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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차명계좌 ‘쥐꼬리 과징금’으로 끝?

2조원 넘는 차명계좌 보유한 이건희 회장 과징금은 고작 30억원…

지난 10년간 과징금 제도 개선 안 한 금융위 책임론 피하기 어려워
등록 2018-03-13 17:47 수정 2020-05-03 04:28
병상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자신의 차명계좌에 대한 과징금 부과 소식을 알고 있을까. 한겨레 김명진 기자

병상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자신의 차명계좌에 대한 과징금 부과 소식을 알고 있을까. 한겨레 김명진 기자

“금융위원회가 책임져야 할 일이 있으면 책임지겠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2월27일 국회 정무위원회에 출석해 한 말이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2008년 삼성 특별수사 때 드러난 2조원 규모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차명계좌에 과징금을 물리지 않은 이유를 따져 묻는 과정에서 나온 답변이었다. 금융실명법은 차명계좌에 차등과세와 함께 과징금을 부과하도록 돼 있으나, 금융위는 지난 10년 동안 이 회장에게 단 한 푼의 과징금도 물리지 않았다.

과징금 집행 제대로 했다면 최대 1조원

3월5일 금융감독원의 이 회장 차명계좌 조사 결과 발표를 계기로 최 위원장의 ‘책임’ 발언이 주목받고 있다. 무려 2조원이 넘는 차명계좌를 보유한 이 회장에게 물릴 수 있는 과징금(차명계좌 자산총액의 50%)이 고작 30억원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금융 당국의 직무유기 논란이 불거진 탓이다. 만약 금융 당국이 2008년 삼성 특검 이후 이 회장에 대한 과징금 집행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최대 1조원 가까운 과징금을 추징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 금융계에서 나온다.

이 지적의 타당성은 금감원 조사 결과에 대한 금융위의 후속 조처로도 뒷받침된다. 금융위는 같은 날 금감원 발표 직후 “금융실명제 실시(1993년 8월12일) 이후 개설된 탈법 목적의 차명계좌에 대해서도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금감원 조사 결과, 이 회장의 차명계좌는 금융실명제 실시 이전에 27개가 만들어졌고 나머지 1200여 계좌는 그 이후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현행 금융실명법은 실명제 실시 뒤 만들어진 차명계좌에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이 없다. 이로 인해 이 회장이 거액의 과징금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게 금융위의 판단이다.

만약 10년 전인 삼성 특검 직후 금융위가 금융실명제 개선에 나섰다면 이 회장의 차명계좌에 상당한 규모의 과징금을 물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날 원승연 금감원 부원장이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회장 차명계좌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고개를 숙인 것은 이를 의식한 것이다.

실제 금융위는 선제적 대응은커녕 ‘이 회장 감싸기’로 일관했다.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 때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첫 문제제기부터 2월12일 법제처의 유권해석이 나오기 직전까지 금융위는 이 회장의 차명계좌가 과징금 대상이 아니라고 우겼다. 참다못한 박 의원이 “금융 당국은 왜 삼성 앞에만 서면 작아지느냐”고 질타하자, 최종구 위원장이 “그런 지적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며 불쾌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금융위의 이 회장 감싸기는 삼성 특검 수사 때 도드라졌다. 2008년 4월17일 조준웅 삼성 특검이 이 회장의 차명재산 규모를 밝혀낸 수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보다 엿새 앞선 4월11일 금융위가 다른 사건에서 차명계좌는 실명 전환 대상이 아니라는 취지의 유권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마치 이 회장의 차명계좌 보유 사실이 특검 수사로 공개될 것을 미리 내다본 것처럼 말이다. 돈 주인이 누구든 상관없이 계좌를 만든 사람이 주민등록증으로 본인 확인을 거쳤다면 실명 전환 대상이 아니라는 기묘한 유권해석 덕분에, 이 회장은 임직원 명의의 차명계좌에 들어 있던 2조원을 실명 전환 과정 없이 몽땅 인출해갔다. 만약 차명계좌를 자기 명의로 바꾸는 과정을 거쳤다면 이 회장은 거액의 세금이나 과징금을 냈어야 한다.

삼성 특검 수사 때도 ‘이 회장 감싸기’

금감원 조사 결과는, 2008년 조준웅 삼성 특검의 수사 결과도 엉터리였음을 드러냈다. 삼성 특검은 당시 “4조원(차명계좌에 보관된 돈은 2조원)이 넘는 이 회장의 차명재산은 고 이병철 선대 회장이 물려준 상속재산”이라고 결론 냈다. 삼성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상속재산이 아니라 회삿돈을 빼돌려 조성한 비자금일 가능성이 크다”고 제보했지만, 특검은 김 변호사의 제보를 무시하고 삼성 쪽의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금감원 조사 결과, 삼성 특검이 찾아낸 이건희 회장의 차명계좌 대다수는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1993년 8월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이병철 선대 회장이 1987년 타계했음을 고려하면 차명계좌의 돈이 상속재산이라는 해명은 쉽게 납득이 안 된다. 차명계좌는 2004년 153개가 만들어져 가장 많고, 특검 수사 착수 1년 전인 2006년에도 무려 104개나 새로 개설됐다. 이는 이 회장의 차명계좌에 있는 돈이 회삿돈을 빼돌린 비자금일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게 한다.

만약 상속재산이 맞다면 이병철 선대 회장이 타계한 이후 이건희 회장이 이 돈을 어떤 형태로 어디에 보관했는지 의문이 남는다. 선대 회장 타계 이후부터 금융실명제 시행까지 6년 동안 만들어진 차명계좌는 고작 27개였고, 총잔액은 실명제 시행일 기준으로 61억8천만원에 불과했다. 금융실명제 이후 조성된 1200여 차명계좌의 2조원 넘는 돈을 그동안 어떻게 보관했는지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삼성 특검은 이런 의문점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상속재산으로 결론 낸 뒤 이 회장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무혐의 처리했다.

“금융위 엉터리 유권해석 검찰 수사해야”

삼성 특검 부실 수사 논란은 공교롭게도 조준웅 삼성 특검의 아들이 2010년 삼성전자 과장으로 특채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더욱 커졌다. 조 특검의 아들은 당시 삼성전자 중국법인에 과장으로 특채됐는데, 입사지원서를 접수 기간이 끝난 뒤에 삼성 쪽의 요구로 제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특혜 의혹이 제기됐다. 조 특검은 당시 언론들의 취재에 “내가 해명할 일이 아니다. 삼성에 물어보라”며 응하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에 대한 ‘쥐꼬리 과징금’은 금융 당국의 직무유기 탓이지만 “책임질 일 있으면 책임지겠다”던 금융위는 아직 조용하다. 금융위 안에서는 ‘결과적으로 과징금 부과 근거를 찾아냈으니 책임을 다한 게 아니냐’는 반응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용진 의원실 관계자는 “금융위의 엉터리 유권해석이 왜 나왔는지 검찰 수사로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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