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어른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크기의 은빛 원통을 부채꼴로 흔들 때마다 한마디씩 잔잔하게 흐른다. “이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보령제약이 TV에 진해거담제인 ‘용각산’ 광고를 처음 내보낸 건 1973년이었다. 이 광고는 그 뒤 20년 이상 이어지며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됐다. 40대 이상들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광고 문구일 뿐 아니라 한국 광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명카피로 자주 거론된다.
회사 쪽은 용각산 광고 문구는 제품의 과학적 특징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용각산은 유효성분 가루를 미립자 크기로 만들어 균일하게 분포시킨 약입니다. 목에서 머무는 시간을 길게 함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죠.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미세한 분말임을 쉽고 재치 있게 표현한 카피였습니다.”(권영상 과장) 제품의 특징을 제대로 반영했기 때문인지, 용각산 광고는 세간에 화제를 뿌리며 제품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회사 쪽 설명에 따르면 화제의 광고 문구는 당시 30대 후반이던 창업자 김승호(74) 회장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광고 업무를 맡았던 ‘선전과’와 광고기획사인 제일기획에서 공동 작업을 하던 중에 우연찮게 떠올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기침, 가래, 인후 염증, 목쉼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용각산은 1967년 6월 첫 발매 뒤 지금까지 39년 동안 팔려나간 물량은 7100만 통에 이른다. 판매된 용각산 제품의 용기(직경 5.5cm, 25g 기준)를 한 줄로 이어놓으면 총 3905km로 한반도(1천km)를 두 번가량 왕복할 수 있는 거리다. 내용물의 무게는 1775t에 이른다. 1996년 2월에 실은 신문 광고를 끝으로 마케팅 활동을 중단했음에도 연간 40억원 안팎의 매출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진해거담제 시장의 점유율은 50%를 웃돈다.
일본회사 류카쿠산(龍角散)이 개발한 용각산은 일제시대부터 국내에 들어와 널리 소개됐던 약이다. ‘용의 뿔을 갈아서 만든 가루’라고 할 정도로 진귀한 약이라는 뜻이었다. 용각산은 해방 뒤 일본을 오가는 이들이 소량으로 들여오거나 밀수를 통해 조금씩 거래됐다고 한다.
1963년 보령제약을 창업한 김승호 회장이 용각산 제조 기술을 국내로 들여오기로 마음먹은 것은 시대 상황의 반영이었다. 공업화에 따른 공해 문제로 기관지 계통의 질병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던 때에 꼭 필요한 시의적절한 의약품으로 용각산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초창기 일본 쪽과 벌인 기술제휴 협상에선 난항을 거듭했다. 김 회장의 보령제약은 1966년 말에야 일본 쪽과 겨우 제휴계약을 맺기에 이르고, 이듬해부터 용각산을 생산하게 된다. 처음엔 “일본 약으로 돈 벌려 한다”는 구설과 조악한 포장으로 별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용기와 포장을 바꾼 데 이어 거리로 소비자를 찾아가는 마케팅, 화제의 광고 문구에 힘입어 차츰 자리를 잡았다. 기본 원료인 도라지 추출 생약 성분은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으며, 브랜드 사용료로 일본 쪽에 일정액의 로열티를 지급하고 있다.
보령제약은 2002년 1회용 스틱 포장으로 된 과립형의 ‘용각산 쿨’을 내놓았다. 지난해 팔려나간 용각산 쿨은 5억원 어치로 용각산(40억원)보다는 훨씬 적다. ‘소리가 나지 않는’ 용각산에 대한 향수가 여전히 강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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