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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물질 탐색의 혁명 조합화학

등록 2001-02-15 00:00 수정 2020-05-03 04:21

강건일의 과학읽기

미국 화학학회가 발표한 2000년 돋보인 화학연구 가운데 약 연구에는 제약회사 머크의 에이즈 치료제 연구가 포함돼 있다. 에이즈 바이러스(HIV)의 숙주세포 감염에 필수적 역할을 하는 삽입효소(integrase)를 억제하는 물질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아직 실마리 물질인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 치료제로 개발된 역전사효소 억제제와 단백질분해효소 억제제와는 다른 새로운 계열의 약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 물질은 전체 25만개 이상의 화합물이 함유된 많은 ‘화학 라이브러리’(chemical library)를 검색하여 찾아낸 것이라고 한다. 신약은 많은 물질을 합성해서 시험한 뒤 원하는 약효를 나타내는 실마리 구조의 물질을 얻고 그 구조를 최적화하는 과정을 거쳐 나온다. 보통 5천∼1만개의 물질 중에서 5개 정도의 임상후보물질이 나와 최종 하나의 신약이 된다. 이 과정의 어려움은 5억달러의 경비를 들인 12∼15년간의 노력으로 알 수 있지만 25만개라는 숫자는 기이하다.

이것은 1980년대 중반 처음 시도돼 의약, 농화학, 기타 소재개발 기업체의 신물질 탐색을 혁명시키고 있는 조합화학(combinatorial chemistry, combichem)의 용어이다. 여러 반응물질을 조합, 반응시켜 수십, 수백개 화합물의 라이브러리를 초능률적으로 얻는 방법이다. 이제까지 효소억제제를 찾을 땐 효소억제에 필수적이라고 추정되는 최선의 골격구조들을 설정하고 이 골격을 다양하게 변형한 물질을 하나하나 합성하여 시험했다. 그런데 조합화학을 활용하면 수십 차례 이상 실험으로 할 일을 단 한번에 끝낼 수 있다. 조합화학에서는 보통 고형 지지체를 사용한다. 이 지지체에 골격구조를 붙인 뒤에 시약을 가해 골격을 변형시키고 이를 씻어주어 과량의 시약과 불순물을 제거한다. 다음에 산물을 지지체로부터 분리시키면 라이브러리의 한개의 화합물이 된다. 이 과정을 자동화시키면 골격구조와 변형시약을 조합한 많은 화합물로 어렵지 않게 라이브러리를 채울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렇게 합성한 물질을 자동검색 장치로 고속처리검색(high throughput screening, HTS)을 한다면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나 25만개 화합물의 생성과 효소억제의 검색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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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만개 물질의 검색은 combichem/HTS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며 우연성에 의존도가 높은 신물질 개발에서 조합화학의 위력을 나타낸다. 그렇지만 “건초더미의 크기를 늘려놓고 확실히 바늘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위안삼는다”는 비평처럼 무작정 많은 물질을 생성하여 검색하는 것이 우수한 신물질의 창출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효소의 입체적 구조를 정확히 파악한 다음에 이를 억제할 구조를 디자인하여 시험하는 정통적 접근은 계속 유효하다. 그러나 합성방법의 향상 등 조합화학 또한 합리적 구조 디자인을 반영할 수 있도록 발전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화학기업체의 새로운 방법론적 패러다임으로 정착될 것이라고 전망할 수 있다.

전 숙명여대 교수·과학평론가 dir@kop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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