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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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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충은 왜 빈곤국가를 좀먹나



60년간 변하지 않은 전세계 기생충 감염률, 빈곤국에서 오히려 늘어난 탓…
한국의 성공적 박멸 사업 노하우 전수하면 어떨까
등록 2010-07-29 06:48 수정 2020-05-02 19:26
짐바브웨의 한 소녀가 고인 물을 마시기 위해 물병에 담고 있다. 아프리카 빈곤국의 기생충 감염률을 낮추려면 기생충약 처방보다 열악한 위생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다. REUTERS/ Philimon Balawayo

짐바브웨의 한 소녀가 고인 물을 마시기 위해 물병에 담고 있다. 아프리카 빈곤국의 기생충 감염률을 낮추려면 기생충약 처방보다 열악한 위생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다. REUTERS/ Philimon Balawayo

스와질란드 카풍아 지역의 우리 클리닉을 방문하는 환자 중 몇 사람은 꼭 기생충약을 타간다. 대변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게 나왔다는 이유에서다. 더 심한 경우에는 입에서 회충이 나왔다며 휴지에 곱게 싸서 들고 오기도 한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장내 기생충 감염은 대단히 흔한, 거의 일상에 가까운 일이다. 증상이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감염이 심각한 사람은 드물지만, 일상적인 기생충 감염으로 인해 낭비되는 영양분과 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이런 극빈 지역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똥 받으러 다니는 털북숭이 아저씨

스와질란드에서 약물을 통한 장내 기생충 관리는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장기적으로 일정한 투약 지침을 시행·관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교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약물 투여(MDA·Mass Drug Administration)는 큰 장점이 있다. 지금 와 있는 산골 마을 주변에는 6개 학교에 2천여 명의 학생이 있는데, 성장기 학생들만 감염에서 벗어난다 해도 큰 의미가 있다. 이 때문에 1년에 한두 번씩 국가에서 전국의 학생을 대상으로 기생충약을 나눠준다. 하지만 정확한 투약 지침이나 교육 없이 약만 주는 건 문제가 있다. 지난번 MDA에서는 학생들의 체중이나 감염 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약물을 투여해 부작용으로 학생 수십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제대로 된 기생충 유병률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는 상황에서 투약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또 기생충 감염량은 모든 사람이 비슷하게 나타나지 않는데, 유전적·환경적으로 기생충에 취약한 일부 사람들의 감염량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높은 편이다. 약 10%의 사람이 전체 기생충 수의 90%를 뱃속에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사람들을 초전파자(Super-spreader)라고 한다. 초전파자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꾸준한 관리는 기생충이 퍼지는 걸 막는 데 필수적 요소다. 어떤 기생충이 유행하고 있는지 파악해 각각의 기생충에 효과적인 약물을 정확히 투약하는 것 또한 약물 오·남용으로 인한 위험성을 낮추고 장기적으로는 기생충의 약물 저항성 획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이런 이유로 학교를 중심으로 장내 기생충 감염 조사를 시작했다. 나눠준 채변통의 회수율은 80% 정도여서 높은 편이라 생각했지만, 정작 안을 들여다보니 흙이며 지푸라기, 쓰레기 등을 채우거나 먹다 남은 과자를 우그려 넣어온 아이들도 있었다. 한국에서도 옛날에 채변 검사를 하면 개똥을 대신 담아갔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니,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열심히 채변 검사를 하러 다녔더니, 마을에서 나의 이미지는 이제 ‘똥 받으러 다니는 기묘한 털북숭이 아저씨’ 정도로 굳어졌다.

조사 결과 의외로 장내 기생충 감염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이번에 검사한 학생 41명 중 회충에 감염된 아이가 1명, 구충에 감염된 아이가 3명이었으니 약 15%인 셈이다. 현재 한국의 장내 기생충 감염률이 2~3%이니 스와질란드의 상황이 아주 나쁘지는 않은 셈이다. 물론 더 많은 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해봐야 정확한 감염률을 예측할 수 있겠지만, 최근 스와질란드에서 인분을 비료로 이용하는 것을 제한하고 화장실 사용을 적극 권장한 정책이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19세기 말~20세기 초반에 미국 남부 지역이 구충 감염에 시달리고 있을 때 시행한 방법도 이와 비슷했다. 당시 구충 감염은 미국 남부의 경제를 좀먹는 심각한 문제였다. ‘남부 사람은 게으르다’는 편견이 심어진 것도 이때였다. 구충 감염이 너무 심해 하루 200㎖가 넘는 혈액 손실이 일어나 심각한 빈혈로 이어지는 일이 빈번했다. 감염자는 빈혈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다른 지역 사람들은 그저 게으르게 본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기생충 박멸책, 경제개발
스와질란드 카풍아 지역, 닭과 소의 분변으로 만든 퇴비를 사용한 밭에서 수확한 배추에서는 정체불명의 다세포생물이 발견됐다. 정준호 제공

스와질란드 카풍아 지역, 닭과 소의 분변으로 만든 퇴비를 사용한 밭에서 수확한 배추에서는 정체불명의 다세포생물이 발견됐다. 정준호 제공

구충 감염의 심각성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박멸 프로그램을 시행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 것은 당시 미국 낙농사업국에서 일하던 저명한 기생충학자 찰스 스타일스였다. 기존의 소극적인 박멸 프로그램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안 스타일스는 당시 최고의 거부인 록펠러를 설득했다. 스타일스의 설득으로 록펠러는 100만달러를 투자해 ‘구충 박멸을 위한 록펠러 공중위생 위원회’를 발족한다.

위원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구충의 위험성과 감염 경로, 예방법을 홍보한 것이다. 예방법은 단순했다. 아무 곳에나 대변을 보는 대신, 구멍을 파고 그곳에 대변을 보는 것이다. 구충은 대변을 통해 배출된 유충이 토양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의 발을 통해 피부에 파고든다. 오염된 대변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 흘러들지만 않게 한다면 감염은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다. 곳곳에 공중화장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곳마다 화장실 사용의 중요성을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 간판을 세웠다. 지역에 따라 50%가 넘던 감염률은 점차 줄어들었다. 하지만 위원회가 이뤄낸 가장 중요한 예방책은 경제개발이었다. 경제개발은 더 나은 생활환경을 제공했다. 집집마다 화장실이 생겼고 구충의 감염 경로가 하나씩 차단됐다. 이제 미국 전역에서 구충은 찾아보기 힘든 기생충이 되었다.

한국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30여 년 전 인구의 70%를 넘던 장내 기생충 감염률은 적극적인 박멸 사업의 진행과 경제개발, 생활환경 개선으로 이제 2~3%대로 낮아졌다. 기생충 박멸 사업을 진행하면서 이렇게 단기간에 엄청난 효과를 본 나라는 드물다. 지금도 한국의 기생충 박멸 사업은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1960년대 한국기생충박멸협회에서 출발한 한국건강관리협회는 현재 탄자니아, 수단 등 에 기생충 박멸 사업의 노하우를 전한다. 하지만 한국의 박멸 사업은 제대로 기록되거나 전수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구충 박멸 위원회는 꾸준히 성장해 록펠러재단이 되고 현재의 록펠러대학에까지 이어졌다. 또한 구충 박멸 사업 당시 얻어진 노하우와 철학으로 존스홉킨스대학과 하버드대학에 공중보건대학원이 생겼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공중보건 연구소가 되었다.

회충·촌충·구충 같은 장내 기생충증은 여전히 지구상에서 가장 흔한 감염성 질환이다. 현재 감염자는 세계 인구의 5분의 1 이상으로 추정된다. 1947년 노먼 스톨은 ‘기생충 가득한 이 세상’(This Wormy World)이라는 논문에서 처음 전세계 기생충 감염 규모를 체계적으로 밝혀냈는데, 그때도 세계 인구 중 5분의 1이 구충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됐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제는 단 한 알로 대부분의 장내 기생충을 제거할 수 있는 신약이 개발되고,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엄청난 원조가 쏟아졌지만 감염자 비율에는 별 차이가 없다. 그동안 세계 인구는 3배로 늘었으니 절대적인 감염자 수는 오히려 늘어난 셈이다. 유럽이나 미국, 아시아 일부 국가처럼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에서는 구충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즉, 빈곤국의 감염자 규모가 늘었다는 말이다. 여전히 장내 기생충은 빈곤국을 좀먹는 주된 요인 중 하나다.

 

재감염 가능성 있는 기생충약은 미봉책

호수에서 물장구치고 돌아와서는 주혈흡충에 감염돼 피오줌을 싸는 소년, 요충 때문에 엉덩이를 긁느라 잠 못 이루는 아기, 대변에 섞여 나오는 장내 기생충이 부끄러워 속앓이 하는 아가씨. 이들에게 이곳 클리닉에서 나눠주는 약 한두 알은 단기적인 해결책만 제시해줄 뿐이다. 기생충약은 예방 효과가 없어 언제든 재감염이 일어날 수 있다.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박멸 사업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지난 수십 년간 쌓아온 성공적인 공중보건사업의 노하우를 필요한 나라의 현실에 맞춰 공유해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나아가 노하우를 공유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전공자 부족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의 기생충학, 더 나아가 한국의 기초의학도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카풍아(스와질란드)=정준호 영국 런던대학 위생열대의학대학원 기생충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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