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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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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조건 ‘ISD는 하지 않는다’

등록 2013-03-16 01:58 수정 2020-05-02 19:27
3월15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 지 1년이 된다. 성적은 보잘것없다. 정부가 자신했던 장밋빛 경제 효과는 미미한 반면, 우려했던 대로 공공정책이 발목을 잡히는 부작용은 속속 나타나고 있다. FTA 발효 뒤 3개월 안에 미국 쪽에 요구하기로 했던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재협상은 감감무소식이다. 정부가 미국의 무리한 요구에 철저히 놀아난 결과다. 이제 막 미국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을 시작하기로 한 일본은 우리와 상황이 다르다. 신중하고 주도적이다. 완전 관세 철폐는 반대하고 주권을 침해하는 ISD도 제외하기로 했다. 건강의료보험·정부조달·금융서비스 따위 주요 부문은 개방하지 않거나 개방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송기호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가 일본의 생활협동조합인 ‘생활클럽’의 초청으로 지난 2월26일~3월4일 일본에 건너가 ‘TPP를 신중하게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실패한 한-미 FTA의 지난 1년을 설명하고, 일본 정부·의회가 TPP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돌아왔다. 한-미 FTA는 일본이 피하려는 반면교사지만, 일본의 TPP는 한국이 주목해야 할 선례가 된 것이다. _편집자
송기호 변호사(맨 앞줄 왼쪽)가 지난 3월1일 일본 중의원 회관에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신중하게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보좌관에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년 평가’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송기호 제공

송기호 변호사(맨 앞줄 왼쪽)가 지난 3월1일 일본 중의원 회관에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신중하게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보좌관에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년 평가’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송기호 제공

일본 도쿄 시내 일본예술원 현관에서는 세 여인을 조각한 입상이 사람을 맞이한다. 일본 조각가 하시모토의 대표작 이다. 부처님같이 온화한 얼굴, 부드러운 눈매, 그리고 풍만한 젖이 드러난 몸매를 살포시 감싼 옷을 입고 세 여성이 어깨를 맞대며 나란히 서 있다. 막 깨달음에 이른 듯, 기쁜 미소로 환대한다.

 

중국을 겨냥한 제2의 탈아론

나는 3명의 동양적 여성상을 보며 이들이 각기 한국·일본·중국 세 나라의 여성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성의 눈빛과 몸에서 세 나라의 평화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 ‘화엄’이란 온갖 꽃으로 장엄하게 꾸민다는 뜻으로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깨달음의 비유라고 한다. 그러니 이 작품에 한국이니 일본이니 하는 국적을 갖다붙이려는 내 생각은 부질없는 짓이리라. 하지만 서로 어깨와 몸을 맞대고 평화롭게 나란히 서 있는 여성상에라도 동양 삼국의 평화를 투영하며 위로를 얻고 싶었다. 그만큼 지금 동아시아의 삶은 위태롭다.

오랜 기간 남한에는 미국의 핵무기가 있었다. 아마 일본에도 그랬을 것이다. 벚꽃처럼 짧았던 일본 민주당 정권에서 밝혀졌듯이 미군 핵무기 반입 밀약이 있었다. 오랫동안 북한 사람들은 핵전쟁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그 결과가 북한의 핵 개발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제 핵으로 남한을 위협한다. 북한은 지난 2월19일, 유엔 회의에서 남한의 잘못된 행동이 ‘최종적 파괴’의 전조가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지난 3월6일에는 최고사령부 성명에서 미국이 핵을 내세운다면 서울과 워싱턴이 핵 공격으로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했다. 다른 나라의 핵 위협을 이유로 핵 개발을 정당화했던 나라가 이제는 다른 나라를 핵으로 위협하고 있다. 또 다른 핵보유국 중국은 일본과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다. 동아시아의 모습은 화엄의 세 여성이 품고 있는 아름답고 장엄한 땅과 거리가 먼 곳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 평화롭게 살까? 도쿄 우에노공원에는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불’이라는 조형물이 있다. 마치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의 올림픽 성화처럼 이 불은 꺼지지 않고 타고 있다. 아시아에서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서구 문명에 도달한 일본, 그리고 오늘 한국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많은 낱말을 번역해서 동아시아에 도입한 일본은 왜 핵전쟁의 피해국이 되었을까?

일본의 서구 문명 수용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회의’ ‘연설’ ‘경쟁’과 같은 일상 용어를 만든 후쿠자와 유키치를 보자. 일본의 가장 고액권인 1만엔에는 그의 초상화가 있다. 그는 세계를 ‘야만, 반개(半開), 문명’의 세 가지로 구분했다. 그는 1875년에 쓴 에서 “단지 진퇴(進退)라는 두 글자가 있을 뿐이며 일본은 앞으로 나아가 문명을 좇을 것인가, 뒤로 물러서 야만으로 되돌아 갈 것인가”라고 썼다. 그리고 1885년 발표한 사설 ‘탈아론’에서 서구 사회를 문명으로 규정하고 한국과 중국을 스스로는 문명화될 수 없는 비문명으로 규정했다.

일본은 서구 문명을 도입하며, 사회진화론과 서구 근대화론을 극복하지 못했다. 문명화가 되지 못한 조선과 중국을 문명국 일본이 지배하는 것을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으로 정당화했다. 그리고 식민주의로 맘껏 달려갔다. 바로 여기에서 일본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먹고사는 문제”라고 한 한국보다 정직

동양 삼국, 좀더 국제법적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유엔 가입국인 북한을 포함한 네 나라 중 어느 나라도 다른 나라를 비문명적이거나 후진적인 사회로 규정해서는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네 나라 중 어느 나라도 자국을 서구 문명이나 근대화의 선진사회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일본예술원 현관에서 사람을 맞이한 세 여인이 어깨와 몸을 맞대고 평화를 나누며 서로 나란히 서있듯, 네 나라는 서로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TPP의 문제도 동양 평화의 문제다.

나의 일본 일정 중, 일본 언론은 아베 신조 총리의 TPP 참가를 기정사실화했다. 도대체 왜 일본은 TPP를 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동아시아 평화에 이로운가? 아베 총리는 지난 3월6일 일본 참의원 본회의에서, 자유무역 체제를 강화하고 환태평양 지역의 활력을 확보하려면 일본이 적극적으로 국제적룰을 만드는 데 참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발언했다. 이것은 중국을 겨냥한 제2의 탈아론이라 할 수 있다.

아베의 발언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6년 한-미 FTA를 하며 한-미 FTA는 먹고사는 문제이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고한 것보다 정직하다. 한-미 FTA는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이 미국과의 FTA 1년에서 겪었듯 미국과의 FTA는 한국에 경제적 효과가 없다. 2013년 2월20일까지의 정부 통계를 보면 FTA 발효 뒤 1년간 오히려 미국 수출은 줄었다. 한-미 FTA는 한-미동맹 유지를 위해 미국이 요구한 대로 한국사회 제도를 변경하는 것이다. 박주선 의원(무소속)이 지난 2월 정부에 요구해 받은 자료인 ‘한-미 FTA 이행법령 목록 및 주요 내용’을 보면 한국은 법률 23개를 포함해 모두 66개 법령을 바꾸었다.

TPP는 한-미 FTA와 마찬가지로 미국-오스트레일리아의 미국적 사회 질서에 일본이라는 소농적 사회 질서가 편입되는 중대한 사건이다. 성균관대 교수로 한국사 연구의 권위자인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가 지난 1월에 낸 라는 책에서 입론했듯,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 문명을 받아들인 변화는 17세기 소농 사회의 성립을 전후로 하는 동아시아 사회 구조의 대변동에 비한다면 오히려 더 작은 것이다.

즉, TPP가 가져올 일본 사회의 변화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19세기 후반에 직면한 서구 문명의 도입 문제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본질적이다.

 

농업계·의사회·우정회, 완강하게 반대

일본 체류 일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일본은 적어도 이런 본질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TPP 논의는 한국의 참여정부와 같은 거짓이 없었다. TPP를 하면 미국으로 수출을 더 늘릴 수 있다든지, 미국이 일본의 경제 영토가 된다든지, 일본이 미국을 선점한다든지 하는 노무현 정부식의 허위의식은 없다. 대신 TPP를 하더라도 일본 고유의 제도, 일본 특질의 사회제도를 유지할 수 있느냐를 놓고 논쟁 중이다. 이것은 자민당이 공식화한 일본의 TPP 참가 6대 조건에서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정부가 ‘성역 없는 관세 철폐’를 전제로하는 한 교섭 참가에 반대한다.
2. 자유무역의 이념에 반하는 자동차 등 공업제품의 수치 목표는 수용할 수 없다.
3. 국민 개(皆)보험제도를 방어한다.
4. 먹을거리의 안전·안심 기준을 수호한다.
5. 국가의 주권을 손상시키는 ISD 조항은 합의하지 않는다.
6. 정부조달·금융서비스 등은 일본의 특성을 살린다.

 

이런 인식은 일본의 제18대 의사회 회장인 하라나카 가즈유키 회장을 일본 의회에서 만나 의견을 나눌 때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일본 의사회의 ‘일본 의료를 지키는 국민운동’을 이끌고 있다. 일본 의사들은 TPP가 일본의 의료 격차로 이어질 것을 염려해 대대적인 TPP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하라나카 회장은 의회 간담회에서 건강보험제도의 지속성이 일본 사회 유지에 사활이 걸린 문제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일본 사회의 고령화로 2050년이면 노동 가능 인구와 65살 이상 인구의 비율이 1:1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의료비 지출은 65살 이상 인구가 노동 가능 인구보다 5.5배 많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건강의료보험제도 유지는 일본 사회 유지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TPP를 하면 미국 제약회사의 이익 추구 앞에 일본의 건강의료보험은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일본 대장성 국제금융국장을 지냈고, ‘미스터 엔’으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사카기바라 에이스케 교수와의 만남에서도 “TPP는 일본에 필요하지 않다. 일본의 사회제도가 미국화되지 않도록 일본 고유의 제도를 지켜야 한다”는 의견을 들었다. 일본 외무성 국제정보국 국장 출신의 마고사키 우케루 또한 “TPP는 단순한 자유무역이 아니라 일본 사회를 변경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스스로의 힘으로 서구 문명에 도달하고 사회를 운영한 저력이 있었다.

 

협상 참가 선언이 오히려 거대한 논쟁의 신호탄

한-미 FTA처럼 일본에서 TPP가 제도화될 것인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아베의 TPP협상 참가 선언은 오히려 거대한 논쟁의 신호탄일 것이다. 자민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농업계·의사회·우정회는 TPP를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지금 일본은 한국에서 한-미 FTA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관찰하고 있다. 일본 국회의원들은 박주선 의원이 제공 받은 한국 법령 개폐 목록에 큰 관심을 보이고 이를 일본어로 번역한 것을 읽고 있었다.

일본의 TPP 결정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일 일본이 TPP를 수용하는 날, 한국에는 그 수용 여부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이 자동 편입되는 날, 동아시아는 중국·북한 경제블록과 한국·일본·미국 경제블록으로 나뉠 것이다. 이 틀에서 가장 큰 패자가 누구인지는 명약관화하다. 일본의 TPP 협상은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송기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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