성으로 공존시켜왔다. 그러나 이를 격리시키고, 파괴해오다 결과적으로 대체한 것은 ‘이미지’의 범람과 폭력이다. 더욱이 정보기술, 극소기술, 생명공학의 출몰은 익명의 이미지 홍수과 함께 우리들에게 ‘죽은눈’을 강요하고 있다.

이제는 인간과 인간성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이 책은 신화의 귀환이라는 오래된 의미의 물줄기를 다시 한 번 생각케 한다. 단순한 흥밋거리로써가 아니라 인식론의 전환으로써 말이다.

정기용/ 기용건축 대표

그래도 희망을 말하리라!
/ 조선희 지음, 생각의 나무 펴냄

살아가면서 좋은 친구를 얻는 것만큼 좋은 일이 또 있을까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살맛나는 일이며 든든한 일이다. 조선희씨의 을 읽고 난 느낌이 그랬다. 친밀감 신뢰감 든든함. 이따금 만나고 각기 다른 장소에서 자기 일을 하지만 같은 하늘을 받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그런 친구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 하룻밤에 다 읽어버린 것은 그 책이 결코 가벼워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빨려 들다보니 손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징글징글하고도 괴물스러운 자본주의, 그것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을 꿈꾸는 사람들의 열정과 불안, 여림, 따뜻함, 센티멘탈, 진정성, 좌절, 배신, 아품, 상처. 남의 얘기가 아닌, 나의 모습,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다.

소설이란 물론 허구이다. 그러나 글을 읽다보면 작가의 마음씨, 가치관, 경험, 작가의 됨됨이나 개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더구나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소설을 읽는 것은, 삶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 같은, 깊은 속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은 점점 사는게 재미없어지고 지리멸렬해지는 것 같을 지도 모른다. 소설 속 영준이의 말처럼, “앞으로 살면서 무슨 희망이 있을까. 이젠 열정도 남아 있지 않은 거 같아. 열정을 쏟을 일도 없는 거 같고.” 우리가 꿈꿔왔던 이상들, 좌절과 상처. 무엇보다 가슴아픈 것은 배신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꿈을 꾼다. ‘눌라치타’를! 조선희씨, 우리 언제 만나서 눌라치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요 절치부심으로 준비하는 그런 거 말고 너무 즐거워서 자연스럽게 꼬여드는 우리들의 눌라치타, ‘여성들의 땅’에 대해서 말이예요.

이혜경/ 여성문화예술기획 대표

아름다운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
체 게바라 시집 / 이산하 엮음, 문화산책 펴냄

체 게바라가 시도 썼어 라고 묻는 독자에게, 체 게바라의 삶 자체가 시야, 라고 답하는 책이다. 사르트르는 그를 일러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했다지만, 나는 ‘완전’이라는 비인간적 단어보다는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그에게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때이른 죽음이 망가뜨리지 못한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가슴 속에 혁명은커녕 그 모든 열정의 불씨를 꺼뜨려버린, 나를 포함한 많은 현대의 사이보그들에게 다시 인간으로 뜨겁게 살아 보기를 권한다. 의 시인 이산하씨가 3년동안 온오프라인의 구석구석을 뒤져 찾아냈다는 이 불후의 ‘어록’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는 구절로 말문을 연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고 쿠바에서 싸우다가 볼리비아에서 죽은” 이 영원한 청년이 쓴 글들이 사실은 글이 아니라 제대로 짜낸 삶의 즙이며, 그래서 ‘시’라고 가르쳐준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온건이란 말은/ 제국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말 중 하나다/ 온건주의자는/ 두려움이 많은 사람/ 혹은,/ 어떤 형태의 배신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킬 뿐이다/ 민중은,/ 결코 온건하지 않다.”(‘온건’의 전문)라는 글은, 갈수록 사고가 흐리멍텅 두루뭉술해지고 있는 나같은 사람은 결코 생산해낼 수 없는 통찰 아닌가. 삶에 비겁하면, 결국 자신에게라도 들키고야 만다.

한해의 성과라고는 단 하나도 입에 올릴 게 없는 슬픈 연말에, 나는 이 책에서 열정의 불씨를 채화해서 얼마 남아있는지 모를 삶의 마라톤을 계속할 작정이다. 나도 게바라처럼, ‘내가 살아가는 이유’, “그것은, 때때로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최보은/ 월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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