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3E5CDD">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font>
어느 날 갑돌이는 갑순이와 데이트를 했다. 모처럼의 데이트라서 신나게 차를 몰았다. 기분이 지나쳤을까, 멀리서 경찰이 손짓하며 차를 세웠다. “선생님, ‘속도위반’입니다. 시속 140km나 됩니다”라는 친절한(?) 얘기를 들었다. 갑돌이는 순간 난감했다. 그러나 갑순이가 거들었다. “경찰 아저씨, 이건 ‘속도위반’이 아니라 ‘속력위반’이에요. 속도는 벡터이고 속력이 스칼라잖아요? 학교에서 그렇게 배우잖아요? ‘속력위반죄’란 것은 없으니까 보내주세요”라고 말했다. 경찰도 아득한 고교 시절에 그렇게 배운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냥 보냈다. 이런 대화는 실제로는 물론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그대로 적용하면 이럴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은 ‘물리량’을 다룬다. 모든 물리량은 크게 스칼라(scalar)와 벡터(vector)로 나눈다. 스칼라는 스케일(scale)에서 나왔다. 따라서 ‘크기’만을 갖는 물리량임을 알 수 있다. 벡터는 ‘날아가는 것’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나왔다. 날아가는 것의 경우 ‘어디로’라는 방향이 중요하다. 그래서 벡터는 크기와 방향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가진다. 그 크기는 화살의 길이, 방향은 화살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보면 편하다. 그래서 벡터는 보통 화살표로 나타낸다. 스칼라의 예로는 길이·넓이·질량·에너지·속력 등이 있고 벡터의 예로는 힘·운동량·전기장·자기장·속도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다른 것들은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속력과 속도는 그 소속을 바꿔야 타당하다.
우선 속도를 보자. 속도의 한자는 速度이다. 여기서 ‘도’는 어떤 정도를 나타낼 뿐 방향과는 무관하다. 이 점은 똑같은 도가 들어가는 온도·밀도·농도·고도 등은 모두 스칼라라는 데서 잘 드러난다. 한편 속력의 한자는 速力이다. 그런데 력은 ‘힘’이며 벡터이다. 똑같은 ‘력’이 들어가는 중력·전기력·자기력 등도 모두 벡터이다. 즉 유독 속도와 속력만 그 소속이 뒤바뀌어 있다. 다른 면으로 어감을 봐도 마찬가지다. 속도와 속력 중 속도의 어감이 더 일상적이다. 그래서 속도위반이라는 일상용어에 쓰인다. 따라서 당연히 속력을 벡터량으로 삼아야 한다. 영어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영어의 speed와 velocity 중 speed가 더 일상적이다. 그래서 ‘제한속도’를 ‘speed limit’로 쓴다. 전문용어의 어감이 풍기는 velocity는 벡터량으로 쓰인다.
우리는 일상 용례와 전문 용례가 엇갈려 있다. 그래서 한 차례의 수정단계를 거쳐야 한다. 속도는 워낙 기본적인 개념이어서 초등학교 때부터 배운다. 그리고 고교 시절에 이르기까지 항상 ‘속도=거리÷시간’으로 쓴다. 그러나 벡터가 나오면 “지금까지 본의 아니게 잘못 가르친 것이 하나 있다. 속도는 사실 벡터량이다. 지금껏 써온 속도란 말은 대부분 속력으로 불러야 옳다”라고 하면서, 잘못 아닌 잘못을 자백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자백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해결책은 이제라도 하루빨리 바로잡는 길뿐이다.
가끔 도로표지판의 영문표기가 잘못되었다면서 수정작업을 한다. 그 비용이 수십억원대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속도와 속력을 바꾸는 일은 훨씬 중요하면서도 간단하다. 주요 교재 출판사들만 잘 협력하면 된다. 얼마 동안의 혼란은 있겠지만 순리로 가는 것이므로 곧 안정될 것이다. 그런 정도의 혼란은 방치하면서 계속 겪을 불합리에 비하면 미미한 손해일 뿐이다.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jsg@sunch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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