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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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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만 갉아먹는 ‘인생역전’

등록 2004-01-16 00:00 수정 2020-05-03 04:23

정부가 손쉽게 저소득층 호주머니 털 수 있는 사행산업, 매년 쑥쑥 성장하다

로또복권 1등 당첨금을 축소하자는 제안이 나오면 즉각 비난과 항의가 빗발친다. “로또에 꿈을 걸고 사는 서민의 희망을 없애지 마라”는 것이다. 국회의원이든 정부 당국자든 로또를 건드렸다가는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한다. 과연 인생역전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꿈이고, 이 꿈은 키워줘야 하는 것일까?

재정수입 2002년보다 1조원이나 늘 전망

로또·경마·경륜·경정·강원랜드 카지노 등 5대 도박산업에서 국가가 거둬들이는 재정수입을 따져보면 사정이 조금 달라진다. 물론 단 한방으로 신세 고칠 수 있다는 서민의 꿈과 국가의 재정수입이 서로 무슨 상관이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서민과 저소득층이 주요 고객인 도박산업에서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올리는 재정수입 규모를 보면 한탄이 절로 나온다. 사실 세금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래서 거위가 울지 않게 거위 깃털을 몰래 뽑는 게 훌륭한 과세기법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도박산업은 정부가 저소득층한테서 별다른 조세저항 없이 엄청난 세금을 손쉽게 거둬들이는 좋은 수단이 되고 있다.

한국레저산업연구소에 따르면 경마 등 5대 도박산업의 2003년 국내 시장규모(총 매출액)는 15조8817억원으로 2002년에 견줘 14.1%, 2000년에 비해서는 2.4배나 커졌다. 지난 한해 1인당 하루평균 베팅액(도박산업 총 베팅액/20살 이상 인구)은 45만4200원으로 2002년보다 12.4% 증가했다. 고객들이 도박장에서 날린 돈도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 지난해 고객 총 손실액은 5조3768억원으로 2002년보다 31.8%나 급증했다(표1 참조). 특히 로또 열풍 덕에 복권에서만 고객들이 약 2조1천억원(각종 복권 포함)의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됐다. 지난해 말까지 로또 총 누적판매액이 당초 추정치(3600억원)보다 10배 이상 급증한 3조8천억원(2003년 11월 말까지 총 누적판매액 3조5654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기 때문이다.

고객 손실액이 늘어나면 당연히 정부 재정수입은 그만큼 더 증가한다. 도박산업에서 거둬들이는 재정수입은 얼마나 될까? 한국조세연구원에 따르면, 로또가 시작되기 전인 2002년 도박산업에서 올린 재정수입(조세+기금 등)은 2조8027억원에 달한다(표2 참조). 종목별로 다르지만 대체로 도박장 매출액의 20% 정도가 지방세·국세·기금 등 각종 재정수입으로 잡힌다. 2003년의 경우, 정확한 추계는 아직 안 나왔지만 로또 누적매출액을 3조8천억원으로 추산할 때 로또에서 발생한 정부 수익금(재정수입)은 1조2350억원(로또 판매총액 중 50%는 당첨자 상금으로, 나머지 50% 중 30.25%는 정부 부처 기금으로 배분됨)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지난해 도박산업 재정수입은 2002년보다 1조원가량 더 늘어난 3조8천억원대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부동산 세금 인상을 둘러싸고 온갖 논란이 벌어졌는데 이 와중에서 걷힌 종합토지세는 1조5천억원이다. 비싼 땅을 많이 가진 부유층한테 욕먹으면서 고생 고생해 징수한 세수가 복권으로 걷은 세금보다 더 적은 셈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도박산업을 통해 정부가 손 안대고 코푸는 식으로 막대한 재정수입을 간단히 올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소득층 돈이 부유층에게 이전

2002년 도박산업 재정수입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레저세를 비롯한 지방세 수입(1조6637억원)이다.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2004년 전체 지방세 예산 28조8천억원 가운데 경마·경륜·경정·소싸움에 붙는 레저세가 1조1066억원(지방세 예산의 3.8%)에 이른다. 마권 등 경기 투표권을 살 때마다 총 베팅금액의 10%가 레저세로 부과되는데, 정부는 2002년에 옛 경주마권세를 레저세라는 포괄적 명칭으로 바꿨다. 앞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모든 도박산업에 지방세를 부과할 수 있는 채비를 갖춘 것이다. 행자부 관계자는 “징수 비용에 비해 세 수입이 상당히 많이 들어오는 게 사행산업 재정수입”이라며 “다른 세금은 세금고지서와 독촉장도 보내야 하고 세원 파악 작업도 해야 하지만 사행산업은 간편하고 수월하게 세금을 물릴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실 일반 조세나 국채 발행은 한계를 갖고 있는 반면, 도박산업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별다른 저항 없이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는 훌륭한 세원이다. 특히 경기가 불황일수록 일반 과세를 통한 재정수입 확충은 어려움이 있지만 도박산업은 오히려 불황에 강하기 때문에 더 매력이 있다. 고대 로마제국은 폐허화된 로마의 복구자금 조달 수단으로 복권을 팔았고, 일본도 2차대전 직후 복구사업 자금 마련을 위해 공영갬블을 도입했다.

그러나 합법 도박산업을 이용한 재정수입 확대는 국민들 그것도 서민들의 대박 심리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도박산업의 가장 큰 수요자라는 점에서 저소득층의 호주머니를 털어 세수를 늘린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한국조세연구원 김정훈 연구위원은 “합법 도박산업을 통해 건전한 오락과 레저를 유도한다지만 그에 못지않게 상당한 재정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점도 카지노 같은 도박산업을 정부가 허용하는 주된 이유”라고 말했다.

도박산업에서 거두는 재정수입은 건강에 나쁜 담배를 독점판매하고 거기서 재정수입을 확보하는 담배세와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역진세다. 부유층에 비해 저소득층이 거꾸로 소득의 더 큰 부분을 세금으로 납부하고 있는 것이다. 로또복권의 수익금은 국민임대주택 건설과 영세민 전세자금 지원 같은 서민층 지원사업에도 쓰이지만 과학기술 지원·산림환경보전사업·체육시설투자 지원 등 꼭 서민층만을 겨냥한 용도라고 볼 수 없는 곳에 쓰이는 돈도 많다.

도박산업에서 거둬들인 세금의 편익을 부유층도 함께 누리는 격인데, 소득재분배 효과를 노리고 도박산업이 허용된 건 아니라 하더라도 오히려 저소득층이 낸 세금이 부유층에게 이전되는 양상마저 띠고 있다. 정부가 “도박산업 재정수입은 공익사업에 쓰이고 있다”고 명분을 늘어놓는 건 재원의 출처가 저소득층이라는 데서 비롯되는 ‘취약한 정당성’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흥미로운 건 주로 부유층이 소비하는 상품에 물리는 사치세가 도박장에 입장할 때도 부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입장료의 경우 강원랜드 카지노는 3500원, 경마는 500원, 경륜은 200원의 특별소비세가 붙는다. 도박장 출입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민들이 부유층이 주로 무는 특별소비세까지 물고 있는 것이다.

지자체들 도박산업 유치경쟁 치열

도박장 고객의 대다수가 저소득층이라는 사실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한국마사회에 따르면 2002년 경마고객 가운데 소득수준이 월 300만원 이하인 사람이 56.0%(200만원 이하 26.2%, 201만∼300만원 29.8%)로 나타났다. 경륜의 경우에는 월 소득 200만원 이하 고객이 73.1%를 차지했다. 조세연구원 김정훈 연구위원은 “고소득층이 과도한 갬블링을 하는 사례가 자주 보도되고 있지만 평균적으로 저소득층이 많고, 외국의 연구결과를 봐도 갬블링을 하는 상당수가 저소득층등 소외계층”이라고 말했다.

한국레저산업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복권을 제외하고 경마·경륜·경정·카지노장을 찾은 연간 이용객은 2516만여명으로 추산됐다. 새해가 되면 술·담배를 끊겠다고 작심하는 사람은 많지만 도박 끊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박하는 사람이 적어서가 아니라 바깥에 드러내놓고 “나 도박하는 사람이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2002년 한국마사회와 국민체육진흥공단이 용역의뢰한 ‘병적 도박 실태조사 및 치료 프로그램’ 보고서(전국 18살 이상 성인남녀 1천명 대상 표본조사)를 보면 도박 중독의 위험이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300여만명(전체 성인 인구의 9.3%)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도박 중독자 치료 단체인 ‘한국 단도박 친목모임 본부’ 관계자는 “회원 대다수가 서민들인데 경마에 손댔다가 돈을 못 따니까 경륜으로, 또 경정으로 계속 옮겨다니고 그러다 패가망신한 뒤 찾아오고 있다”며 “정부가 있는 사람들한테 세금 뜯어낼 생각은 않고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앉아서 세수를 올리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이 늘고 이에 따라 도박산업 매출이 해마다 껑충 뛰면서 거둬들이는 정부 재정수입도 급증하고 있지만, 이는 한탕을 노리는 도박꾼 자체가 늘어서라기보다는 정부가 도박산업을 고삐 풀린 자유방임시장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1인당 베팅 한도(경마 10만원·경륜과 경정 5만원·강원랜드 10만∼30만원)도 제대로 통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세수 확대’라는 이름 아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도박장 유치경쟁을 벌이면서 온 나라를 도박공화국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국내 도박장은 경마·경륜·경정장과 40여곳의 장외사업장, 그리고 카지노 등 51개에 달한다. 서울경마공원과 제주경마공원에 이어 내년에는 부산경남경마공원이 문을 열 예정이고, 서울잠실경륜장·창원경륜장·부산금정경륜장에 이어 전남·광주·대전에서도 경륜장 유치를 요구하고 있다. 전국 대도시마다 경마·경륜 장외사업소가 성행하고 있고, 여름에는 야간 경마까지 하는가 하면 경마장이 쉬는 날에는 경륜장이 서고 경륜장이 쉬면 또 경정장으로 몰려가는 등 밤낮 가리지 않은 채 하루도 쉬지 않고 합법적인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판인데도 정부는 2002년 ‘전통 소싸움 경기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소싸움도 돈 걸고 내기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에 발맞춰, 재정수입이 짭짤하다보니 지방자치단체들도 저마다 새로운 도박 종목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올 3월 경북 청도에서 소싸움장이 개장할 예정인데 전북 정읍도 소싸움장 허가를 받아둔 상태이고, 경남 진주시와 의령군은 소싸움장 유치를 놓고 한창 대립하고 있다. 농림부 관계자는 “지방재정 확충 효과가 없다면 자치단체에서 소싸움 경기장 사업계획서를 내지도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한편 강원도 제천시와 태백시는 경견(개 경주)을 추진 중이고 투계(닭싸움)를 도박산업으로 유치하겠다는 지자체들도 줄을 서 있다.

“환급률이라도 높여라”

한국레저산업연구소 서천범 소장은 “정부가 국민들한테서 쉽게 돈 긁어낼 궁리만 하고 있다”며 “국민들이 타고 있는 (도박) 기차에 엑셀만 있고 브레이크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경마·경륜·경정의 고객환급률(상금)이 우리나라는 70∼71%인 반면 일본은 74.4%, 홍콩 81.2%, 캐나다는 94.0%에 이른다”며 “정부는 고객환급률이 높아지면 그만큼 세수입이 줄어든다고 우려하지만, 필요악인 도박을 아예 전면 금지시킬 수 없다면 환급률을 더 높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인생역전의 꿈이 그리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도박장으로 향하는 서민들의 깃털은 알게 모르게 합법적으로 뽑히고 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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