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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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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사람들은 집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

2007년부터 1년간 런던, 금융위기 시기 부동산 붐과 금융 열풍을 르포르타주보다 더 생생히 그린 존 란체스터의 <캐피탈>
등록 2024-02-09 03:04 수정 2024-02-15 08:43
존 란체스터의 소설 <캐피탈>은 금융위기를 영국 런던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서술한다. <비비시>(BBC)에서 3부작 드라마로 제작된 <캐피탈>. BBC 제공

존 란체스터의 소설 <캐피탈>은 금융위기를 영국 런던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서술한다. <비비시>(BBC)에서 3부작 드라마로 제작된 <캐피탈>. BBC 제공


제목이 ‘캐피탈’인 책이 여럿 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물론 마르크스의 <자본>과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입니다. 이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존 란체스터의 소설 <캐피탈>도 있습니다. 이 소설은 2007년 12월에서 이듬해 11월까지의 1년간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시기 하면 바로 금융위기가 떠오를 겁니다. 이 소설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금융위기를 다룬 다른 소설들이 금융기관 내부 모습에 집중하는 데 비해, 란체스터는 부동산 붐과 금융 열풍을 런던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서술합니다. 파노라마 같은 소설입니다.

삶의 주인공이 돼버린 집

이 소설에는 전통적 방식으로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따로 없습니다. 오히려 이들이 거주하거나 생활하는 공간인 런던 남부의 피프스로드 자체가 주인공이라는 느낌입니다. 이곳의 주택들은 대부분 19세기 말 벽돌세(brick tax, 주택에 들어간 벽돌 개수에 따라 부과된 일종의 재산세)가 폐지된 뒤 지어진 벽돌 건물입니다. 초기에는 변호사나 의사가 아닌 그들 밑에서 일하는 하위 중산층이 주로 거주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폭격으로 일부 집이 무너진 뒤 다시 지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오랫동안 원형을 보존했고 사람들의 삶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조용한 주택가도 21세기 들어 예전 모습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이 소설의 출발점인 2007년에는 집집마다 경쟁적으로 확장 공사가 벌어졌습니다. 지하실을 만드는 비용이 10만파운드 넘게 들지만, 그 이상 집의 가치가 오르기 때문에 무조건 이익이라는 식이었습니다. 주민들의 삶도 과거 100년 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깜짝 놀랄 만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피프스로드 주민들이 갑자기 부자가 됐는데, 부자가 된 이유는 단지 그들이 피프스로드에 거주한다는 사실 자체였습니다. 마법처럼 그곳의 집들이 수백만파운드로 가격이 뛴 것입니다.

오랫동안 집은 삶의 배경이고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집 자체는 무대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가격이 너무 치솟은 탓에 집이 삶의 주인공 역할을 차지했습니다. 이웃들과의 대화는 항상 ‘근데 저 아랫집 얼마에 팔렸는지 들었어?’로 자연스럽게 귀결됐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보면 집값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자제했다가도 그 욕망에 굴복해 집값에 대해 실컷 떠들어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피프스로드 집집마다 정체불명의 엽서가 배달됩니다. ‘우리는 당신이 가진 것을 원한다’라는 단 한 문장과 그들이 사는 집을 찍은 사진을 담고 있습니다. 이 엽서는 이후 소설 전개의 중심 고리가 됩니다(그 내용은 책을 읽으실 분들을 위해 이 칼럼에서는 아껴두겠습니다).

3시가 되면 골프 치러 나가던 시절이 그리워라

로저 욘트는 피프스로드의 집을 250만파운드 주고 사면서 오를 만큼 오른 것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이후로도 집값은 껑충 더 뛰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핑커로이드은행 외환거래 부서 책임자인 욘트의 기본 연봉은 15만파운드에 불과하지만(아내 아라벨라는 이를 ‘옷값’ 정도라고 비아냥댑니다) 보너스가 더 중요합니다. 올해는 보너스로 100만파운드를 받지 않을까 하고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욘트가 돌이켜보기에 런던 금융가도 분위기가 많이 변했습니다. 키가 큰 미남이고 사교성이 좋은 욘트는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는’ 것이 중요했던 시대의 마지막에 은행에 입사했습니다. 지금은 모니터만 쳐다보는 괴짜 수학 천재들이 더 환영받는 시대입니다. 욘트는 외환부서장이지만 그가 따라잡지 못할 만큼 외환거래가 어려워졌습니다. 엄청나게 복잡한 수학 공식과 알고리듬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환율이 오르는 것과 내리는 것 모두에 적절히 베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욘트 밑에서 일하는 마크 차장 같은 이들에게 익숙한 일이죠. 그는 수학박사입니다. 오히려 예전 은행 시절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때는 3-6-3 룰이 있었습니다. 예금을 든 사람들에게 3% 이자를 주고, 대출로 6% 이자를 받아 수익을 내는 단순한 시대였습니다. 아, 마지막 3은 뭐냐고요? 은행원들이 오후 3시가 되면 골프를 치러 나간다는 뜻입니다.

<캐피탈>의 로저 욘트는 외환부서장이지만 그가 따라잡지 못할 만큼 외환거래가 어려워졌습니다.

<캐피탈>의 로저 욘트는 외환부서장이지만 그가 따라잡지 못할 만큼 외환거래가 어려워졌습니다.


2007년이 되면서 복잡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금융업에 뭔가 균열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미국 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고 9월에는 영국 노던록은행이 파산해서 외환시장도 들쑥날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결국 욘트의 보너스는 100만파운드가 아닌 3만파운드로 결정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크는 공을 세워보겠다며 허가받지 않은 거래를 하다 회사에 엄청난 손실을 끼치고, 관리 책임을 물어 욘트까지 해고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하면서 핑커로이드은행은 파산하고 욘트를 비웃던 모두가 다 같은 실직자 신세가 됩니다. 욘트는 짜릿함을 느낍니다.

디킨스가 그리는 듯한 만화경

소설 <캐피탈>의 두 축은 부동산과 은행이지만 거기에 멈추지 않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뒤 혼자 사는 여든두 살의 피튜니아 하우는 뇌종양 투병생활을 합니다. 그의 모습을 통해 영국의 자랑이자 한계에 부딪힌 국가의료체계를 돌아보게 됩니다. 하우의 손자 앨버트는 뱅크시 스타일의 숨어서 활동하는 예술가입니다. 파키스탄 출신 무슬림 이민자 아메르 카말 가족과 친구들은 종교·테러라는 주제를 보여줍니다. 그 외에도 짐바브웨에서 정치적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려는 주차단속요원 퀜티나 맥페시, 세네갈 출신의 축구 스타 프레디 카모, 폴란드 출신의 성실한 주택수리업자 보그단 등 다양한 이민자들이 얽혀 있습니다.

<캐피탈>의 이런 특성 때문에 존 란체스터는 흔히 빅토리아 시대의 작가 찰스 디킨스와 비교됩니다. 영국 금융 저널리스트 월터 배젓은 ‘디킨스는 후손을 위한 특파원처럼 런던을 묘사했다’고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란체스터를 통해 금융위기와 브렉시트 전후 영국의 모습을 르포르타주보다 더 생생히 접할 수 있습니다. 디킨스와 란체스터는 모두 기자 출신 소설가입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존 란체스터의 <캐피탈>은

존 란체스터는 1962년생이고 영국 런던에서 거주하는 작가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났고, 소년 시절 대부분을 홍콩에서 자랐기 때문에 언어와 여권 등 모든 것에서 영국인임이 분명하지만 런던에 있을 때 어디에선가 온 방문자 같다는 느낌이 있다고 합니다. 그의 이런 경험이 <캐피탈>에 등장하는 여러 이민자의 모습에 반영된 것 같습니다. 사실 란체스터는 금융위기가 발생할 때까지 ‘재정’(fiscal)과 ‘통화’(monetary)도 잘 구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널리스트 경험을 살려 금융 분야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이 소설을 썼고, 다른 한편 <돈을 말하는 법>(How to Speak Money)이라는 논픽션도 출간했습니다. 300여 개의 금융 용어를 위트 있고 알기 쉽게 설명한 책입니다. 2012년 영국에서 출간된 <캐피탈>은 2019년 이순미의 번역으로 서울문화사에서 한국어판이 나왔고, 2015년 3부작 티브이(TV) 시리즈로 제작돼 <비비시>(BBC)에서 상영됐습니다.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다. 2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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