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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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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산] 모두의 손을 잡고 가는 길, 죽음

등록 2004-04-29 00:00 수정 2020-05-03 04:23
유현산 기자의 호스피스 자원봉사 한달의 체험… 죽음 앞에서 되새겨 보는 용서 · 화해 · 인내의 의미

말기암 환자와 보호자들을 보살피는 호스피스 자원봉사 체험. 호스피스 병동은 ‘죽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 ‘행복한 죽음’을 위해 모두가 손을 잡는 곳이다.

글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덜 용서받은 자는 덜 사랑한다.” 이 인상적인 문구가 걸려 있는 계단을 지나면 흰색 대신 연두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진 병동 복도와 마주친다. 아늑한 느낌을 주는 복도는 암과의 싸움이 아니라 화해를 이야기하고 있다. 6개 남짓한 병실마다 피부와 뼈밖에 남지 않은, 혹은 온 얼굴이 청동빛으로 변한 환자들이 안식을 구하고 있다. 이 병동의 주인은 침묵이다. 이따금 산소호흡기 소리나 구토 소리, 작은 흐느낌 등이 흘러나온다. 서울 청량리 성바오로 병원 7층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서면, 우리는 모두 겸손해진다.

3월24일- 고통은 마음이 결정한다

“보이는 것만 해주지 말고 환자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자원봉사 담당 벨다(49) 수녀는 말했다. 그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자신없는 일이었다. 내가 맡은 환자는 24살의 이현정씨와 42살의 김화숙(가명)씨였다.

이현정씨는 대장암이 난소와 췌장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뼈만 남은 몸이지만 고등학생으로 착각할 만큼 해맑고 예쁜 얼굴이었다. 통증이 심해서 모르핀을 맞고 하루 종일 잠 속에 빠져 있었다. 가끔 깨면 어머니를 붙잡고 흐느꼈다. 그는, 겨우 스물넷이다.

김화숙씨는 위암이 복강 내로 전이돼 장기마다 암덩어리로 가득 차 있었다. 병실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음료수를 꼭꼭 챙겨줄 만큼 상냥한 성격이지만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 김씨가 쉴 새 없이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할 때마다 나는 그를 부축했다. 고통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찾아온다. 따라서 호스피스는 통증과 마음을 함께 보살핀다. 김씨의 불안은 외로움이 만든 것이다.김씨는 2년 전, 재혼한 지 6개월 만에 암을 발견했다. 현재의 남편과도 사이가 멀어져서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착한 아들이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김민정(53) 병동과장은 환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늘나라는 정말 좋은 곳이지만 가기 힘들어요. 마음을 굳게 먹어야 됩니다. 우리에게 그걸 보여주세요.” 그러나 김씨는 아직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줄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영국의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는 임종에 가까운 환자의 죽음에 대한 반응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으로 분류했다. 김씨는 아직 수용 단계에 이르지 못한 듯 보인다. 오후에 김씨를 휠체어에 태워 병동과장실로 데려갔다. 과장이 “가족과 사이는 어때요?”라고 묻자 김씨는 “별로 안 좋아요”라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과장은 휴지를 꺼내 그의 마른 손에 쥐어주었다.

하루 종일 잠자던 이현정씨가 깨어 부침개를 먹기 시작했다. 장폐색 상태라 음식물이 내려갈 방도는 없었다. 잠시 뒤 그는 엄청난 양을 토했다. 식욕은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환자는 먹고 바로 토하거나 토할 힘이 없으면 관을 집어넣어 음식물을 빼낸다. 어쨌든 식욕은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3월25일- 저 세상으로 건네주는 산파들

김민정 병동과장은 호스피스가 가장 발달된 영국에서 연수를 받은 몇 안 되는 의사다.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했고 늘 공포 속에 있는” 환자들을 위해 가운을 입지 않는다. 그는 내과의 시절이 참 불행했다고 회상한다. 환자가 너무 괴로워하고 치료할 방법은 없으니, 그냥 도망가고 싶었다. 당시엔 그의 존재 자체가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김 과장은 호스피스 병동은 죽으러 가는 곳인 줄만 알고 기피하는 한국에 절망하면서도 지금 의사로서의 삶이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의사, 간호사, 사회사업가, 사목자, 자원봉사자로 이루어진 호스피스팀은 김 과장의 말을 빌면 ‘산파’다. 사람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도와주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전에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이현정씨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몇 시간 뒤 옆 병실에서 26살의 여환자가 이현정씨를 보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방문했다. 다시 잠에서 깬 현정씨는 환자를 보자 눈물을 쏟았다. “언니, 아픈데 왜 왔어.” “또 올게.” 대화는 단 두 마디였다. 이 환자는 일주일 뒤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는, 겨우 스물여섯이었다.

김화숙씨의 상태는 점점 나빠져갔다. 그는 손목 위에 놓인 링거줄마저 무거워했다. 계속 일어났다 누웠다를 반복하는 김씨를 부축하며 나는 그가 비로소 먼 항해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3월30일- 어머니의 마음

“다윗의 외아들이 병이 났대요. 다윗은 삼베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사죄하며 먹지도 않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했대요. 그런데 아들이 죽었어요. 신하들은 다윗이 충격받을까봐 얘기를 안 했죠. 그런데 어느 날 방에서 나와 아들이 죽었냐고 묻더래요. 신하들이 그렇다고 하자 다윗은 다시 깨끗이 옷을 갈아입고 다 당신의 뜻입니다라고 기도했대요. ”

이현정씨의 어머니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다.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는 이 병동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자원봉사 선배’로서 “오만하게 누굴 도와준다는 생각 대신 환자가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진심으로 대하라”고 조언해준 어머니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현정씨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졸랐다. 작은 산부인과 병원 간호사로 일했던 현정씨는 매우 씩씩하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1년6개월 전 대장암이 발견됐을 때도 해낼 수 있다고 오히려 어머니를 격려했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면서 꽃장식을 배웠다. 수술받고 통증 치료를 하면서도 틈틈이 꽃장식을 만들어 주변에 선물했다. 그의 머리맡에는 화이트데이 때 남자친구에게서 받은 장미꽃과 앙증맞은 악어인형이 놓여 있었다. “고통을 잘 견뎌서 희망으로 인내하고 아플 때마다 예수님께 봉헌해라. 주위에서 기적도 봤고, 그래서 믿는다. 좀더 강해지고 힘들지만 아프다고만 하지 말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라.” 나는 수첩을 꺼내 어머니가 현정씨에게 남기는 말을 받아적었다.

벨다 수녀님은 현정씨가 떠난 뒤 어머니가 매우 힘들어할 것 같다고 걱정했다. 호스피스는 보호자들이 슬픔을 극복하고 일상에 복귀할 수 있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관리한다. 대개 사후관리는 1년 정도면 된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자녀를 보낸 경우에는 매우 어렵다.

김화숙씨는 며칠 만에 전혀 딴 사람이 돼 있었다. 그는 오늘 외롭지 않았다. 아들, 현재 남편, 언니, 친정 부모님 등이 와서 그를 보살피고 있었다. 김씨는 불안하게 몸을 뒤척이지도 않고 한숨도 쉬지 않고 사람들과 활발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병실을 나서며 내가 인사를 하자 그는 큰 소리로 나를 붙잡았다. “음료수 먹고 가요!” 이것이 그가 내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4월1일- 용서가 우리를 구원하리라

용서. 용서에 대해 배운다. 이 흔한 단어는 생의 한순간에 절실하게 빛을 발한다. 병동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통곡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40살의 여성이 막 숨을 거뒀다. 고통에서 해방된 임종 환자의 얼굴은 평안하고 아름다웠다. 수녀님은 누에고치를 싸듯 시트로 꼼꼼히 주검을 감쌌다. “엄마 잘 가.” 여덟살쯤 돼 보이는 아들과 그보다 더 어린 딸이 다가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모두들 오랫동안 준비해온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친정 어머니의 눈물은 그 이상이었다.

이 여성은 남편과 극심한 불화를 겪었다. 임종이 목전에 다가올 때까지 남편은 병실을 찾지 않았다. 그녀는 임종이 가까워서야 병실을 찾은 남편에게 용서를 구하고 훨훨 세상을 떠났다. 친정 어머니는 사위에 대한 원망에 몸부림치며 통곡했다.

김민정 과장은 “호스피스 병동에 근무하면서 수없이 봐온 광경”이 있다고 말했다. 환자들은 죽기 직전에 등을 돌렸던 남편이나 부모, 자식, 형제들을 반드시 부른다. “육신의 욕망이 모두 사라지면” 환자들은 용서를 베풀고 구한다. 가족은 증오의 뿌리이기도 하다. 이 질긴 증오는 죽음의 순간에 극복된다. 누구나 성자가 돼야 하늘나라로 떠날 수 있다.

김화숙씨는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어, 수녀님의 표현대로 “한 발은 저승에 한 발은 이승에” 발을 담근 상태였다. 자꾸 집에 가자고 했다. 어젯밤에는 잠에서 깨어 자신이 저승에 갔다 왔다고 말했다. 수녀님은 “그래, 집에 가야지. 아프지도 않고 편안한 집에”라며 그를 달랬다. 숨과 숨 사이가 하도 뜸해서 그가 숨쉬지 않을 때마다 불안이 엄습했다. 나는 혈관이 다 비치도록 부어오른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동공이 풀린 눈은 허공을 향했다. 무엇을 생각하는 걸까. 무엇을 보는 걸까.

김씨는 얼마 전 그가 마지막으로 용서를 받고 구할 대상, 전남편을 불러달라고 했다. 오후에 마침내 전남편이 찾아왔다. 아들이 자꾸만 정신을 놓으려 하는 김씨를 안고 “엄마, 아빠 왔어. 보여?”라고 물었다. 김씨는 전남편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용서의 제의가 끝났다. 임종 24~48시간 전에 환자는 극심한 불안과 함께 식은땀, 열, 가래 등의 신체적 변화가 온다고 한다. 김씨는 편안한 임종을 위해 안정제를 맞았다. 침상에 커튼이 쳐지고, 그 커튼 사이로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상냥하고, 멋쟁이이며, 운동을 좋아했던 김화숙씨는 사흘 뒤 세상을 떠났다.

4월6일- 환자들의 위대한 가르침

자원봉사자들은 병실을 찾을 때마다 극과 극을 오가는 환자의 상태에 놀라곤 한다. 현정씨는 집에 다녀온 뒤 상태가 갑자기 좋아졌다. 사진기자가 들러 호스피스팀과 현정씨의 사진을 찍었다. 포즈를 취하기 전, 현정씨는 어머니의 립스틱을 빌려 정성스럽게 입술에 발랐다. 오랜만에 병실에 활기가 돌았다.
현정씨는 그동안 진통제에 취해 있어서인지 내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아뿔싸. 내가 머쓱해서 딴 곳을 쳐다보고 있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론 기억할 테니까 그런 불쌍한 표정 짓지 마세요.” 상태가 좀 나아지자 계속 사람들을 웃겼다. 문병을 온 어머니 친구들이 선물을 전해주고 현정씨의 짐 일부를 집에 가져가려고 하자 “조금 주시고 많이 가져가시네요” 하는 식이다.
나는 통증이 다시 고개 드는 현정씨를 부축해 병동 복도를 산책했다. “산에 꽃이 어찌나 많이 피었던지…” 그는 가족들과 꽃구경 간 일을 자랑했다. “탤런트들은 키가 쥐똥만하다면서요?” 이런 엉뚱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래도 쥐똥보단 클 거라고 대답했다. 그는 쥐똥은 키가 작은 나무의 이름이라고 일깨워주었다. 제주도에서 쥐똥나무를 직접 봤다고 한다. 그는 탤런트의 키가 아니라 건강했던 시절 제주도에서 본 나무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병실에 돌아와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가족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물었다. “유치하게 애인한테 엄마한테 뭐 보고 싶다 사랑한다 그런 말 해야겠어요? 이렇게 써줘요. 우리 빨리 나아서 집에 갑시다. 짠~” 이 말과 함께 손으로 V자를 그렸다. “짠~도 넣어드려요?”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현정씨는 지금 자신이 ‘이 꼴’인데 얼굴이 어려 보이면 뭐하냐고 한탄했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의 씩씩한 모습은 용기, 인내, 희망 등 교과서에나 나오는 가치들이 삶 속에 현존하고 있음을 가족과 병동의 모든 사람에게 가르쳐주었다. 한 자원봉사자는 항상 웃음으로 자신을 맞이하고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황인데도 떠날 때면 사탕을 한 움큼씩 집어주던 간암 환자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는 환자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호스피스팀은 심신이 쉽게 소진되게 마련이다. 외국에는 호스피스 팀원들만을 따로 상담하는 스태프들이 있지만, ‘척박한 한국’에서 팀원들은 환자에게 힘을 얻는다. 환자의 고통은 무의미하지 않다.

4월13일- 죽음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의사, 수녀,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한 팀회의를 마치고 병실에 들어서자 현정씨는 나를 보고 “아줌마, 머리 잘라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구토할 힘이 없어 코에 관을 꽂고 음식물을 먹음과 동시에 빼내고 있었다. 관에 연결된 링거병이 곧 음식물과 체액으로 가득 찼다. 5일 전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밖에서 보니 좀 깔끔해 보인다”며 나를 웃겼던 현정씨는 정신을 놓아버렸다.
현정씨가 잠들자, 어머니는 성경책을 들고 기도실로 향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 현정씨 옆을 지켰다. 병실은 고요했다. 반쯤 열린 창문에서 봄바람이 기분 좋게 뺨에 와 닿았다. 현정씨의 숨소리를 들으며 반쯤 잠에 취했다. 옆 침대 환자의 보호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 다음엔 아프지 말고 좋은 데서 태어나”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몽롱한 상태로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할까를 생각해보았다. 전에는 갑자기 사고로 죽거나 자다 세상을 떠나는 것이 최고의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떠나는 자와 남는 자 모두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게 고개를 꾸벅이며 어머니가 올 때까지 앉아 있었다.

4월15일-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언젠가 러시아 소설에서 호기심 많은 어부의 이야기를 읽었다. 궁금한 것은 반드시 밝혀내야 하는 그 어부는 어느 날 죽음이 궁금해졌다. 온 세상을 돌아다녔지만 죽음에 대해 아는 현자는 없었다. 결국 미칠 것 같은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 그는 호수에 뛰어들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병상과 통증과 모르핀과 용서와 평안은 우리가 가야 할 멀고 먼 길이다. 죽음은 그가 사랑했던 혹은 증오했던 모든 사람의 손을 잡고 가는 길이다. 우리는 쉽게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단단해져야 한다. 그래야 떠나는 사람들이 우리를 밟고 건널 수 있다. 호스피스는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튜브를 꽂고 의사의 선고를 기다리는 우리의 ‘근대적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총선 투표일이다.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나는 병실의 봄햇살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산 사람들의 발걸음도 죽음의 과정과 같아야 하지 않을까. 좀더 겸손하게 더 많은 사람들의 손을 잡고 가야 하는 것 아닐까.
2004년 4월23일 낮 12시45분 눈부시게 화창한 날, 24살의 이현정씨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미 많은 소중한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어머니는 다윗처럼 씩씩하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얼마나 아팠니. (간암으로 먼저 세상을 뜬) 아버지랑 잘 만나라. 엄마도 나중에 갈게.”


“국가가 호스피스 센터를 만들라”

[인터뷰 | 김민정 성바오로 병원 호스피스 병동과장]
-호스피스와 내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종양내과는 암환자를 공격적으로 치료하는 곳이다. 호흡기 달고 누운 환자에게 계속 주삿바늘을 찌른다. 살날이 3개월 정도 남은 환자를 받는 호스피스는 암과 공존, 화해해야 한다. 임종을 앞둔 환자는 링거줄 하나도 무거워한다. 옷이 무거워서 벗어야 할 정도다. 호스피스는 피곤한 검사를 해대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팀으로 움직이며 환자의 영적 부분까지 간호한다. 사람들이 호스피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지 못하고 ‘죽으러 가는 곳’으로만 아니 힘들다.
-호스피스 병동 운영의 어려운 점은.
=시스템의 문제가 크다. 호스피스 병동은 돈을 벌지 못하니 지원도 적을 수밖에 없다. 한국에 호스피스 병동이라야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다. 선진국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보다 소득수준이 낮은 말레이시아도 호스피스가 발전돼 있다. 말레이시아 호스피스센터만 해도 의사가 7~8명이 넘는다. 30%는 국고로, 70%는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후원금 없이는 호스피스가 존재하기 힘들다. 암치료에 전 재산을 쏟아붓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이 오면 사회사업과에서 도와주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럴 때 후원금이 절실하다. 정부도 전혀 지원을 하지 않는다.
-정부의 호스피스 제도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시범사업기관 선정은 별로 효과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가 호스피스센터를 설립하는 일이다. 호스피스가 발전된 나라들에는 다 존재한다. 그것 하나만 있으면 의사들 교육도 해결된다. 단 하나라도 있으면 좋겠다. 그 외에 호스피스 가정방문 간호사가 제도화돼야 한다. 일반 가정방문 간호사는 있지만 호스피스 가정방문 간호사는 제도화돼 있지 않다. 호스피스 간호사는 환자의 사회·경제·영적인 부분을 다 살피고 전문가와 협력해 모든 결정을 한다. 방문 때마다 시간도 많이 필요하니 보수를 적절히 지급해야 한다. 국제보건기구가 정한 호스피스 과정에서 간호사가 300명 이상 배출됐을 것이다. 그 사람들을 제도화해야 한다. 또한 완화의료에 쓰이는 약품 중에는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는 것이 너무 많다.
-의사 배출은 잘 되고 있는가.
=의대 과정에 강의가 없다. 호스피스를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이 없는데, 누가 가르치겠나. 한국 호스피스학회가 만들어진 것이 1997년이다. 대부분 종양내과, 가정의학과 출신 의사들이다. 전문적으로 공부하려면 개인이 외국에 나가야 한다.
(성바오로 병원 호스피스 병동 후원금 기부 문의: 02-958-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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