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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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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전쟁’인가 전쟁 같은 ‘갈등’인가

미·중과 달리 ‘목표’ 불분명한 일 수출규제…

‘위기수준 평가’ 따라 한국 대응 달라져
등록 2019-08-12 10:58 수정 2020-05-03 04:29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이 8월2일 ‘일본 정부의 백색국가 배제 등 수출규제 및 보복조치 관련 종합 대응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이 8월2일 ‘일본 정부의 백색국가 배제 등 수출규제 및 보복조치 관련 종합 대응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국가’의 이름으로 치고받았다. ‘갈등’이 ‘전쟁’이 되어갈수록 일부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갔다. 격화되고 다소 진정됐지만 위기감은 여전하다. 2019년 8월, 격랑이 이는 국제 경제 풍경이다.

8월1일(현지시각) “다음달부터 3천억달러어치 중국 제품에 대해 (추가로) 10% 관세를 부과한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고 했다. 추가 관세 부과 대상에 미국 소비자가 직접 사는 상품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일반 소비자가 중국 제품을 살 수 있는 여력과 후생은 그만큼 줄어든다.

평가 이뤄지기 전 ‘일단 대응’ 상황 직면

8월5일 중국 위안화가 달러당 7위안을 넘어서는 ‘포치’가 현실화됐다. 미국이 관세 부과로 중국 제품의 수출 경쟁력을 떨어트리려 하자, 중국이 위안화 가치를 떨어트려 맞대응하는 조처로 여겨졌다. 달러로 부채를 끌어다 쓴 자국 기업의 빚 상환 부담은 늘고, 추가적인 위안화 가치 하락을 우려하는 외국인 자금이 이탈할 수 있지만, 감행했다. 이윽고 미국은 중국을 25년 만에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했다.

8월7일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시행령을 공포했다. 미국과 중국 갈등으로 안전 자산인 엔화 가치가 급히 올라 수출 경쟁력이 크게 떨어질 위기인데다, “일본 산업에도 악영향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지만 아랑곳없었다.

정신없이 벌어지는 경제 갈등 속 ‘이기기 위해 경제주체 누군가의 희생을 각오하겠다’는 결연한 자세가 미국, 중국, 일본 한결같다. 미국은 소비자 구매력을 일정 정도 포기하고, 중국은 외국인 자금 이탈 우려를 일단 제쳐놨다. 경제 패권이라는 중장기적 목표가 명확한 두 나라와 달리, 일본은 경제적으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도 불분명한 상태로 자국 수출기업에 해를 가한다. “전쟁 같은 상황”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경제적 편익이라는 합리성을 벗어나 서로를 위협하기 위해 스스로 몸에 어느 정도 생채기를 내는 것도 감수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세계경제는 ‘이겨야 한다’는 결의와 ‘그래도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합리성 사이 살얼음판을 딛고 있다. 정치력이 약한 자국민 일부의 일정한 희생을 대가 삼아서라도 상대국을 이겨야 하는 신보호무역주의(찰스 K. 롤리 등, )가 한층 적나라해지는 모양새다. 더는 다른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일본 수출규제 앞에 예기치 못하게 우리도 처음, 이런 무역 갈등의 ‘당사자’가 돼버렸다. 우리가 느끼는 혼란은 당연하다. 일본의 수출규제 사태는 이기거나 굴복하는 길밖에 없는 전쟁인가. 전쟁이니만큼 국민보다 국가, 공정성보다 속도와 결과가 더 중요한가. 자유무역을 지지하면서 일본에 맞대응하는 것 사이에 모순은 없는가. 혼란스러운 질문에 답을 구하기도 전에 일단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정부의 메시지는 상충하고 정책 방향성은 종잡기 어렵다. 일본 수출규제 앞에 우리 안의 혼란도 번져간다.

김상조 “전쟁 같은 요소가 있다”

‘전쟁’이라는 단어는 우리 정부에서도 등장했다. 8월6일 국회 운영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말한다. “(현재 한-일 상황에는) 전쟁 같은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동의가 뒷받침돼야 한다.” 단순한 수사로 활용한 단어일지라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희생과 닿아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다만 상황이 정말 다급한 전쟁으로 몰려가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일본이 마음먹기에 따라 위기는 수위를 넘나든다.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한국투자증권)는 시장 판단도 나온다. 아직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3개 소재의 수출규제가 생산에 직접적인 차질을 빚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반도체 공급 감소 우려는 가뜩이나 떨어져 있던 반도체 가격을 끌어올려 단기적인 호재가 되기도 했다. 일본이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8월7일 공포하며 수출관리 내부규정(ICP) 인증을 받은 기업(인증기업)과의 거래를 특별히 언급하지 않으면서 잠깐 숨 돌릴 수 있는 틈이 생겼다. 웬만한 부품·소재 업체가 포함되는 인증기업과는 이전처럼 개별 허가가 아닌 3년 동안 포괄 허가를 받아 거래할 수 있다. 반도체 관련 일부 품목의 수출 허가도 규제 한 달여 만에 내려졌다. 정부 역시 화이트리스트 제외 직후, “기업별·업종별 위기를 너무 과장하지 말았으면 좋겠다”(8월5일 청와대 고위 관계자)며 공포감 잡기에 나선 바 있다.

그렇다고 위기를 과소평가할 수도 없다. 조였다 풀며 종잡기 어려운 일본의 조처는 불안을 더욱 넓게 조장한다. 여전히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소재 3개가 개별 허가를 받아야 하는 품목인 것은 변함없다. 일본 의지에 따라 언제든 심사 기간을 늘리거나 수출을 금지할 수 있다. 인증 기업과 거래하는 전략물자 854개, ‘캐치올’(상황허가) 구제 대상인 비전략물자 74개 가운데 일본이 어떤 것을 어느 날 갑자기 ‘이제부터는 개별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지정할지도 모를 일이다. 여전히 칼자루는 일본이 쥐고 있다.

8월6일 경남 창원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일본 수출규제 관련 기업설명회. 연합뉴스

8월6일 경남 창원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일본 수출규제 관련 기업설명회. 연합뉴스

‘일부 국민 희생’ 불가피한 전쟁 맞나?

위기 수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수출규제에 대응하는 조처들이 숨 돌릴 틈 없이 나온다. 일단은 어느 정도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전쟁 같은 상황 인식’을 전제로 한 대책이다. 특히 정치적 목소리가 약하거나 빠른 성과를 내기 어려운 부분에 희생이 집중된다. 애초 “양적 성장을 강조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한국 경제의 수출 의존성이 매우 크다. …온기를 많은 사람이 골고루 느끼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2017년 홍장표 전 경제수석 인터뷰)라고 자신할 정도로, 국가보다 국민, 성장보다 왜곡된 경제구조를 바로잡는 경제정책을 기조 삼아온 문재인 정부 처지에서 더 고민스러운 대목이다. 물론 이런 자신감은 경제성장이 둔화하며 국가적 차원의 위기론이 떠오르기 시작한 지난해부터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7월 발표된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은 대부분 기업 투자와 수출을 늘리는 대책으로 채워졌다. 내년도 세제개편안은 대기업의 세금 부담을 앞으로 5년 동안 2062억원(누적법 기준) 줄이는 방향으로 짜였다.

정부가 8월5일 일본 수출규제를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대외 의존형 산업구조 탈피를 위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은 이런 흐름에 쐐기를 박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책에는 ‘계열사 간 거래를 통해 핵심 소재·부품을 조달할 수 있도록 관련 기준을 명확하게 하겠다’는 내용까지 담았다. 계열사를 통한 대기업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를 ‘일본 수출규제의 긴급성’을 고려해 다소 완화할 길이 열렸다. 재정·세제 지원, 수도권 산업단지 입주 규제 완화, 화학물질관리법 등 환경·안전 규제 완화, 주 52시간제를 유연하게 운영(특별연장근로 인가 등)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업을 전제하지만, 둘 사이 공정한 거래 관계에 대한 언급은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대기업이 정부 지원을 받아 대체재를 개발하고, 이후에도 중소기업 위에 서는 산업 생태계가 소재·부품 산업에서도 견고해질 수 있는 셈이다.

국가가 경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중소기업을 부리며 부품·소재를 개발할 능력이 되는 대기업은 국가의 장수가 된다. 노동조건, 안전, 지역 균형발전처럼 희생되는 가치에 대해서는 ‘불가피하다’는 단서가 붙는다. “그동안의 원칙을 무너트리고 재계의 요구사항을 고민 없이 반영해야 할 만큼 다급한 상황일지 의문이다. 갈등이 장기간 이어진다면 결국 지금 만든 이 대책 속의 기조가 앞으로 경제정책 전반을 규정해버릴 우려도 있다”(조영철 고려대 초빙교수)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대기업 규제 완화 등 역효과 우려

자유무역에 대한 지지와 맞대응 사이에서도 혼란이 빚어진다. “일본이 평화로운 국제 자유무역 질서를 훼손한다”(문재인 대통령 8월8일 국민경제자문회의)는 것은 줄곧 일본을 비판하는 우리 쪽의 중요한 근거였다. 하지만 이와 함께 우리 또한 일본을 한국의 전략물자 수출 우대국에서 제외하려는 맞대응 계획이 언급된다. “자유무역을 지지해온 입장에서 멀어지며, 일본에 추가 조처의 빌미를 줄 수 있는 맞대응은 상황을 풀기 어려운 쪽으로 몰아갈 수 있다”(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려가 뒤따른다. 8월8일 현재, 정부는 일본에 대한 수출 우대국 제외 조처는 일단 접어둔 상태다.

이 갈등은 전쟁인가 아닌가. 우리 경제가 일부 경제주체나 경제원칙의 희생을 각오해야만 할지, 그 희생이 공정한 고통 분담이 되도록 조율할 시간이 주어졌는지와 맞닿아 있어 잔인하고, 중요한 질문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아직 “답을 찾기 어렵지만 우리가 먼저 과도하게 전쟁 국면으로 몰아가는 것은 국제 경제 차원에서도 내부 경제정책 차원에서도 위험하다”(성태윤 교수)는 답변 정도가 나올 뿐이다. 전쟁 같은 보호무역의 벽 앞에 “우리 정부는 지금도 대응과 맞대응의 악순환을 원치 않는다”(8월2일 문재인 대통령 국무회의 발언)는 의지를 세우는 건 외롭고 위태롭지만, 중요한 싸움이 돼가고 있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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