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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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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보다 더 급진적인!

자본론과 비교해본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 주류 경제학 틀 고수하지만

데이터를 통해 도출한 결과의 불평등 지적은 더욱 강력해
등록 2014-07-09 17:02 수정 2020-05-03 04:27

자본주의 경제의 불평등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즉각 카를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보수주의자들이 토마 피케티에게서 마르크스의 유령을 찾아내는 것도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다. 정작 피케티 자신은 언론 인터뷰에서 은 짧고도 강렬한 작품이지만 은 다 읽어보려 하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책 제목에 굳이 정관사까지 붙인 ‘자본’(Le Capital)을 썼을 때 그의 머릿속엔 이 어떤 식으로든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책의 주요 개념이나 장별 소제목에는 마르크스를 떠올리게 하는 (주류 경제학자라면 결코 입에 올리지도 않을) ‘자본주의의 기본법칙’, ‘자본의 형태변화’(Metamorphoses), ‘자본주의의 모순’ 등의 용어가 널려 있다. 그렇다면 피케티는 과연 21세기 마르크스의 귀환일까?

21세기 마르크스의 귀환?

마르크스는 이윤율 저하 경향이 정치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이라고 말했다.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자본을 더 많이 사용하고 노동은 상대적으로 덜 쓰는 기술이 도입될 수밖에 없는데(자동화를 생각해보라!), 그 결과 경제 전체의 이윤율은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제라르 뒤메닐 등 후대의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은 이윤율이 자본생산성과 자본소득분배율의 곱과 같다는 공식에서 출발한다. 즉, 이윤율=자본생산성×자본소득분배율. 자본생산성은 자본 한 단위당 얼마만큼의 부가가치가 생산됐는가를 나타낸다. 기계 10대를 사용하는 공장에서 10억원의 부가가치가 생산됐다고 치자. 자본생산성은 기계 1대당 1억원이다. 이때 자본소득분배율이 30%라면, 자본 소유자는 3억원을 이윤으로 가져간다. 기계 1대 가격이 3억원이라면 자본 전체의 가격은 30억원이므로 이윤율은 10%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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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첫 번째 기본법칙’은 바로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피케티의 공식 ‘α=r×β’를 마르크스 버전으로 바꿔 쓰면‘ r=(1/β)×α’가 된다. 자본을 더 많이 사용하고 노동을 절약하는 기술 진보에 따라 자본생산성은 떨어지며(즉, 1/β의 하락) 자본은 노동을 더 착취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는데(즉, α의 상승), 만약 후자의 효과가 전자의 효과를 압도하지 못한다면 이윤율은 하락한다.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을 실제 이윤율이 계속해서 떨어진다는 예단으로 받아들이는 마르크스 경제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마르크스 법칙의 핵심은 1/β과 α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윤율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데 있다.

피케티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두 번째 기본법칙’, 즉 ‘β=s/g’에 해당하는 마르크스의 공식은 없다. 그런데 에서 피케티는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을 다루면서 마르크스가 지속적인 기술 진보를 통해 생산성이 꾸준히 증가할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했다고 주장한다. 성장이 정체되면서 분모(g)가 계속 작아지다가 결국 0이 되면 분수 전체의 값 β는 무한대로 커지게 되는데, 이것이 마르크스가 그린 자본주의의 모습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피케티가 읽었을 의 몇 구절만 살펴봐도 이러한 해석은 지나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모든 견고한 것이 녹아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역동성을 당혹스러울 정도로 강조했기 때문이다.

부자가 얼마나 더 가져가는가가 중요

마르크스(엄밀하게는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이라고 지적한 것은 ‘점점 증가하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사이의 대립’이다. 거대한 재벌 기업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생산에 관련된 이해관계자는 점점 늘어나는데,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은 분산되지 않고 총수를 비롯한 몇 사람에게 집중된다. 사유재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케티는 자본수익률이 성장률보다 높다는 것(r>g)을 ‘자본주의의 중심적 모순’이라 부른다.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법칙을 r가 실제 떨어지는 것으로 해석했다면, 자신이 말하는 ‘r>g’가 더 일반적인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모순’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얘기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일단 한국 경제의 데이터를 이용해 마르크스 비율을 추계해보면 과 같다.

먼저 자본생산성은 지속적인 하락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윤율의 경우 꾸준히 하락하는 추세였으나 외환위기 이후 반등해 비록 고도성장기의 10%대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7~8% 수준까지는 회복됐다.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자본생산성과 이윤율이 동반 하락하던 패턴이 변한 것이다. 자영업자의 소득을 보정해 추계한 자본소득분배율의 추이로부터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짐작해볼 수 있다. 즉, 외환위기 이후 자본생산성은 계속 하락했지만 자본소득분배율이 상승함으로써 이윤율 저하를 막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자본생산성의 역수는 β에 대응되며 자본소득분배율은 α이므로 에 나타난 추이를 피케티식으로 표현하면 α와 β가 함께 상승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피케티와 마르크스는 결국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피케티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모든 자산, 예를 들어 주거용 부동산은 물론이려니와 특허나 금융자산(주식 등)까지 모두 자본에 포함시킨다. 즉, 자본이 아니라 재산에 가깝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솔로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자인 데이비드 하비에 이르기까지 좌우를 막론하고 이러한 개념상의 ‘혼란’을 지적한다. 피케티가 α와 β의 동반 상승에서 논리적 근거로 내세우는 대체탄력성도 생산에 사용되는 자본과 노동의 대체를 말하는 것이지, 재산과 노동의 대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참고로 의 마르크스 비율을 추계할 때는 전통적 의미의 민간 실물자본만을 이용했다.) 한국에서 피케티의 자본수익률이 3~4%대인 반면, 마르크스적 이윤율은 그 두 배 가까이 되는 것도 이런 자본 개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피케티는 마르크스가 자본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까지 그 범주에 포함시키기 때문에 분모가 커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분수 전체의 값인 이윤율은 작아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이윤율은 떨어지면서도 피케티의 자본수익률은 떨어지지 않는 상황은 논리적으로는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피케티는 왜 이렇게 특이한 자본 개념을 사용했을까? 그가 관심을 갖고 증명해 보이려 한 것은 생산요소의 기능(즉, 자본이냐 노동이냐)에 따라 얼마만큼 분배받는가라는 문제보다, 오히려 인적 분배, 쉽게 말해 부자가 얼마나 더 가져가는가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부자들이 자본소득으로 벌어들인 것인지 노동소득으로 벌어들인 것인지, 심지어 부동산 투기나 주가 상승으로 벌어들인 것인지에 상관없이 그 온갖 것을 다 합친 재산이 얼마이냐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들이 갖는 위력을 설명해준다. 분배의 불평등, 권력의 불평등은 원래 그러한 것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생산과정 안에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 설령 오랫동안 땀 흘려 번 돈을 모은 그 누군가가 자본가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의미의 착취는 지속적으로 발생하며 확대된다는 점을 보이고자 했다. 물론 제1권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탄생 자체가 피로 얼룩진 수탈의 역사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걸 잊지 않는다. 피케티는 능력주의(Meritocracy) 원칙이 관철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임을 강조한다. 마르크스는 능력주의 원칙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피케티보다 훨씬 더 원대한 이론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피케티 자신이 자랑하듯 마르크스는 다룰 수 없었던 장기 데이터를 이용해 현실적으로 재산의 위력이 어떻게 발휘되는가를 이론적으로 입증한다는 점에서 피케티는 결과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오히려 마르크스보다 더 강력한 비판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틀 안의 도구로 틀 너머의 질문을 던지다

어쨌거나 한국 경제에서는 피케티 비율과 마르크스 비율이 동일한 추세를 나타내는 것이니만큼 결국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아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관점에서는 자본소득분배율의 증가, 즉 자본이 노동보다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은 대체탄력성이라는 기술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자본-노동의 교섭력 격차, 과격하게 말하자면 계급투쟁 때문이다.

물론 교섭력의 변화나 계급투쟁을 정량적 데이터로 면밀하게 설명해내기는 쉽지 않다. 피케티는 매우 신중하게도 주류 경제학의 생산함수, 그리고 그에 기초한 대체탄력성이라는 개념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틀 자체를 뛰어넘기를 암시하는 말은 의 곳곳에서 찾아낼 수 있다. 인적 자본은 자본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금융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받는 천문학적 규모의 보수가 과연 그들의 엄청난 기여 탓인지를 냉소적으로 묻는 대목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피케티는 말한다. “자본의 소유자가 새로운 일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음에도 이 한계생산물을 그들의 자본 소유에 대한 지불로서 받는 것이 정당한가?” 누구나 자본이건 노동이건 생산요소를 갖고 있으며, 그 요소가 생산에 얼마나 기여하는가에 따라 보수가 결정된다는 주장이 한계생산력설이다. 자본과 노동이 서로 대체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한계생산력, 따라서 자본과 노동에 대한 보수가 순수하게 기술적으로 결정된다는 이론은 경제학 교과서의 ‘분배이론’ 항목의 중요한(어쩌면 유일한) 내용일 뿐만 아니라 체제 유지를 위한 핵심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건드리기 시작할 때, 단지 경제학 차원을 넘어 체제 그 자체의 근본 토대에 대한 회의가 시작된다. 피케티는 곧바로 덧붙인다. “이것은 분명히 결정적인 질문이지만, 나는 여기에서 그것을 묻지 않는다.”

대체탄력성, 그 이후의 도약은?

그렇다면 피케티는 판도라의 상자 앞에서 멈춰선 것일까? 피케티의 분석 전체가 대체탄력성이 매우 높다는 가정하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개념의 자기한계를 내재적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대체탄력성 개념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점, 그 한계상황에서 어떤 새로운 개념을 발판으로 삼아 도약할 것인가? 마르크스 경제학이라면 당연히 계급투쟁일 터이고, 마르크스 자신의 말을 패러디하자면 “여기가 로도스섬이다. 뛰어라!”가 될 것이다.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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