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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바닥마저 평정하려는 골리앗

1t 트럭 적재함 평바닥 시공 사업 검토 중인 현대차… 10년 이상 노하우 쌓으며 성장한 영세업체들 “망했다” 울상
등록 2011-05-26 02:11 수정 2020-05-02 19:26

1t 트럭을 사면 가장 먼저 할 일이 뭘까? 대부분 차를 사는 동시에 방문하는 곳이 있다. ‘차바닥’이란 상호를 단 업체다. 트럭 뒷부분인 적재함을 평탄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려는 것이다. 공장에서 갓 출시한 트럭은 적재함이 올록볼록하다. 적재함 바닥과 옆면에 철판을 덧대 평평하게 만든다.

벼랑으로 몰린 1천 가구의 생계

‘적재함 평바닥’ 시공을 하는 곳은 전국에 450여 개 업체가 있다. 1t 트럭 한 대당 22만~25만원을 받는다. 이들 대부분은 부부가 일하거나 종업원 1~2명과 함께 힘을 들인다. 차바닥 사업으로 적어도 1천 가구 남짓이 생계를 유지하는 셈이다.
이들에게 최근 걱정거리가 생겼다. 현대차가 차바닥 사업에 뛰어들 전망이기 때문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면서도 “계속되는 고객의 요청이 있어 차바닥 사업을 할 것인지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또 “관련 업체들은 ‘대기업이 이런 것까지 하냐’며 반발할 수 있지만 고객의 요청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처지”라고 덧붙였다.

» 서울 시내의 한 차바닥 업체에서 부부가 지난 5월18일 현대차 ‘포터Ⅱ’의 적재함을 평평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 서울 시내의 한 차바닥 업체에서 부부가 지난 5월18일 현대차 ‘포터Ⅱ’의 적재함을 평평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반면에 관련 업체들은 현대차가 시장에 뛰어들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이다. 서울에서 차바닥 사업을 하는 김충기(가명)씨는 “10년 넘게 다양한 트럭에 맞춰 철판 제조와 노하우 등을 통해 시장을 키워놓으니 이마저도 현대차가 집어삼키려 한다”며 “현대차가 진출하면 관련 업체는 물론 거기에 딸린 종업원과 그 가족들은 모두 직장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사장 말대로 차바닥 시장은 영세업체들이 키웠다. 1980년대부터 자동차 정비 관련 업체들이 철판을 용접으로 이어붙이는 등 트럭 적재함 바닥을 평평하게 해주는 서비스를 했다. 이후 몇개 업체가 아예 표준화된 아이디어를 고안해 ‘화물자동차의 적재함 카바’라는 이름의 특허까지 1991년에 받았다. 덕분에 적재함을 평평하게 만들어 화물이 기울어지는 것을 막아 더 안전하게 실을 수 있다. 차바닥 전체를 한 번에 덮을 수 있는 넓은 폭의 강판을 포스코로부터 공급받게 된 것도 이들의 노력 때문이다.

이런 노력은 트럭 주인들에게도 이익을 줬다. 대구 ㅇ업체의 김아무개씨는 “철판을 덧대지 않으면 바닥과 옆면이 찌그러지는 것은 물론 페인트가 벗겨져 녹이 슨다”며 “차바닥 공정을 거치면 나중에 중고차로 팔아도 시공 비용만큼 더 받을 수 있어 트럭 주인들도 반겼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가 뛰어들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하소연은 ‘동생’ 기아차가 이미 증명했다. 기아차는 2008년부터 자사의 1t 트럭 ‘봉고Ⅲ’에 선택 사양으로 ‘적재함 평바닥’을 제시해왔다. 25만원을 추가로 내면 공장 출시 시기부터 차바닥을 평평하게 해준다. 이에 대해 김 사장은 “기아차의 봉고 트럭도 매달 20여 대가 우리 공장을 찾았지만, 기아차가 같은 사업을 하면서 1~2대로 확 줄었다”며 “찾아오는 손님도 기아차의 옵션이 우리가 제작한 것보다 부실해서 찾는 지경”이라고 말했다. 또 “적재함 바닥의 철판이 파이는 등 부실하지만 이런 사실을 아는 소비자만 우리를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대형유통업체의 SSM 진출과 같아”

이미 현대차의 시장 진출 위협만으로도 관련 업계는 어려움을 겪는다. ‘검토’만으로도 시장에 큰 영향을 끼치는 셈이다. 포스코는 지난해 4월과 7월에 이어 지난 5월에도 값을 올렸다. 차바닥에 주로 쓰이는 단단한 냉연 강판은 1t당 가격이 78만5천원(2010년 4월)에서 118만원(2011년 5월)으로 올랐다. 그런데도 차바닥 시공비는 2008년 25만원에서 요지부동이다. 김 사장은 “1t 트럭 기준으로 원자재 비용만 19만5천원이고, 여기에 원자재 운송비와 가게세, 자재료 등까지 포함하면 남는 게 없다”며 “그런데도 현대차가 차바닥 사업에 뛰어들며 기존 업체의 높은 가격을 이유로 들까봐 올리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현대차의 1t 트럭 판매량은 기아차의 2배가 훨씬 넘는다. 현대차의 ‘포터Ⅱ’는 지난해 9만4천 대가 팔려, 기아차 ‘봉고Ⅲ’(3만8100대)보다 훨씬 높은 점유율을 보였다. 국내 1t 트럭은 현대차와 기아차만 생산한다. 서울 구로구에서 차바닥업을 하는 이범윤(가명)씨는 “현대차가 차바닥 사업까지 하는 것은 마치 대형 유통업체가 골목시장에 기업형 슈퍼마켓(SSM)을 출점해 동네 슈퍼를 죽이는 것과 똑같다”며 “현대차가 사업을 시작하면 물량이나 가격 면에서 우리 같은 영세업체들이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업체들은 현대차에 호소문을 보내는 등 대응을 준비 중이다. ‘전국적재함시공협회’를 준비 중인 한 관계자는 “2008년에도 기아차가 차바닥 사업을 시작해 업체들이 모여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그룹 본사 앞에서 시위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며 “현대차까지 진출하면 망할 수밖에 없어 청와대와 동반성장위원회에 호소문을 보내는 것은 물론 공정위에 신고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대차가 중소업체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전국자동차선팅협의회는 지난 5월11일 현대차와 현대모비스를 계열사 간 부당 지원 및 거래상 지위를 남용한 불공정행위로 신고했다. 현대차가 지난 3월 정가판매제를 시작하며 소비자의 불만을 달래려고 공짜 선팅 쿠폰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협의회는 현대차가 쿠폰을 이용할 수 있는 시공업체를 현대모비스의 선팅 필름을 받는 곳으로만 제한해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를 했다고 주장했다. 또 현대모비스는 시공업체에 기존 시공 대금(7만~10만원)보다 훨씬 싼 5만원대를 강요하고 있다고 전했다. 협의회 관계자는 “영세업체들이 하던 선팅 시장까지 대기업이 빼앗으려 한다”며 “지금도 필름값을 빼면 대당 1만8천원 정도의 이윤밖에 없는데 가격을 더 낮추면 살아남기 힘들다”고 말했다.

현대차는 차바닥 사업과 관련해 “소비자에게 좀더 싼값에 훌륭한 제품을 제공하기 위한 조처”라며 “소비자가 다시 관련 업체를 찾아가는 불편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선팅에 대해서는 “기존 시공업체 요금에 거품이 있었고, 900여 개 자동차 판매지점과 연계돼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선택한 것”이라고 밝혔다.

‘동반성장협약’은 공수표인가

현대차는 지난 1분기 매출 18조2334억원, 영업이익 1조8275억원의 실적을 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54.9%, 46.5% 늘어난 수치다. 기아차도 매출 10조6578억원과 영업이익 8399억원을 기록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각각 36.7%, 7.9% 늘어났다. 더구나 현대차그룹은 지난 3월 대기업 가운데 가장 먼저 협력사와 ‘동반성장협약’을 맺었다. 이를 통해 현대차그룹은 공정한 하도급거래 질서를 확립하고 2차 협력사 지원 등 다양한 동반성장 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차는 선팅과 차바닥 사업까지 하는 게 동반성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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