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0년 2월 초
한 대기업 홍보실 차장과 술잔을 기울이던 저녁 자리였다. 시시콜콜한 기업 안팎의 이야기부터 잡다한 연예가 뒷담화까지 오가던 말머리가 도요타 사태에 이르렀다. “도요타 사태의 원인이 뭐일 것 같으냐”는 질문에 “언론과 기업의 유착”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눈이 번쩍 뜨였다.
일가족 살해한 도요타 직원도 익명 보도
그때까지 국내외 언론들은 생산 라인이 숨쉴 틈 없이 돌아가게 만드는 도요타의 적시생산방식(JIT)부터 품질을 포기한 극한의 원가 절감, 그리고 일본의 ‘대기업병’이 도요타 신화를 붕괴시켰다는 식의 진단을 주로 내리고 있었다. 자국 기업에 대해서는 감싸기부터 먼저 하는 일본 언론의 ‘애국주의’(Jingoism)를 도요타 사태의 한 원인으로 내심 생각하던 터였다.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다. 그는 “일본 언론의 최대 광고주가 바로 도요타다. 그걸 한번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 검색창을 두드렸다. ‘도요타, 광고, 언론, 비판’이란 검색어를 넣고. ‘친환경 하이브리드카에 낀 거품’이라는 2006년 5월 기사 제목이 눈에 띄었다. 공교롭게도 박중언 도쿄특파원의 기사였다.
<font color="#006699"> ‘이미지 왕국’ 도요타 구축의 또 다른 ‘공신’은 언론이다. 주요 일간지는 물론 잡지 등에서도 도요타를 비판하는 기사가 다뤄진 적이 거의 없다. 지난 92년 도요타 직원의 일가족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짤막하게 취급된 이 기사는 직원의 이름과 회사명이 익명 처리됐다. 이 사건 재판에서 증언에 나선 사루타 마사키 주쿄대 교수는 “재판 과정이나 매스컴에서 피고가 도요타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다뤄진 사실을 나로선 결코 잊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3년 뒤 쓰쿠바시에서 발생한 한 의사의 일가족 살인사건은 실명 처리됐고,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명백한 이중 기준이다.일본 언론들은 외국 언론처럼 엄격한 시승을 통한 자동차의 성능, 연비 검증 등도 하지 않는다. 반면 언론의 수많은 도요타 특집은 곧 세계 1위로 등극할 도요타로부터 뭘 따라 배울 것인지를 전하느라 바쁘다. 광고업계 한 관계자는 “요즘 (최대 광고업체) 덴쓰도 광고주에 불리한 기사를 틀어막기는 어렵다. 그러나 광고비 1위인 도요타는 예외다”라고 말한다.
도요타의 2004년 광고비는 817억엔이었다. 오후 6시 이후 텔레비전 프로그램 가운데 도요타 광고가 붙는 게 30개에 이른다. 지난해 12월 신문 전면광고는 6회, 5회, 3회였다. 신문당 한 차례씩만 전면광고를 내보낸 닛산자동차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font>
2. 2009년 12월 중순
한 대기업 홍보 임원과의 송년 인사 겸 차 한잔 마시는 시간이었다. 이야기가 ‘언론의 역할’이란 쪽으로 흘러갔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요즘 오너(대기업 회장)들이 ‘홍보 뭐 하는 거 있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대로 가면 대기업 홍보팀은 망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뭔지 아냐고 물었다. 그는 “언론이 비판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문에서 방송에서 홍보팀이 홍보 계획으로 보고한 것 이상으로 칭찬하는 기사만 쏟아지니, 홍보팀은 그냥 묻어간다고 생각하는 거지. 하는 일 없이.”
얼마 뒤, 다른 대기업 홍보팀의 부장과 대화하다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기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숨을 내쉬며 “그게 진짜 현실”이라고 했다.
“임원들과 정례회의 때 홍보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앞으로 예상되는 리스크에 대한 홍보 차원의 대응 계획 등을 이야기할 때면 임원들이 대뜸 ‘그냥 광고 주면 해결되는 거 아냐?’라고 말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정말 다리에 힘이 팍 풀린다.”
언론 홍보 쪽에 오래 몸담았던 대기업 임원들은 가끔 이런 넋두리를 한다.
“언론이 날을 세우고 홍보가 방패로 막던 때는 1990년대로 끝났다. 언론의 비판이 사라지면서 홍보의 황금기도 끝났다.”
3. 2010년 2월18일
중앙일간지인 와 , 그리고 경제일간지인 와 의 지난 1월치 1면 기사들을 훑어봤다. 이들 신문의 1월4일치 1면은 모두 삼성건설이 지었다는 두바이의 세계 최장 건물 ‘버즈 두바이’(Burj Dubai)의 외경을 실었다. 1월11일치 1면에는 ‘삼성도 까딱 잘못하면 구멍가게 수준이 된다’는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발언이 일제히 실렸다. 그리고 두 딸인 이부진 삼성에버랜드·신라호텔 전무와 이서현 제일기획·제일모직 전무의 손을 잡고 “딸들 광고 좀 합시다”라고 말하며 라스베이거스 가전쇼장을 걸어가는 이건희 전 회장의 사진을 일제히 실었다. 세종시 논란이 극에 달했던 1월6~9일에는 삼성그룹이 ‘세종시에 바이오 관련 신사업을 보낸다’ 혹은 ‘LCD나 2차 전지 이전을 검토 중’이란 기사들이 1면을 장식했다.
삼성의 1면 기사 비중, 광고비 비중 반영?같은 기간 재계 2위인 현대자동차와 LG그룹에 대한 1면 기사는 경제지에 실린 각 1건씩이 전부였다(1월6일치 ‘정몽구 회장, 아버지의 한을 이루다’와 1월25일치 ‘LG 올해 1만 명 채용’).
한 대기업 홍보 임원은 이런 사실에 대해 “광고비 비중이 그대로 반영된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럼 삼성그룹은 국내 언론들에 한 해 얼마 정도의 광고비를 집행할까? 약간 오래된 자료지만, 광고정보센터(adic.co.kr)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등 삼성그룹 전체 계열사의 2006년 TV·라디오·신문·잡지 광고비는 2873억원이었다가, 2007년에는 1824억원으로 줄었다(이후 자료는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삼성그룹이 통상 매체광고 이외에도 협찬 형식으로 매체광고액보다 더 많은 액수를 집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 한 회사만으로도 한 해 130조원의 매출과 10조원의 영업이익을 남기는 것을 따져볼 때 삼성그룹이 국내외 언론에 대해 집행할 수 있는 잠재적인 매체 광고비와 협찬 광고비는 상상 이상일 수도 있다. 삼성전자의 마케팅 예산 규모만 살펴봐도 그렇다. 동양종합금융증권이 지난 2월8일 내놓은 제일기획 관련 보고서를 보면, 삼성전자의 지난해 국내외 마케팅 비용은 2·3분기에는 1조5천억원에 육박했고, 4분기에는 2조원을 넘어 한 해 통틀어 6조원에 조금 못미치는 수준이다.
4. 2010년 2월10일
도요타 사태가 극에 달한 이날 일본 언론은 도요타를 비판하지 못했던 이유를 뒤늦게 고백하는 기사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일본 중앙일간지 은 도요타를 비판하는 책을 썼던 시사평론가 사타카 마코토의 말을 인용해 “(도요타에 대한) 비판 자체가 금기였다”며 “도요타는 너무 들떠 있었다”고 전했다.
한 해 1조3천억 광고비에 눈치 봤다경제평론가인 야마사키 하지메는 경제주간지 에 기고한 칼럼에서 “일본 언론들이 최대 광고주인 도요타의 눈치를 보면서 문제의 본질과 올바른 대응책을 지적하지 않았고, 회사 내부에서도 창업주 후손인 도요타 아키오 사장에게 올바른 대응 방식을 간언할 ‘진정한 충신’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1년에 1천억엔(약 1조3천억원) 이상의 광고비를 쓰는 최대 광고주 도요타를 의식해 전세계 소비자의 비판 여론과 도요타 대응 방식의 문제점 등을 정면으로 지적하지 못했다는 것이 하지메의 비판이었다.
일본의 지금 모습이 한국의 모습으로 그대로 투사되는 것은 기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태희 기자 한겨레 경제부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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