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포스코 회장 선임 ‘미스터리’ 열쇠는 회의록

‘4 대 4’ 이후 표결과정 진실게임… 외압 폭로 뒤 토론 없이 투표 진행
등록 2009-05-29 07:22 수정 2020-05-02 19:25

1월29일 열린 포스코 최고경영자(CEO) 추천위원회(이하 추천위) 회의는 정권 핵심의 포스코 인사개입 논란을 풀어줄 ‘판도라의 상자’다. 이날 회의 대화록이 공개된다면 실체적 진실에 더 다가갈 수 있다. 이구택 당시 회장이 어떤 구실을 했는지, 추천위의 회장 선임 과정에서 법적 문제는 없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개혁연대도 5월18일 포스코 신임 회장 추천 및 선임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포스코에 관련 자료 공개를 요구했다.

지난 1월15일 오후 이구택 포스코 전 회장이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에서 열린 ‘포스코 2009 CEO 포럼’에서 사퇴 의사를 밝힌 뒤 회의장을 떠나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지난 1월15일 오후 이구택 포스코 전 회장이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에서 열린 ‘포스코 2009 CEO 포럼’에서 사퇴 의사를 밝힌 뒤 회의장을 떠나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이구택 회장의 정준양 후보 지지 이후

하지만 포스코는 아직까지 이를 공개할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은 추천위 회의에 참가했던 여러 사외이사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하며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려 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사외이사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미묘한 뉘앙스를 드러냈다.

당시 회의석상에서 윤석만 포스코 사장의 ‘외압 폭로’가 있었는데도 회의에 참여한 독립적이고 명망 있는 사외이사들이 어떤 까닭에서 정준양 당시 포스코건설 사장을 회장으로 추천하게 됐을까에서 의문은 시작한다. 열쇠는 이구택 당시 회장이 쥐고 있다. 이 인터뷰한 사외이사들은 한결같이 “이구택 회장의 정준양 사장 지지 발언이 투표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무슨 말일까? 1월29일 CEO 추천위 회의에 앞서 사외이사들은 이구택 회장을 비롯한 포스코의 주요 임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어떤 사람이 차기 CEO로 적합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임원들은 특정인을 거론하지 않은 채 ‘이러이러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 돼야 한다’는 취지의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나 취재에 응한 사외이사들은 “윤석만 사장의 폭로에 앞선 진행된 이구택 회장의 인터뷰에서, 이 회장은 ‘정준양 사장을 뽑았으면 한다’는 자신의 뜻을 명백하게 드러냈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사외이사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이구택 회장을 인터뷰한 직후에는 사외이사들 사이에서 정준양 사장에 대한 지지 의사가 압도적으로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1월29일 윤석만 사장의 폭로는 사외이사들이 이구택 회장의 ‘추천’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사회에서는 폭로의 내용을 검증하자는 제안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왜일까? 한 사외이사는 “이사들 모두가 윤 사장 발언의 정확한 함의를 평가할 만한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굳이 토론을 진행할 까닭이 없었다”고 말했다.

“2,3차 투표” “의장이 캐스팅보트” 엇갈려
지난 2월6일 포스코 차기 회장으로 내정된 정준양 포스코건설 사장이 서울 삼성동 포스코센터에서 열린 정기이사회에 앞서 박원순 당시 사외이사와 얘기하고 있다. 사진 연합 김주성

지난 2월6일 포스코 차기 회장으로 내정된 정준양 포스코건설 사장이 서울 삼성동 포스코센터에서 열린 정기이사회에 앞서 박원순 당시 사외이사와 얘기하고 있다. 사진 연합 김주성

하지만 외압 의혹이 폭로된 상황에서 전임 회장이 후임자를 ‘공개 지지’한 데 대해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넘어가도 되는 것일까? CEO 추천위 의장을 맡았던 서윤석 이화여대 경영대학장은 이에 대해 “경영 승계의 모범으로 꼽히는 GE의 경우를 봐도 잭 웰치가 이멜트를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았느냐”면서 “사외이사들은 당연히 전임 경영자의 의견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첫 투표에서 윤 사장을 지지했다고 밝힌 한 사외이사는 “GE는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 회장 후보로 뽑힌 이멜트가 오랜 기간 잭 웰치 밑에서 경영수업을 쌓은 사례이기 때문에, 외풍에 휘둘려 사임하는 회장이 특정 후보를 지지한 포스코와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꼬집었다. 반면 정 사장을 지지한 사외이사 중 한 명은 “외압이 정말 대단했다면 윤 사장이 추천위의 면접 장소에 나왔을 리가 있느냐”고 반박했다. 한편 윤석만 사장 쪽에선 당시 이구택 회장이 정준양 사장 지지 발언을 한 부분에 대한 법적 대응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하나 의문이 이는 대목은 이후 진행된 투표 과정이다. 아직까지 이에 대해선 정확한 내막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포스코 내부의 지배구조 관련 자료를 보면, CEO 추천위는 ‘사외이사 9명 전원으로 구성되며, 과반 찬성으로 의결(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런데 사외이사들의 설명은 포스코 쪽과 큰 차이를 보인다.

한 사외이사는 “맨 처음 4 대 4라는 투표 결과가 나왔고 이후 CEO 추천위에서는 별다른 의견 개진 없이 2차, 3차 투표가 진행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외이사는 “세부 의결 절차는 추천위에서 결정하기로 돼 있으며, 2차 투표에서 과반수가 나왔지만 절대다수가 투표할 때가지 진행하자는 한 사외이사의 제안에 따라 3차투표가 진행됐다”고 밝혔다. 윤 사장을 지지했다는 한 사외이사는 “당시 CEO 추천위에는 무기명 투표로 할지, 다수결로 정할지 같은 투표 진행과 관련한 기본적인 사항도 미리 정해진 게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윤석만 사장 쪽의 또 다른 인사는 “추천위의 표결이 4 대 4로 팽팽하게 맞서자 추천위 의장이 ‘캐스팅보트’를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CEO 추천위의 절차상 문제는 없었던 것일까? 선임과정에 연관된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있어 확인하기가 쉽지가 않다. 하지만 선거 당시 윤석만 사장 진영에 섰던 한 인사는 “추천위 선임 과정에서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한 법무법인에게 검토를 의뢰해봤더니 문제가 있다고 답변해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포스코 쪽은 “CEO 추천위 세부 의결 절차는 추천위 스스로 결정한다”며 법적·절차적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제도가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

CEO 추천위가 이렇듯 베일에 싸여 있는 상황에선 추천위 자체에도 외압이 가해지지 않았겠느냐는 의문도 고개를 든다. 회장 선출에 참여한 사외이사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을 상대로 한 정치권 등의 압력은 없었다고 말한다. 적어도 CEO 추천위의 독립성은 지켜졌다는 말이다.

기업 지배구조 전문가들도 포스코 회장 인사 파동이 제도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포스코는 민영화를 앞둔 1997년 3월 국내 대기업으로는 최초로 사외이사제를 도입했고, 2003년 이후에는 이헌재 전 부총리가 회장으로 있던 한국이사협회와 장하성 교수가 이끌던 고려대 기업지배구조연구소의 연구용역을 통해 현재의 이사회 구조와 CEO 선출 시스템을 확립했다. 2006년 3월에는 사외이사 9명 전원으로 구성된 CEO 추천위를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 학장은 “포스코 인사 파동은 지배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라며 “그래서 한국은 미래가 없구나 하고 더 큰 실망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도 이기적이고 탐욕적이지만, 권력이 탐욕을 부리면 더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그는 경고했다.

그래서 기업 지배구조에 밝은 경제계 인사들은 포스코 인사 파동의 재발을 막으려면 이구택 전 회장에 대한 외압이 명백하게 규명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6년은 해야 한다”며 임기를 채우겠다는 의지를 밝혀왔던 이구택 전 회장이 돌연 사퇴 결심을 하면서 인사 파동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당시는 이주성 전 국세청장을 수사 중인 검찰이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과 관련해 이 회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던 때였다.

CEO 추천위 발언록 낱낱이 공개해야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사외이사들이 그동안 이사회의 안건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렸으며, 각자의 성과에 대해 어떤 보상을 받았는지가 명확하게 공개돼야 한다”면서 “논란을 부르고 있는 CEO 추천위에서 어떤 발언들이 오고 갔는지 낱낱이 밝혀진다면 이번 인사 파동의 재발을 막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굴욕으로 점철된 포스코 역사
정권 바뀔 때마다 칼날… 민영화 뒤도 여전


역사는 비슷하게 되풀이된다. 이른바 ‘DJP 연대’를 통해 박태준 명예회장(당시 자민련 총재)의 발언력이 다시 강화된 1998년 당시, 포스코는 감사원의 대대적인 감사를 받은 바 있다. 60여 명의 감사 인력이 75일 이상 감사에 매달렸을 정도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박태준 당시 자민련 총재와 유상부 회장 등 ‘TJ 사단’이 감사원 감사를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김만제 전 회장 체제의 흔적을 지울 기회로 여기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사정의 칼날’이 포스코 길들이기의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포스코가 민영화된 2001년 이후에도 ‘외풍’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포스코 민영화를 이끌었던 유상부 전 회장은 CEO 연임 여부를 결정할 주주총회를 하루 앞둔 2003년 3월13일 임원 후보에서 물러난다고 전격 발표했다. 당시 사정에 밝은 참여정부의 한 전직 장관은 “유 전 회장은 사외이사 선임 등 지배구조에 문제점이 드러나고, 타이거풀스 주식 고가 매입 건으로 배임 혐의로 기소된 상태여서 교체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유상부 전 회장은 최근 과의 긴 대화에서 “솔로몬이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고 간증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그가 말한 ‘간증’은 솔로몬이 다윗왕에게 바칠 반지에 새겨넣은 글귀로, 승리에 도취되거나 절망에 함몰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현 정부 들어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참여정부 때 임명된 사외이사들에 대해서도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김용태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해 9월29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기관들로부터 입수한 ‘노무현 정부 및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취업 현황’과 월급여 명세를 공개했다. 박원순 변호사에 대해서는 포스코 사외이사와 웅진 비상임이사, 풀무원홀딩스 사외이사를 겸임하고 있다고 적시했다. 보수단체들은 포스코가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연수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것을 문제 삼기도 했다.
오비이락일까. 올 들어서는 포스코를 비롯해 KT, KT&G 등 과거 공기업이었던 민간기업 사외이사에 대한 ‘낙하산 인사’가 계속되고 있다. 정준양 회장이 들어선 뒤인 지난 2월 포스코의 새 사외이사로 이명박 대통령 후보 정책자문단 출신인 유장희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자문위원이던 김병기 전 삼성경제연구소 대표가 영입됐다.
사외이사 제도의 도입은 한국 기업들의 투명성 제고에 큰 역할을 했지만, 역설적으로 사외이사들만 특정 성향을 가진 인사들로 채우면 경영권까지 덤으로 얻는 기업들도 많아졌다. 포스코, KT, KT&G 등이 모두 그런 사례다.
민간기업의 CEO는 물론 사외이사 선임까지 정권 다툼의 전리품이 된 듯한 현실을 되풀이하지 않게 만들 방법은 없을까? 일부에선 포스코의 외국인 지분 비율이 40%를 넘는다는 점을 들며 “시장에 맡기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를 만드는 등 주주행동주의를 실천하는 대표적 인물인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 학장마저도 “먼 나라에 있는 외국인 주주나 정부의 눈치를 볼 수 있는 기관투자가들이 정권 차원의 개입을 막기는 힘들다”고 단언한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결국 ‘사람’의 문제를 막아낼 투명성 확보 수단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