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아무 조건을 따지지 않고 현금으로 지급하는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이제 우리에게도 아주 낯선 존재가 아니다(제1000호 표지이야기 참조). 기본소득이 신자유주의의 위기 및 생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적절한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노력 덕택이기도 하다. 전세계 기본소득 지지자들을 묶는 국제조직이 바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로, 2년마다 총회를 연다. 열다섯 번째 총회는 지난 6월27일부터 29일까지 캐나다 몬트리올의 맥길대학에서 열렸다.
‘경제의 재민주화’ 슬로건 내걸고‘경제의 재민주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열린 올해 총회에는 100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기본소득의 재원’ ‘기본소득에 대한 법적 보장’ ‘기본소득과 민주주의’ ‘기본소득과 경제적 참여’ ‘기본소득과 고용’ ‘기본소득과 이민’ ‘기본소득에 관한 젠더적 관점’ 등 다양한 주제로 발표와 토론을 벌였다. 이와 별도로 한국·일본·북미에서 기본소득 논의를 각각 다루는 특별 세션이 마련됐다.
경제의 재민주화란 단어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적 권리의 인정과 확대 속에 형성된 복지국가가 신자유주의의 움직임 속에 약화돼온 흐름을 다시 반전시킨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다고 과거의 복지국가로 회귀하거나 복지국가를 재건하자는 뜻은 아니다. 경제 호황과 대중 소비, 완전고용과 강력한 노동조합을 배경으로 등장한 복지국가를 오늘날 재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복지국가는 시혜적 성격과 관료적 운영이라는 나름의 문제를 지니고 있다. 또한 복지국가나 민주화된 경제를 경험하지 못한 남반구 나라들의 경우 ‘재’민주화는 어불성설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이번 총회에서 특히 눈길을 끌었던 무대는 인도의 자영여성협회(SEWA)를 대표하는 레나나 자브발라와 의 저자로 잘 알려진 가이 스탠딩 교수가 발표한 라운드테이블인 ‘인도의 기본소득 실험: 전환을 향하여?’였다. 스탠딩 교수는 2010∼2013년 유니세프의 기금으로 SEWA와 함께 인도 마디아프라데시의 마을 9곳에서 기본소득 실험을 진행했다. 이 실험의 목적은 성인 남성과 여성, 어린이를 포함해 6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성인 200~300루피(약 3400~5100원), 어린이 100~150루피(약 1700~2550원)의 현금을 매달 지급한 뒤 어떤 효과가 나오는지를 보려는 것이었다. 스탠딩 교수와 자브발라에 따르면, 실험 결과 전반적으로 주민들의 영양과 건강 상태가 개선됐고, 학교 출석률과 학습 능력이 높아졌으며, 경제활동 증가, 부채 감소 및 저축 증대 등의 효과가 나타났다. 특히 장애인이 이 프로그램에서 큰 혜택을 받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제활동 증가인데, 현금 지급이 개인들의 능동성과 자발성을 끌어낸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 점이 전통적인 빈곤 퇴치 프로그램과 기본소득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시민발의’ 28만5천 명 동참인도 사례가 일종의 실험이었다면,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 발의와 ‘유럽시민발의’(European Citizens Initiative)의 기본소득운동은 기본소득을 현실화하기 위해 진행 중인 운동이다. 이에 대해서는 ‘의제에 오른 기본소득: 시민 발의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의 라운드테이블에서 스위스의 에노 슈미트와 프랑스의 스타니슬라스 주르당이 발표를 했다. 슈미트는 기본소득에 관한 영화인 의 감독으로도 유명한 스위스 기본소득 운동가이며, 주르당은 프랑스의 언론인이자 기본소득 유럽시민발의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활동가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스위스에서는 지난해 10월 12만6천 명이 기본소득 발의안에 서명함으로써 일정 시간이 흐른 뒤 국민투표에 부쳐질 것이다. 기본소득 유럽시민발의는 2012년 4월에 시작된 것으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를 상대로 한 제안 형식으로 회원국들이 입법을 하도록 압력을 넣는 일종의 청원운동이다. 슈미트는 기본소득이 개인들이 생계의 부담에서 벗어나 각자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세기의 비전이라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기본소득은 인권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다. 국민투표 전망과 관련해서는, 설령 통과되지 못하더라도 기본소득이라는 의제를 환기하고 확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결과와 상관없이 성공적일 수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유럽시민발의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1월에 끝난 서명운동 결과, 유럽 전역에서 28만5천 명이 서명했다. 이는 원래 목표인 100만 명에는 크게 못 미치는 수치지만, 서명 과정에서 미디어로부터 집중 조명을 받고 노동조합 같은 기존 조직의 참여를 이끌어냄으로써 기본소득에 관한 관심을 확산시켰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이라고 주르당은 말했다.
특히 국내 기본소득운동과 관련해 올해 행사가 갖는 의미는 컸다. 총회의 마지막 행사는 임원 선출, 차기 총회지 결정 등을 다루는 전체회의(General Assembly)다. 이번 몬트리올 총회에서는 차기 총회지 결정 문제가 뜨거운 관심사였다. 지금까지 열다섯 차례의 총회 개최지는 모두 경쟁 없이 결정된 반면, 이번에는 한국을 비롯해 핀란드와 네덜란드가 개최지 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세 나라 모두 나름의 신청 이유가 있었다. 북유럽의 복지국가인 핀란드는 기본소득이 기존 복지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네덜란드는 유럽시민발의운동의 맥락에서 국내 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총회를 유치하려 했다. 한국 또한 기본소득 총회를 계기로 대중적 관심을 확산시킬 뿐만 아니라 새로운 좌파정치를 구성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여기에 더해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가 최초로 아시아에서 열린다는 점도 집중 부각했다.
서울, 차기 총회 개최 도시로약간의 갑론을박이 있긴 했으나, 한국이 가장 많이 준비했고 기본소득운동을 확산시키겠다는 열의가 높다는 점을 인정한 네덜란드와 핀란드의 두 나라 대표가 양보를 함으로써 서울이 차기 총회 개최 도시로 결정됐다. 이로써 한국 기본소득운동은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열리게 됐다. 역사적으로 국제연대운동은 언제나 ‘총회’를 통해 전진과 확산을 경험해왔으며, 총회 개최지는 이런 계기를 뒷받침하고 또 이를 통해 새로운 활력을 얻어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본소득운동 지지자들은 기본소득이 사회적 전환과 생태적 전환의 주요한 매개라고 보고 있으며, 이를 이론적·정치적으로 구성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2016년 서울 총회는 이런 노력을 확인하는 자리이자 기본소득의 대중적 확산을 위한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다.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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