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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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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모여사는 가장 근본적 이유

자본의 리스크를 노동자와 사회 전체에 전가하는 수단이 된 정리해고
애초 리스크 해소 위해 모여산 인류처럼 노동자의 리스크 자본 나눠져야
등록 2013-05-11 09:30 수정 2020-05-02 19:27

투자자에게 이윤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는 도덕적 근거로서 경제학자들이 주요하게 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리스크’다. 투자란 몇 배의 대박이 나올 수도, 깡그리 날리고 알거지가 될 수도 있는 불확실한 행위다. 투자자들은 이 불확실한 바다 속에 기꺼이 자기의 소중한 재산을 투척해 리스크를 감내한 이들이니 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경제의 소득분배 구조 안에 내장돼 있어야 하고, 그것이 이윤 혹은 이자라는 이론이다.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자동차지부 조합원들과 해고자,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4월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서 해고노동자들의 연이은 투신자살과 관련해 정부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자동차지부 조합원들과 해고자,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4월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서 해고노동자들의 연이은 투신자살과 관련해 정부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노동이 감내하는 ‘리스크’

중세 유럽의 학자들은 생명체의 기원에 관해 물에 젖은 셔츠를 구석에 처박아두면 쥐가 만들어진다는 ‘자연발생설’을 믿었다든가. 간덩이가 부으면 하늘에서 금덩어리가 쏟아지게 돼 있다는 말이 21세기 대명천지에 ‘과학’으로 통용된다는 것이 흥미롭지만, 이런 생각을 잠깐만 접고 보자. 그러면 이 논리가 적어도 정치·사회적 제도를 정당화하는 윤리로서는 중요한 설득력이 있음을 보게 된다. 기껏 위험한 투자를 했는데 그 보상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면 누가 자본가가 되려고 하겠는가. 따라서 이윤 및 이자에 지나친 과세를 하거나 상한을 정하는 등의 짓을 해서는 안 되고, 또 자본가들이 느끼는 리스크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여러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

질문은 여기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노동이 감내하는 리스크는 어떻게 되는가? 현대 경제학의 신줏단지인 생산 함수에서 노동과 자본은 아무런 차이가 없는 똑같은 생산 투입물이다. 자본 소유자가 ‘자본 서비스’를 제공하듯, 노동 소유자인 노동자 또한 ‘노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뿐이다. 자본가에게 투자가 잘못될 경우 재산을 깡그리 날릴 ‘리스크’가 있다면, 노동자는 괜히 직장을 잘못 택해 애먼 회사에다 소중한 자기 인생의 몇 년을 깡그리 부어넣었다가 실업자가 돼 인생을 위험하게 만들 리스크를 감내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전자는 위험에 처하는 것이 투자자 본인의 외적 존재인 재산이지만, 후자는 노동자 자신의 존재이니 리스크의 성격이 더욱 심각하다.

추상적인 경제이론 수준에서는 논의가 여기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 한쪽에서는 ‘별 생떼를 다 쓴다’고 짜증을 내며 외면할 것이며, 다른 쪽에서도 심정적으로 동조하지만 난생처음 들어보는 ‘노동의 리스크’라는 말을 어떤 식으로 소화해야 할지 난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논의를 한번 구체적인 제도의 차원으로 옮겨서 진행해보자. 바로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대표적 기업 조직 형태인 주식회사다.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들이다. 회사가 당해 운영을 잘해 각종 비용과 세금을 다 치르고 남은 돈이 있다면 이는 오롯이 주주들 것이다. 그게 100% 이윤, 아니 1천% 이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왜냐면 기업이 잘못돼 혹여 자본이라도 까먹을 정도가 되면 오롯이 피해를 보는 것도 그 회사에 자본금을 박아넣은 주주들이기 때문이다. 기업을 구성하는 이해 당사자는 주주들 말고도 경영진, 노동자, 지역사회, 정부 등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기업의 이윤은 물론 그 경영에 대해서도 절대적 권한을 독점하는 주주들의 권한은 이 리스크의 논리로 정당화된다.

‘유한책임’으로 보호받는 몸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막상 기업 경영이 잘못돼 회사가 어려워지면 그 리스크를 흡수하는 충격 쿠션의 역할은 정리해고라는 형태로 노동자에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원칙대로 따져보자. 기업의 의사결정권은 오롯이 주주들과 그들의 대리자인 이사진 및 경영자에게 있다. 기업의 상태가 안 좋아졌다면 그 책임은 투자와 경영의 의사결정을 잘못한 이사진 및 경영자에게 있고, 또 이들을 대리자로 세운 주주들이 져야 한다. 따라서 우선은 이사진과 경영진이 문책을 받거나 교체돼야 하고, 주주들 또한 상황에 따라 유상증자로 자기의 소유권이 희석되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무상감자로 자기 자본금을 회사 운영비로 내는 등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에게 손해가 될 일을 결코 하는 법이 없다. 그 대신 이들은 대규모 정리해고를 결의해 엉뚱하게도 노동자에게 책임을 지운다. 애초에 아무런 경영 의사결정권도 없이 그저 묵묵히 시키는 일만 해오던 노동자들은 졸지에 맨몸으로 그 리스크를 끌어안은 채 촉석루의 논개처럼(수적 규모를 보면 낙화암의 ‘3천 궁녀’가 더 맞을지도) 산화해버린다. 그러고도 회사가 좋아지지 않아서 청산해야 할 상황이 되면 더 황당한 사태가 벌어진다. 리스크 감내의 무한 책임을 안은 비장한 존재처럼 행세하던 주주들은 알고 보니 모두 ‘유한 책임’으로 보호받는 몸이었다. 이들은 기존에 납입 자본으로 박아넣은 돈 이외에 아무 피해 없이 유유히 상황을 빠져나간다.

이렇게 현실의 여러 제도를 살펴보면 노동자도 투자자와 마찬가지로 리스크를 진다는 점, 그럼에도 리스크를 보상하고 대비하는 현실의 장치들을 보면 전자와 후자가 지극히 비대칭적으로 돼 있다는 점, 그래서 노동자의 리스크를 보호하는 장치는 사실상 거의 없다는 점이 드러난다. 행여 ‘노동자는 주주나 파트너가 아니라 고용된 생산요소, 즉 비용에 불과하지 않으냐’고 말하지 않기를. 공장이 가동을 멈춰 장비를 폐기처분한다고 해서 그 장비가 리스크를 안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동은 생산요소이기 이전에 인간이며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가장 기초적 구성 요소다. 이들에게 폐기처분의 리스크는 몸서리쳐지도록 현실적인 문제이며, 이들을 같은 구성원으로 삼아 사회를 공유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계산조차 불가능한 사회 불안의 리스크를 떠안기는 일이다. 요컨대, 오늘날 대부분의 정리해고 사례는 말로만 리스크의 감내자임을 내세워 모든 권한과 이익을 가져가는 주주와 경영진이 자신의 리스크를 노동자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에 떠넘기는 과정이 돼간다는 것이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펼쳐

먼저 노동자가 여타 기계장비나 사무실과 마찬가지의 ‘비용’일 뿐이라는 허구를 더 이상 고집하지 말고 노동자에게도 투자자와 마찬가지로, 아니 훨씬 더 절박한 리스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다음 이를 흡수할 장치를 노동시장 안에 마련하든가 사회정책으로 해결하든가, 아니면 둘을 적절히 배합하든가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정리해고가 자본 쪽이 자기의 리스크를 노동자와 사회 전체에 전가하는 수단으로 남용되는 것을 막으려면, 정리해고 과정을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책임 귀속의 순서로 배열해 노동자가 집단으로 해고당하는 것은 경영진과 주주들이 일정한 고통과 책임을 지고 난 뒤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다음에는 실제 정리해고가 벌어졌을 때 노동자가 짊어져야 할 리스크를 덜어주기 위해 일자리 알선과 직업 교육을 제공하는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을 펼쳐야 한다. 또한 노동자의 생활이 무너지지 않게 사회임금을 확충하기 위해 사회복지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자본 쪽은 이런 사회적 비용을 적극적으로 분담해야 한다. 태초부터 인간이 모여살았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리스크 해소’(이를 당시에는 ‘신’이라고 불렀다)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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