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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정상영 ‘섭정’ 시대?

등록 2003-08-27 15:00 수정 2020-05-02 19:23

현대상선 주식 매입 등으로 금강고려화학의 품에 안긴 현대그룹, 대북사업은 어떻게 될까

지난 8월8일 서울 풍납동 중앙병원에서 치러진 고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의 영결식에는 유족과 조문객 등 2천여명이 참석했다. 내로라 하는 경제계 인사들은 물론이고, 현대의 대북사업을 ‘북한 퍼주기’라고 비난하던 정치인들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장례식은 근래 보기 드문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정 의장 죽음 뒤 현대 주가 치솟아

그러나 돈의 논리는 냉정한 법. 정 의장의 죽음 이후 그가 이끌던 현대그룹 주가는 오히려 치솟기 시작했다. 현대상선은 정 의장이 투신하던 8월4일 이전 3155원에서 8월22일 현재 5100원으로 61% 올랐고, 같은 기간 외국인들이 집중 매입한 현대엘리베이터는 무려 125%가 올랐다. 현대증권도 21% 상승했다.

주주들이 현대 계열사의 주가와 관련해 가장 큰 관심을 갖는 것은 현대그룹 경영권의 향방이다. 경영권에 따라 현대 계열사들이 앞으로 대북사업에 어떻게 개입할지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계열사의 주가상승이 시작된 것은 현대엘리베이터부터였다. 현대엘리베이터는 8월7일부터 연속 상한가 행진을 이어갔다. 외국인들이 주식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8월7일 이전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단 1주도 갖고 있지 않던 외국인들은 단 며칠 만에 지분율을 10% 이상으로 높였다.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상선의 최대주주이고, 현대상선은 현대 계열사들의 지분을 많이 갖고 있는 사실상의 지주회사다. 그러나 고 정 의장은 현대상선 지분을 4.6%만 갖고 있었고, 그의 장모 김문희씨가 보유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18.6%에 기대어 그룹 경영권을 행사해왔다. 이 때문에 외국인들의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집중 매수에 대해 현대그룹 경영권을 노린 것 아니냐는 시각이 일기도 했다. 물론 증권가의 대체적인 분석은 차익실현을 노린 장기투자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외국인 매수주체는 미국 보스턴에 본사를 둔 투자회사 ‘GMO이머징마켓펀드’ 등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펀드는 이미 대상, 크라운제과, LG상사 등 국내 기업의 지분을 5% 이상 투자 목적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주로 3∼5년의 장기 투자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식시장에는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사들이는 외국인투자가가 하나가 아닌 여럿이라는 이야기도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적대적 합병·인수(M&A) 시도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현대의 옛 계열사들이 ‘경영권 보호’를 내걸고 현대엘리베이터 등 현대 계열사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사들인 곳은 한국프랜지공업 등 9곳으로, 현대엘리베이터의 발행주식 561만주의 무려 16%인 90만주를 사들였다. 정순영 성우그룹 회장의 2남인 정몽석 회장의 현대종합금속이 4.99%를 사들였고, 정 명예회장의 매제인 김영주 명예회장의 한국프랜지가 2.72%, 정상영 명예회장의 금강고려화학 계열사인 금강종합건설이 1.96%, 성우그룹 계열사인 울산화학이 1.93% 등이었다. 옛 현대계열사들의 이런 움직임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막내동생인 금강고려화학 정상영 명예회장이 주도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선은 회장급 전문경영인에게 맡길 듯

여기까지는 그다지 이상한 점이 없다. 외국인들의 주식매입에 맞서 현대그룹의 취약한 경영권을 방어하겠다는 뜻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8월19일 뜻밖의 공시가 나왔다. 정상영 명예회장의 금강고려화학이 8월19일 현대상선 주식 307만주를 매입했다고 밝힌 것이다. 지분율로 보면 2.98%로, 금강고려화학은 현대엘리베이터(15.16%)와 현대건설(8.69%), 고 정몽헌 의장(4.9%)에 이어 현대상선의 4대 주주가 됐다. 그러나 이는 현대그룹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것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현대상선은 현대아산, 현대택배 등 여러 계열사의 지분을 고루 갖고 실질적인 지주회사 구실을 해왔기 때문이다. 금강고려화학쪽은 공시에서 “주식매입은 투자 목적”이라고 밝혔지만, 정상영 명예회장쪽이 현대그룹의 장래와 관련해 중요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현대가의 한 소식통은 이와 관련해 “8월19일치로 현대가(家) 안에서 모든 것이 정리됐다”고 말했다. 현대그룹의 경영권이 사실상 정상영 명예회장 손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는 “정상영 명예회장이 지난해 말 정몽헌 의장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정 의장의 장모인 김문희씨가 가지고 있는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의 상당 부분을 담보로 받아놓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금강고려화학쪽이 현대상선의 지분까지 사들여 현대그룹을 접수한 것도 ‘범현대’ 가문에서 이를 둘러싼 의견 조율이 마무리된 데 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은 8월22일 금강고려화학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정상영 명예회장이 ‘경영 공백 상태에 빠진 현대그룹을 내가 직접 관리하겠다’고 말했으며, 현대그룹 경영권 방어를 위해 사재를 포함해 300억원의 자금을 준비해뒀고 개인적으로도 현대 계열사 지분을 사모으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당장 직접 인수는 하지 않고 관리만 하는 ‘섭정’을 선포했지만, 이는 금강고려화학쪽이 현대그룹의 새 주인이 됐음을 뜻하는 것이다.

금강고려화학쪽은 현대그룹을 앞으로 어떻게 끌어갈 것인가? 정상영 명예회장은 현재로서는 현대 계열사들을 그룹 안으로 편입할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우선은 회장급 전문경영인에게 현대그룹의 경영을 맡길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지분문제뿐 아니라, 현대그룹이 주도해온 대북사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현대 계열사들의 주가가 오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금강고려화학의 주가는 8월4일 11만3500원에서 22일 9만3100원으로 떨어졌다.

대북사업을 정부와 협상카드로?

최대의 관심은 정상영 명예회장이 이끌어갈 현대그룹의 대북사업 향방. 정 명예회장은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 현대택배 등 3개사를 중점 육성해 현대그룹의 간판으로 키우는 대신 나머지 계열사들은 단계적으로 처분해나가겠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대북사업을 맡고 있는 현대아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이를 확대 해석하면 더 이상의 대북사업은 주도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이 ‘조카’(고 정몽헌 의장)에 대한 애정을 내비친 점, 고 정몽헌 의장이 “대북사업을 반드시 성공적으로 추진해달라”고 유언을 남긴 점을 감안할 때 정상영 섭정시대의 현대그룹이 대북사업에서 쉽게 손을 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금강고려화학쪽은 과거 현대의 금강산사업 중 일부에 관심을 보인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상영 명예회장이 수익이 나지 않는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밝혔음에도 현대그룹에 대한 영향력을 넓혀가는 금강고려화학의 주가가 떨어지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도 “현대그룹 섭정을 선언한 정상영 명예회장이 앞으로 현대그룹의 재편 과정에서 대북사업을 정부와의 협상카드로 쓰지 않겠느냐”고 했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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