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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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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업계 부흥, 정부 재정 파탄

민간서 공공시설 지으면 정부가 임차료·운영비 주는 BTL…
재정 파탄 그림자에도 박근혜 정부 확대 방침에 건설업계 들떠
등록 2013-10-16 06:26 수정 2020-05-02 19:27
2005년부터 초·중·고교가 BTL 방식으로 우후죽순으로 신설됐다. BTL 방식으로 2010년 개축 공사한 서울 도봉구 쌍문초등학교 모습.

2005년부터 초·중·고교가 BTL 방식으로 우후죽순으로 신설됐다. BTL 방식으로 2010년 개축 공사한 서울 도봉구 쌍문초등학교 모습.

당신은 낡은 집을 고치고 싶다. 당장 목돈은 없지만 방법이 있다. 신용카드를 긁어 먼저 리모델링하고 20년간 비용을 나눠내면 된다. 다만 당신 돈으로 직접 고칠 때보다 카드로 할부하면 비용이 2배 늘어난다. 어떻게 하겠는가. 망설여진다면 한 가지 더 알려주겠다. 카드 할부금을 당신이 20년간 전부 내지 않는다. 몇 년 뒤 당신이 떠나고 나머지는 후임자가 떠안을 것이다. 당신 입장에서만 보면, 목돈을 들여 집을 고치는 것보다 몇 년간 카드 할부금만 부담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 선택이 한결 쉬워졌는가. 이제 마지막 조건을 공개하겠다. 카드빚을 엉겁결에 떠안을 후임자는 바로 당신 아들딸이다.

기관장이 치적 세우려 BTL 사업 남발

도로·철도·항만 등을 민자투자사업으로 섣불리 세웠다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수조원을 되레 떼였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다. 수익형 민간투자사업(BTO)이다. 인천공항고속도로,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 등이 그랬다. 엉터리 교통수요 예측과 정부의 과도한 운영수입 보장에 따른 운영보조금 지급이 주요 원인이다.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재앙’이 또 있다. 임대형 민간투자사업(BTL)이다.

BTL은 민간에서 공공시설을 지으면 정부가 일정 기간 임차료와 운영비를 지급해 공사비를 보전해주는 방식이다. 문제는 2배 가까운 수익을 보장한다는 점이다. ‘고금리 카드할부 구매’인 셈이다. 하지만 당장 돈이 빠져나가지 않기 때문에 치적을 세우고 싶은 무책임한 기관장들이 BTL 사업을 긁어댄다. 일반 가정이라면 그 할부금을 자신이 지불해야 하니까 그래도 제동이 걸리게 돼 있다. 하지만 정부 기관장들은 생색은 실컷 내지만 카드 지불 고지서는 대부분 임기가 끝나고 날아든다. 빚잔치가 뻔히 눈앞에 보이는데도 불나방처럼 BTL 사업에 뛰어드는 이유다. 운영수입이 따로 나오지 않는 학교, 하수관거, 군 숙소, 대학 기숙사 등이 2005년부터 이렇게 우후죽순으로 지어졌다.

이제 카드 지불 고지서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박주선 의원(무소속)이 요청해 국회예산정책처가 분석한 ‘민간투자사업 현황 및 향후 비용부담 조사분석’을 보면, BTL 사업으로 정부가 2007년부터 2045년까지 51조3380억원(부가가치세 제외)을 지출할 것으로 추계됐다. 특히 내년부터 2029년까지 매년 2조원 이상이 빠져나간다. 시도별로 따져보면, 경기도와 충청남도가 약 4천억원을, 서울시가 1천억원을 매년 토해내야 할 처지다.

주범은 초·중·고교 신설이다. BTL 사업 정부지급금의 30%(15조4천억원)를 차지한다. 특히 경기도에선 93%가 신설 학교 임대료와 운영비로 쓰인다. 경기도교육청은 BTL 사업으로 406개의 학교를 세웠거나 공사하고 있다. 사업 초기인 2005~2008년에는 연평균 50개교가 넘었지만 2009년(39개교)부터 많이 감소해 지난해에는 2개교만 BTL 사업 승인을 받았다. 올해와 내년에는 신설 사업이 아예 없다. BTL 학교 설립이 7년 만에 중단한 것은 재정 부담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환경부, BTL 사업으로 13조5천억원 부담

경기도교육청은 초·중·고교 임대료로 지난해 2740억원을 냈고 올해는 2975억원을 내야 한다. 이러한 오름세는 13년 뒤인 2026년에야 꺾인다. 경기도교육청 관계자의 말이다. “신도시 학교 시설이 많이 필요했는데 교육부가 BTL 사업을 권장했다. 하지만 이제 정책이 바뀌었다. 직접 재정을 투입하거나 공영택지개발지구의 신설 학교는 개발사업자가 무상 공급한다.” 하지만 이미 경기도교육청의 재정은 최악의 수준이 됐다. 2012년 말 기준으로 지방채 잔액이 6조원을 넘겼다. 경기도교육비특별회계 세입(11조원)의 절반을 웃돈다. 서울시교육청도 만만치 않다. 2005~2009년에 추진한 BTL 사업으로 민간투자 9384억원을 이끌어냈지만 20년간 2조4467억원(임대료 1조8497억원, 운영비 5970억원)을 뱉어내야 한다. 공정택 전 교육감이 2008년 재선을 앞두고 마구잡이로 끌어들인 민자 투자의 후폭풍이다. 박주선 의원은 “민간투자사업은 초기 건설비 부담은 적지만 중·장기적으로 정부의 부담을 오히려 증대한다. 사회공공성을 다루는 학교 등 사회기반시설의 건설과 운영은 민간이 아닌 국가와 지자체가 책임지는 게 맞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비리사건과 부실공사까지 드러났다. 지난 4월 검찰은 BTL 방식으로 학교를 전문적으로 짓는 건설업체의 영업부장 박아무개(46)씨를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2008년 6월부터 2011년 11월까지 경기도교육청에서 BTL 방식으로 발주한 57개 초·중등학교 신축 공사 현장에 책걸상 등 교구를 납품해주겠다며 하청업체에서 11억원을 받았다는 이유에서다. BTL 사업이 개발업자에게 광범위한 하도급 업체 선정 자율권을 준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건설업체는 ‘관행이어서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받았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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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시에서는 부실공사가 터졌다. 환경부는 2005년 10월 군산시 하수관거 정비를 BTL 사업으로 선정했다. 사업자가 708억원을 들여 2011년 6월 114km의 정비사업을 마쳤고 군산시는 매년 98억원을 임대료와 운영비로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민원이 끊이지 않아 뒤늦게 표본조사를 해보니, 공사한 오수정화조의 32%(1605곳)가 부실 시공으로 드러났다. 오물을 수거하지도 않은 채 흙을 덮거나 관료 연결이 잘못돼 새고 있었다. 게다가 하수관로의 74%(17곳)는 파손된 것으로 밝혀졌다. 군산시는 책임자를 문책하고 전북도는 도내 모든 시·군의 하수관거 정비사업을 점검하겠다고 나섰다. 환경부는 전국 92곳의 하수관거를 BTL 사업으로 정비해 13조5천억원(2008~2039년)을 부담한다.

경찰서·세무서 등 공공청사까지 대상 확대

재앙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는데도 박근혜 정부는 가속페달을 밟는다. 경찰서·세무서 등 공공청사까지 민간투자 대상을 확대하겠다고 나섰다. 현행법은 BTL이 가능한 시설을 학교, 하수관거, 군 숙소, 대학 기숙사 등으로 제한한다. 최근 기획재정부는 노후화된 경찰서·세무서 등이 민간투자 대상 시설에 포함될 수 있도록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 개정 작업을 마무리하고 이미 기정사실화했다. 10월 초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2014년도 BTL 한도액안’을 보면, 제주지방경찰청을 포함해 서울 용산·경북 의성·강원 정선 경찰서, 중앙경찰학교 생활관 및 다목적체육관 등 경찰청 시설 신·증축과, 서대문·동대문·대전 세무서 등 국세청 시설 신축에 대한 사업계획을 명시했다. 사업비는 경찰청 1359억원, 국세청 766억원으로 각각 책정됐다. 그 결과 BTL 총한도액이 4453억원으로 올해보다 20.6%(760억원) 늘었다. 기재부의 설명이다. “관공서가 낡아 유지·보수 비용이 많이 들어 신·증축을 해야 한다. 수요가 많은데 재정만 고집하면 공급이 늦어진다. 경기침체로 재정 여력도 한계에 다다랐다.”

그뿐 아니라 민간 제안도 허용하려 한다. BTL 사업은 민간투자의 선호도가 높아 남용을 우려한 정부가 그동안 민간 제안을 제한해왔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지난 7월 지역공약 이행계획을 밝히면서 BTL 사업도 민간이 제안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7월18일 기재부 주최로 공개토론회가 열렸다. 발제를 맡은 홍성필 한국개발연구원(KDI) 민자제도팀 전문위원은 “민간 제안은 민간의 창의와 효율을 발현할 수 있는 제도로서 정부가 이를 관리할 능력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건설업계는 “제2의 부흥기가 올 것”이라며 한껏 부풀었다. 도로나 철도 등 토목공사와 연관된 복합사업도 BTL 방식으로 추진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으면서 말이다. 건설업체 관계자가 말한다. “초·중·고교 신설과 하수관거 개·보수 사업 등이 주도하던 BTL 사업은 2006년부터 팽창해 2008년 정점을 찍었다. 2010년부터는 포화상태에 이르고 주무 관청도 재정난에 휩싸여 신규 사업이 자취를 감췄다. 내년에 지방선거도 있으니 사업 대상이 공공청사로 확대되고 민간 제안까지 허용되면 숨통이 트일 것이다.” 건설업계에는 부흥이, 정부 재정에는 파탄이 몰려오고 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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