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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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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충동 잠재운다

등록 2003-10-02 15:00 수정 2020-05-02 19:23

신경생물학 통해 자살 가능성 예측 기대… 뉴런 민감도 안정화하는 리튬에 관심 쏠려

한 개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재앙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몸에 있는 수백만개의 세포가 죽어가고 있다. 만일 죽어야 하는 세포가 죽기를 거부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죽지 않는 세포가 바로 종양이다. 죽어야 하는 세포는 ‘자살’(Apoptosis)을 통해 인체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이처럼 세포 자살로 생명을 유지하는 인간들이 요즘 치명적인 자살 바이러스에 급속히 감염돼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자살 사망자 수가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추월했다. 자살이 7위의 사망원인으로 하루에 2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국제자살방지협회(IASP)의 보고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40초마다 한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정말로 스스로 죽음의 문턱을 넘는 자기살해는 막을 수 없는 것일까.

자살자 양산국 진입… 세로토닌의 영향

최근 자살은 지구촌 전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전체 사망원인의 1%나 되는 자살은 인간의 10대 사망원인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특히 청소년에게 자살은 사망원인 2, 3위를 차지하는 ‘병 아닌 병’으로 불리기도 한다. 자살에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한 사람이 훨씬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문제의 심각성이 더한다. 부모와 형제, 자매 혹은 가까운 친척 중에 자살한 사람이 있을 경우 자살에 대한 가계력이 없는 사람들에 비해 자살 시도율이 2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정신질환 가계력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자살 시도 위험률은 약 50% 정도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사실은 자살에 유전적 요소가 크게 작용함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자살의 원초적 원인은 무엇일까. 생물학적으로 볼 때 자살에는 종족 보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 개체가 자살에 이르면 가까운 친족들은 남겨진 자원을 더욱 많이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흰개미는 자신의 보금자리를 노리는 적들에게 자신의 창자를 터뜨려 끈적끈적하고 더러운 내용물을 퍼붓는다. 어떤 두더지는 기생충에 감염되었을 때 전염을 막으려고 굴에 들어가 자연사에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죽음을 선택하는 게 항상 주변을 이롭게 하지는 않는다. 순간의 선택에 따른 자살은 대부분 주변을 슬픔의 도가니에 빠뜨린다. 단지 진화 과정에서 우울한 상태가 자연 선택되어 자살로 이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동물은 우울한 상태에서 감각이 예민해져 포식자의 침입을 알아차리기 쉽다. 그런 긴장이 지속되면서 우울증에 빠져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자살은 조울증처럼 감정의 기복이 심한 데 따른 결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자살이 진화론적으로 자연 선택된 결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자살에 이르기까지 인생경험이나 심한 스트레스, 심리적 요인들이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고려의대 안산병원 신경정신과 김용구 교수팀은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은 우울증 환자일수록 자살 위험이 높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예컨대 콜레스테롤 수치가 180아래에서 자살을 생각할 수 있고, 160아래이면 자살 위험이 높다. 그동안 자살에 관한 신경생화학적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신경전달 계통의 문제가 주요한 원인이라는 게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실제로 자살한 사람은 뇌 전전두엽 피질에 있는 뉴런의 수가 일반인보다 훨씬 적었다. 이로 인해 세포간 통신을 맡아 감정을 조절하는 세로토닌을 만들어 활용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뇌의 낮은 세로토닌 농도는 충동적인 성향을 조절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프로작 같은 항우울증 치료제는 세로토닌을 천천히 흡수하도록 유도해 시냅스에 오랫동안 남아 있도록 한다. 식욕감퇴제로 쓰는 펜플루라민 같은 약물도 세로토닌을 활성화하는 데 이바지한다. 세로토닌 수치는 혈액 검사로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세로토닌이 자살 충동의 결정적 요인이라면 혈액을 검사해 자살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 일노이노 대학 신경생물학자 간사이암 판데이 박사팀은 혈소판에 있는 세로토닌 수용체를 비교해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의 세로토닌 수용체 수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많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자살에 관한 신경생물학적 메커니즘이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세로토닌 수치만으로 자살 가능성을 단정하기는 힘들다.

이렇게 자살에 관한 신경생리학적 단서를 포착하면서 한편에서는 자살을 방지하는 약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근 가장 주목받는 물질은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리튬(lithium)이다. 고체 원소 가운데 가장 가벼운 리튬이 탄산 리튬이나 구연산 리튬 등 알약으로 조제돼 1990년대 초반에 조울증(양극성 장애) 처방의 80%나 차지할 정도로 많이 쓰였다. 그런데 리튬을 복용하는 과정에서 손떨림, 무기력증, 판단력 감소, 단기 기억장애 등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데파코트’ 같은 값비싼 신약에 자리를 내주었던 리튬이 자살 충동을 억제하는 약물로 다시금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덴마크 리스코브에 있는 정신병원의 리튬연구자 모겐스 쇼우는 리튬을 복용한 환자의 경우 복용하지 않은 환자보다 자살확률이 3~17배 낮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리튬 복용하면 자살 충동 억제된다”

아직까지 리튬이 어떤 식으로 자살을 막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리륨의 다양한 작용 기작들이 종합적인 효능을 보이는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리튬은 신경세포, 즉 뉴런의 표면에 있는 이온 채널이라는 작은 통로에 작용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온 채널은 열리고 닫히면서 세포 내의 전위를 결정하는 전하를 띤 원자들을 받아들이거나 막으면서 활성을 부여하거나 정보를 주고받도록 한다. 이런 작용 메커니즘의 리튬이 이온 채널에 영향을 주거나 활성화된 세포 내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작용의 연쇄 반응을 막아 뉴런의 민감도를 안정화한다는 게 연구자들의 견해이다. 리튬의 치료 효과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농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혈청 1ℓ당 0.6밀리몰(millimole) 이하일 경우에는 효과가 없고, 2밀리몰 이상에서는 생명을 위협하는 독성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자살 충동을 부추기는 유전자가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캐나다의 왕립 오타와 병원 연구진은 세로토닌 2A 수용체를 조작하는 유전자가 절단된 사람은 일반인보다 자살률이 2배 이상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자살의 유전적 원인을 지목하는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한 사람의 자식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자식보다 자살 위험률이 6배나 높다는 조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자살을 유발하는 유전자에 관한 연구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설령 자살 유전자가 있다 해도 다른 신경전달 물질의 영향을 받을 게 틀림없다. 언젠가는 자살의 징후를 더욱 과학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으며 뇌 영상술이나 혈액 검사로 자살 가능성을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때가 되어도 자살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울과 불안을 껴안고 사는 사람이 너무 많은 탓이다.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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