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체다. 새로운 랜드마크나 ‘핫 플레이스’가 생기는 반면 낙후된 공간이나 지역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낙후된 공간이나 지역을 방치해 두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새쓰임을 찾거나 재생을 원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난 9월 4일,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스페이스 류에서는 이런 주제를 놓고 다양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지역을 바꾸는 도시의 로빈후드들’이 등장한 덕분이었다. 서울시와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이 열고 위즈돔과 적정기업 ep coop이 주관하는 사회적경제 콘서트 의 두 번째 시간. 성북신나협동조합(박동광 이사), BLANK(문승규 대표), 동네목수(박학룡 대표)가 각자의 지역에서 주민과 만나고 지역을 바꾸는 활동을 이야기했다.
이 자리에 함께한 시민들과 관심도 남달랐다. “공간이 달라지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는 어떻게 달라지는지”, “사람책 작가로서 지역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는지” 궁금한 시민들이 모였다. 뉴타운 등의 재개발 광풍이 지나간 자리, 도시나 지역재생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로빈후드들은 지역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주민들과 함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마을(동네)이 변화하고 더 나아가 사람이 변화하고 있었다. 낙후됐다는 이유로 방치하고만 있었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낡은 곳을 새로운 쓰임으로 재배치하는 것이 지역재생의 마술이다. 그러니 단지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은 재생이 아니다. 지역의 문화와 역사, 사람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로빈후드들이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지역이 가진 자원과 사람을 고려하고 이를 생활환경에 맞춰 재배치할 때 진정한 지역재생이 이뤄질 수 있다. 세련되고 멋진 건물이 들어서지 않아도 충분히 도시와 지역은 바뀔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사람이다. 지역에 애정을 두고 함께 사는 ‘우리의 삶’을 상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을 기록하고 기억하면서 시작하는 방법정릉의 낡고 오래된 아리랑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었던 ‘협동조합 성북신나(이하 성북신나)’의 활동은 눈물로 시작했었다. 다양한 활동을 하던 청년들이 모여 일단 상인부터 만났다. 쉬울 턱이 없었다. 집에서도 부모와 대화하기도 힘들던 청년들이 바깥이라고 다를까. ‘멘붕(멘탈 붕괴)’에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드라마. 그럼에도 부딪히고 또 부딪혔다. 지역을 바꾸는 시작은 사람부터니까. 막걸리는 좋은 매개였다.
“그렇게 만나 이야기하다보니, 한 사람 한 사람이 돈 밖에 모르는 장사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사람들을 만난 뒤 지도 작업(매핑)을 했다. 아리랑이라는 매거진도 만들고. 시장이 이야기 가득한 곳임을 알게 됐다. 프로젝트를 계속 했다. 야시장도 하고 공원에서 벼룩시장도 열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니 역시 많은 일화가 만들어졌고, 실패도 겪었다. 직장인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의 아침 버전인 ‘아침 도깨비 식당’을 석 달 동안 열었으나, 낯설어했다. 물론 접었다고 그것이 실패는 아니었다.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지역의 현상과 상황을 알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고,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 박동광 이사의 설명이다. 상인, 주민, 청년 등 다양한 지역 주체들을 만나 지역에 많은 문제가 있고, 해결을 원하고 있음도 확인했다.
박 이사가 지역재생을 고민한 것은 2012년이었다. 지식공유 콘퍼런스로 알려진 ‘테드 엑스’가 2012년 올해의 연사로 꼽은 것은 인물이 아닌 ‘시티 2.0’이라는 아이템이었다. 즉, 도시를 재구성하는 아이디어였다. 한국의 흐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부는 도시재생특별위원회를 출범했고, 서울시도 도시재생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성북구도 ‘성북동 역사문화지구’를 서울 대표브랜드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재개발에서 재생으로 넘어가는 흐름이 보였다.
조합원들의 문화예술 활동을 기반으로 한 성북신나는 지역재생을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에서 접근하기로 했다. 그래서 내세운 것이 “기록하고, 기억하자. 여기에, 이 일에 사람들을 초대하자”. 의 배경이자 소설가 박경리가 살았던 정릉동을 기반으로 활동하기로 했다. 한옥이 예뻤다. 그러나 빌라가 들어섰다. 한옥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고 활동하며, 사람들을 초대해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을 미션을 삼았다.
그리고 발품을 팔아 성북을 헤집고 다니고 있다. 지역자원조사를 통해 연구/출판 사업을 하고 지역을 기록하는 미디어 작업을 한다. 또 함께 할 청년들을 위해 교육하고, 전통시장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우리는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기록하고 기억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지금 8명의 조합원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것을 함께할 동료들을 계속 찾고 있다. 지역의 일거리를 청년의 일자리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주민의 필요를 모아 실행에 옮기다‘우리동네. 생활공간, 되살림’이라는 미션을 가진 BLANK는 동작구 상도동(성대골)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비어있거나 버려진 공간을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의미를 품고 ‘BLANK’라는 이름을 지었다. 문승규 대표가 이곳에 온 것은 3년 전이었다. 당시만 해도 도시를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살기 좋은 마을만들기’라는 서울시 공모전에 수상한 것이 상도동으로 온 계기였다. 공모전 응모를 위해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버려진 공간이 많았다. 쓰레기는 널려 있었고, 막다른 골목에 폐허로 된 집이나 개발하다가 중단된 흉물도 문제를 발생시키곤 했다. ‘깨진 유리창 이론’이 연상되는 곳이었다. 즉, 유리창이 깨진 지역의 범죄율이 높아진다는 이론이었다.
문 대표는 이런 공간을 어떻게 사람이 사는 곳으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지역을 훑었다. 특징을 발견했다. 주부들 중심으로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었다. 자발적으로 세운 어린이도서관도 있고, 마을학교도 있었다. 이런 마을 자원을 활용해서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과는 공모전 금상. 만나고 기록하고 고민한 결과였다.
주민이자 청년으로서 마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자 BLANK를 만들어 마을에 편입했다. 주민들을 만나 필요한 것을 들었다. 설문조사도 했다. 다양한 주제의 워크숍도 빠지지 않았다. 문제를 발굴했다. 마을에 대한 비전을 수립하고 제안을 했다. 그러면서도 늘 경계하는 지점이 있었다. 주민을 대상화하지 말 것. 주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작은 단위에서도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리를 거듭했다.
문 대표는 동네를 활기차게 만들고 싶었다. 우선 “집에서 어떤 생활을 하시나요?”라고 물었다. 어느 순간부터 잠만 자는 공간이 된 집으로 인해 삶도 피폐해지고 관계가 소원해지고 소통도 없어졌다. 생활공간을 공유하면서 다양한 관계를 발생할 수 있는 지점을 함께 찾았다. “동네에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원하는 주민들과 함께 에너지를 생산하고 적재할 수 있는 이동형 ‘에너지 차’를 만들었다. 트럭 하나가 다양한 이벤트를 발생시키며 주민들을 묶는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축제를 열었다. 마을에 재미난 일이 하나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났다.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다. 마을에 허름한 공간이 하나 있었는데, 이를 공유 공간으로 활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허름한 공간에서 많은 일이 벌어졌다. 그러면서 ‘동네에 함께 밥을 먹을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는 요구가 나왔다. 나눔부엌을 만들자며 주민들과 함께 ‘청춘플랫폼’이라는 공간을 만들었다. 지난해 10월 문을 열고 일주일에 한 번 함께 밥 먹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공간 대여도 하고,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들었다.”
비어있던 공간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문턱을 없애고자 여러 실험을 하고 있다. 다양한 취미 모임도 하면서 주민 스스로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실패도 있었다. 버려진 채소가게를 살리고자 했으나 불법으로 시공된 건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작업을 어떻게 지역과 공유할 것인지를 좀 더 진중한 고민을 하게 됐다.
“결과물을 만드는 것에 급급하지 않고 지역 활동, 연구, 설계 등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가치를 공유하는 조직을 만들면서 지역재생을 확산할지 고민하고 있다. 최근 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건축, 도시, 주거 등을 주민들과 공유했다. 지역재생과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계속 펼칠 계획이다.”
다섯이 모이면 골목이 바뀐다!살 만하면서도 세입자들이 밀려나지 않는 방향의 지역재생을 추진하는 마을기업도 있다. 장수마을에 위치한 ‘동네목수’다. 박학룡 대표가 말하는 살 만한 동네는 이렇다. “재개발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마을을 살리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어야 한다.”
장수마을은 재개발 예정구역으로 10년 동안 묶여 있었다. 수많은 투자자들이 들락날락 거렸다. 때문에 마을은 엉망진창이 됐다.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낡은 집을 고치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른바 ‘빈집 리모델링’ 프로젝트. 살 만 한 집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집주인에게 집을 고쳐보겠다며 공사를 했다. 첫 번째 그렇게 고친 집에는 자신들이 입주했다. 주민사랑방으로도 활용했다.
엉망진창이 됐던 마을은 동네목수의 노력으로 조금씩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집이 살아나자 사람이 살아났다. 카페도 생겨났다. 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겨우내 공사를 함께 하면서 카페를 완성했다.
동네목수의 미션은 간단하다. 동네가 좋아져야 한다! 부동산 값으로 환산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살고 있는 주민들이 정붙여 살 만 한 동네. 그리고 함께 부대끼고 지지고 볶는 동네.
“동네에 다양한 계층이 함께 어우러져야 좋다. 부자도 불편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도 부끄럽지 않은 동네가 좋은 동네라고 생각한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함께 막걸리 마시면서 잔 부딪히는 사이여야 한다. 그래야 차이를 이해하고 공존이 가능하지 않겠나.”
빈집을 우선 고쳤던 동네목수는 사람이 사는 집도 고치자고 나섰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집을 고칠 동안, 살던 사람들이 머물 곳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순환임대주택.
“주거안정과 주택개량활성화를 기치로 집을 고치는 환경을 만들어야 우리도 돈 좀 벌지 않겠나. (웃음) 만약 집을 고쳤는데, 주인이 돈을 낼 수 없다면, 잔금 받을 것을 보증금으로 돌려 이를 재임대를 하는 순환임대로 활용했다. 그러다 옆집에서 고쳐놓은 상태가 마음에 든다며, 세를 달라고 하면 바통 터치하고 고쳐주고. 그분의 보증금으로 공사잔금 받고. 자연스러운 순환이 일어났다.”
이어 동네목수가 주목한 것은 커뮤니티 공간이었다. 그때 생각한 것이 골목평상. 평상은 이내 골목의 지배자가 됐다. 평상에 앉아 골목에서 영화도 보고 골목은 커뮤니티 공간으로 거듭났다. 박학룡 대표가 ‘스트리트 퍼니처’라고 부르는 이것 덕분에 6개의 골목거점이 생겼다. 평상과 골목은 지역을 살리는 거점이 됐다. 주민들에게 익숙하고 편한 장소가 됐고, 언제든 모이자고 하면 쉽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됐다. 골목마다 통신원들을 둬서 주민협의회 운영위원을 하고 있다.
“골목길 공유공간 실험도 했다. ‘다섯이 모이면 골목이 바뀐다’는 것이 우리 구호인데, 골목에서 무엇이든 하고 싶으면 다섯 명 동의를 받아오라고 유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마을 입구 계단 난간 보수 등을 했다. 시간은 3개월이 걸렸지만 주민들이 무척 좋아한다.”
이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한 것은 일본 요코하마의 ‘코토부키쵸’였다. 인구 6500명의 마을. 이곳은 과거 ‘쪽방촌’ 같은 곳이었다. 대부분 저소득 계층에 고령자였으며, 절반 이상은 생활보호대상자들이었다. 대부분 먹고 사는 문제에 쫓겨 정치적인 이슈에도 무관심했고,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슬럼화 된 낡고 구린 지역이었다.
그랬던 곳이 지역재생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적기업 코토랩의 활동 덕분에 바뀌기 시작했다. 코토랩은 우선 ‘거리 바꾸기 사업‘을 추진했고, 빈방을 리디자인한 ‘요코하마 호텔 빌리지’사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건물주와 협약을 맺고 주민들과 연대해 빈방을 배낭 여행객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제공했다. 젊은 여행객들이 몰려들었고 고토부키쵸는 옷을 갈아입었다. 지역경제도 서서히 살아났다. 이곳에서도 ‘1평 평상 프로젝트’가 빛을 발했다. 마을 곳곳에 작은 평상을 둬 주민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끔 했다. 쇠락한 마을이 시끌시끌해졌다.
하나의 작은 사회적기업이 일군 변화였다. 공익과 사업의 결합. 수익창출은 물론 지역과 사람을 되살린 사례였다. 코토랩이 없었다면 코토부키쵸는 살아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민들이 함께 협력했기에 가능했던 무엇. 서울의 로빈후드들이 만들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마을을 재생하는 일은 그저 환경을 정비하고 정화시키는 것만 가리키지 않는다. 삶과 사람을 함께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것이 다시 마을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
글. 김이준수(노동자협동조합 적정기업 ep coop)사진. 이우기(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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