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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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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노조 민주노총 탈퇴 95% 찬성의 진실

민주동지회 “‘구석 찍기’ 등 사실상 공개투표로 진행”
일반 조합원 “구조조정 공포 탓, 노조에 기대 안해”
등록 2009-07-30 09:20 수정 2020-05-02 19:25

지난 7월17일 KT노동조합은 민주노총 탈퇴를 묻는 조합원 투표를 벌였다. 이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된 투표에서 KT노조 조합원의 94.9%가 탈퇴 찬성표를 던졌다. 보수 언론들은 다음날 KT노조의 민주노총 탈퇴를 1면 톱으로 올렸다.

7월17일 경기 분당 KT 본사에서 KT노조가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탈퇴 여부를 결정하는 조합원 찬반 투표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연합 진성철

7월17일 경기 분당 KT 본사에서 KT노조가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탈퇴 여부를 결정하는 조합원 찬반 투표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연합 진성철

압도적인 찬성 결과에 조합원들도 놀라워했다. 자신을 보수적이라고 밝힌 한 KT 조합원은 “나도 탈퇴를 찬성하는 한 표를 찍었지만 이렇게 높은 찬성률이 나올지는 몰랐다. 99%가 안 나와 그나마 다행일 정도였다. 거의 공산주의식 투표가 될 뻔했다”고 말했다.

전체 조합원의 95%(2만7018명) 투표에 투표 조합원의 95%(2만5647표)가 찬성한 유례가 드문 투표 결과는 놀라웠다. 애초 기자는 민주노총에 대한 조합원의 반감이 그토록 강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취재하려 했다. 민주노총의 성찰을 위한 자극제로 제시하려 했다. 하지만 취재를 해보니 다른 시선들이 눈에 띄었다. 놀라운 얘기도 있었다. 95%의 진실은 무엇일까? 투표를 바라보는 세 개의 다른 시선을 찾았다.

# 5%의 시선

7월22일 밤 서울 용산구의 KT민주동지회 사무실. KT민주동지회는 진보 또는 좌파 성향의 KT 조합원들로 꾸려진 조직이다. 이곳에서 ‘95%’ 다수의 시각이 아닌 ‘5%’ 소수의 시각을 볼 수 있었다. 민주노총 탈퇴를 반대한 KT 조합원은 1221명에 그쳤다.

KT민주동지회 조합원들은 지금까지 나온 언론 보도와 180도 다른 얘기를 했다. 이들은 회사 쪽이 조직적으로 투표에 개입하거나 사주했다는 주장을 폈다. 감시와 통제 속에 조합원들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투표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었다. ‘구석 찍기’와 ‘팀별 줄 투표’를 강요하며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을 감시·통제했다는 것이다.

“팀별로 기표용지 특정 위치에 찍게 해”

민주동지회 조합원들은 그 근거로 지난해 말에 열린 노조위원장 선거 결과를 들었다. 지난해 12월3일 KT노조위원장 선거가 열렸다. 기호 1번 김구현 후보는 보수 성향을 지닌 옛 집행부에서 지지했다. 2번 조태욱 후보는 KT민주동지회가 지지한 후보였다. 투표 결과, 김구현 후보와 조태욱 후보는 각각 48.75%, 42.79%의 득표율을 올려 백중세였다. 과반수 득표를 한 후보가 없어 두 후보는 12월9일 2차 결선 투표를 치른다. 2차 투표에서 김 후보가 68.02%의 지지로 당선됐다.

KT민주동지회 조아무개 조합원의 얘기다. “KT 조합원들이 민주노총에 대한 정서가 안 좋은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95%까지는 아니에요. 조합원 정서가 그랬더라면 지난 노조위원장 선거에서 1번 후보가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았겠죠. 그런데 그렇지 않았거든요. 왜일까요? 지난해 말에는 회사 쪽이 선거에 개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1∼12월 KT엔 큰일이 있었다. 남중수 전 KT 사장이 비리 혐의로 구속됐고, 이어 KT 새 사장 공모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KT의 최고 핵심부가 진공상태인 시기였다.

“어수선했을 때죠.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하기 힘들었어요. 노동 탄압이 일시적으로 느슨해졌기 때문에 2번 후보가 그렇게 높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다 새 사장이 선임되면서 확 바뀌게 된 거죠.”(장아무개 조합원)

KT민주동지회 사람들이 주장하는 회사의 개입은 이런 식이었다. KT노조 선거와 투표는 전국 440개 지부에서 치른다. 소규모 단위의 지부별로 투표와 개표를 하기 때문에 지부의 투표 성향이 드러날 수 있다. 이런 사정을 이용해 A팀장은 10명의 팀원들에게 기표용지의 왼쪽 상단에 도장을 찍게 하고 B팀장은 7명의 팀원들에게 오른쪽 상단에 찍게 해 투표 결과를 사후에 확인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구석 찍기다. 또 팀별로 같은 시간에 투표를 하게 하는 팀별 줄 투표도 강요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공개투표로 진행한다는 주장이었다.

처음엔 KT민주동지회 조합원들의 주장을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난해 노조위원장 선거에서 입수한 것이라며 몇 개의 자료(사진)를 내밀었다. 그 사진들에는 한결같이 구석 찍기로 기표한 흔적이 역력했다.

“관리자들의 압력은 기본입니다. 관리자들도 투표율이 낮거나 회사에 반대되는 투표율이 높으면 인사 전보 조치를 당합니다. 이 때문에 관리자들은 노조 선거에 일일이 다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합원이 기표소에 들어가 자기가 찍고 싶은 대로 투표하기가 힘듭니다. 기표소 뒤에 CCTV라도 있는 듯 위축될 수밖에 없어요.”(김아무개 조합원)

“관리자들이 조합원의 성향을 거의 다 알고 있죠. 투표가 끝난 뒤에도 이탈 표가 나올 경우 관리자들이 조합원에게 일일이 ‘누구 찍었냐’ ‘찬성 찍었냐’라고 물어보며 이탈 표를 찍은 조합원을 찾아내죠. 그런 투표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누가 자기 마음대로 투표를 할 수 있겠어요.”(이아무개 조합원)

소규모 지부별로 투표와 개표를 하는 게 문제인 것 같았다. 기자가 “지부별로 하지 말고 몇 개 지부를 통합해 투표를 하면 그런 의혹을 없앨 수 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KT민주동지회 조합원들은 “KT노조가 반대하기 때문에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KT민주동지회가 지난해 노조위원장 선거 과정에서 입수한 투표용지에는 조직적으로 투표용지의 특정 구석에만 기표를 한 흔적이 보인다. 사진 KT민주동지회 제공

KT민주동지회가 지난해 노조위원장 선거 과정에서 입수한 투표용지에는 조직적으로 투표용지의 특정 구석에만 기표를 한 흔적이 보인다. 사진 KT민주동지회 제공

지부별 소규모 투표에 참관인도 없어

참관인을 두지 않는 것도 문제로 보였다. KT노조 규약에는 간부를 선출할 땐 참관인을 두도록 해놓았다. 하지만 임단협 등 조합원의 찬반을 물을 때는 참관인을 두는 규정이 없다. 이런 이유로 KT민주동지회 조합원들은 ‘투표용지 바꿔치기’ 의혹도 제기했다.

KT민주동지회의 한 조합원은 7월17일 하루 휴가를 내어 투표 현장을 지켰다고 했다. 그는 참관인 자격으로 투표 결과를 끝까지 지켜봤다. 투표 결과 찬성 70%, 반대 30%였다. 그 조합원은 “우리 지부가 특별히 민주적인 성향이 있는 지부가 아닌데도, 민주노총 탈퇴 반대 비율은 전체 투표 결과보다 훨씬 높았다”고 말했다.

한 KT민주동지회 조합원은 “KT노조는 회사에서 만들어준 노조다. 제대로 된 노조라면 회사 쪽에 대해 건강한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노조는 전혀 그런 것이 없다. 노동조합 같지 않은 노조인 셈”이라고 비판했다.

# 버림받은 민주노총의 시선

KT노조 탈퇴로 민주노총은 일정 부분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KT노조는 민주노총 산하 단위 노조 중 세 번째로 규모가 크다. 민주노총 산하 산별노조인 IT산업연맹 전체 조합원 3만7천여 명 가운데 2만8434명이 KT 조합원이다.

민주노총은 KT 조합원들의 선택을 존중한다면서도 투표 과정의 불법성을 따져묻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승철 민주노총 대변인은 “이번 탈퇴 투표 과정에서 회사 쪽과 민주노총을 흔들려는 일부 보수 세력의 개입 의혹이 커지고 있다.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KT 불매운동과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법적 대응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KT노조 탈퇴를 이명박 정부의 노동탄압 정책이란 틀에서 분석했다. “이명박 정권의 노동정책에 KT노조가 놀아난 격입니다. KT노조의 민주노총 탈퇴는 노동조합 죽이기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미디어법과 비정규직법으로 이명박 정권이 코너에 몰리자 KT노조 탈퇴라는 카드를 쓴 것이죠. 문제는 앞으로인데, 이명박 정권은 민주노총은 물론 한국노총 역시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어요. 친정부·친사용자 편향적인 뉴라이트 계열 노총을 띄우려 하고 있죠. 결국 KT노조가 현대중공업, 공기업노조 등과 함께 뉴라이트 노총으로 들어가는 수순을 밟게 될 것입니다.”

투쟁 방식 자성하며 정권 개입 비판도

물론 민주노총 내부에 다른 목소리도 있다. KT노조 탈퇴를 계기로 민주노총의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 민주노총 인사는 “KT가 민주노총에서 탈퇴한 건 회사 쪽과 정권의 정략적인 측면도 있긴 하지만, 민주노총의 운동 방식이 시대에 따라가지 못해 조합원에게 호응을 못 받는 이유도 분명 있다”며 “어용 KT노조의 ‘쇼’라고 폄하하기 전에 민주노총 내부의 문제는 없는지도 성찰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이랜드 투쟁을 들며 민주노총의 고민을 얘기했다. 2년 전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당시 민주노총 내부에서도 여러 목소리가 나왔다고 한다. “매장 봉쇄 투쟁만이 다인가. 시민들의 호응을 받으려면 좀더 세련된 투쟁으로 가야 한다. 매장을 자주 찾는 시민들과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 비정규직 문제를 얘기하며 시민들과 함께 가는 투쟁이어야 한다.” 이런 주장이 있었던가 하면 “그렇게 해서 승산이 있나. 막는 투쟁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결국 민주노총은 봉쇄 투쟁을 택하게 된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이렇게 털어놨다. “민주노총은 여전히 제조업 중심의 1980년대식 투쟁 방식을 지향하고 있죠. 반면 화이트칼라 노조들은 좀더 세련된 투쟁 방법을 요구하고 있죠. 조합원의 요구에 맞는 노선과 진로를 찾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거든요. 민주노총이 조합원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조합원은 계속 멀어져갈 수밖에 없는 거죠.”

# 95%의 시선?

기자는 KT노조에 전화를 걸었다. 교선실장이 전화를 받았다. 민주노총 탈퇴와 관련해 얘기하고 싶다고 하자, 그는 “이미 얘기를 다 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기자가 “그러면 위원장과 통화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교선실장은 “위원장님이 지방에 계셔서 통화하기 힘들다”고 했다. 기자가 “전화번호라도 알려달라”고 했더니, 교선실장은 “끊겠다”며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KT 노조 집행부 인터뷰 거부

KT노조의 입장을 충분히 보여주고 싶었으나, 교선실장은 말하기 싫어했다. 하지만 그는 보수 언론 여러 곳에 이미 일문일답식 인터뷰까지 했다. 교선실장이 보수 언론과 인터뷰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민주노총이 이념적 투쟁을 위해 노조를 동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성폭력 사건이나 폭력적인 투쟁 방식에 대한 염증으로 대중의 신뢰를 잃어가는 상황에서도 민주노총은 과거의 투쟁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이번 탈퇴 결정을 계기로 이념 투쟁이 아닌 시대에 맞는 탄력적인 노동운동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KT노조의 일반 조합원들은 회사의 개입 문제에 대해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KT노조에도 큰 기대나 희망을 걸지 않았다. 한 KT 조합원은 “노조가 정치적으로 생색내기를 하는 것 같다. 그동안 노조 집행부는 민주노총과 함께 정치 투쟁을 하거나 총파업에 참여한 적이 없다. 탈퇴했어도 별로 달라질 게 없다. 조합원들이 찬성에 표를 던진 건, 구조조정 공포 때문이었다. 구조조정이 조금이라도 완화될까 해서였다. 하지만 회사가 앞으로 구조조정 카드를 들고 나올 때 노조가 제대로 막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거의 없다”며 씁쓸해했다.

KT노조는 1995년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조합원 3만여 명이 모인 대규모 파업 결의 집회를 열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국가 전복 세력’이라고 부를 정도로 KT노조는 이른바 ‘강성 노조’로 불렸다. 그해 11월 KT노조는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민주노총에 합류했다.

10년이 훨씬 지난 2009년 KT노조는 ‘95% 투표, 95% 찬성’이라는 놀라운 투표 결과를 보이며 민주노총을 버렸다. 보수 언론들조차 역대 다른 노조의 조합원 투표에서 유례가 드문 일이라고 놀라워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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