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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근대 속으로 시간여행을…

등록 2003-11-13 15:00 수정 2020-05-02 19:23

다양한 시각으로 근대를 탐색한 서적 봇물… 이론틀 벗어난 상상력으로 새로운 해석 시도

‘잃어버린 근대’를 찾아나선 탐색전이 뜨겁다.

인문·학술서의 불황 속에서도 ‘우리가 살았던 근대’를 재발견하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 근대 탐색전이 한창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최근 (현실문화연구), (소명출판), (소명출판), (청년사) 등이 잇따라 나왔다. 올해 나온 책으로 시야를 넓히면 철도라는 근대의 상징을 통해 한국에서 근대가 어떻게 질주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 박천홍씨의 (산처럼),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와 허동현 경희대 교수가 우리의 근대에 대해 논쟁을 벌인 (푸른 역사) 등이 같은 고민에서 나온 돋보이는 성과다.

일상적인 것들로 근대를 해석한다

물론 ‘근대’는 오래 전부터 역사·사회·정치·경제학 등의 연구자들이 씨름해온 과제였다. 그러나 요즘 이 주제는 연구실을 넘어섰다. 미술평론가이자 목수인 김진송씨가 (1999)에서 포스터, 레코드 삽화, 신문만평 등 당대의 문물을 통해 발굴해낸 ‘일상의 근대’가 열광적 지지를 얻은 것을 계기로 ‘우리의 근대는 어떠했고 어떠한가’라는 질문은 대중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정치인이나 독립운동의 역사, 통계 숫자를 넘어 문학작품, 그림, 신문기사 등 일상의 산물들이 주요 자료가 되었다. ‘백인’처럼 되고 싶던 상류 지식인들의 에 대한 집중에서 벗어나, 개화에도 관심이 많지만 문명에 대해서는 양가적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던 전통 지식인 출신의 신채호, 박은식, 양기탁 등이 만든 연구도 활발하다.

국문학자 권보드레(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씨가 최근 내놓은 는 이러한 근대 연구의 ‘최신 유행’을 잘 보여준다. 개조론과 개량론이 휩쓸던 1920년대 초반을 ‘연애’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 이 책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낭만적 연애와 사랑, 행복한 가정(스위트홈)의 개념이 근대에 들어 우리들이 새롭게 배운 ‘학습된 열정’임을 보여준다.

‘생각하다’라는 뜻이었던 ‘사랑하다’가 남녀의 사랑으로 바뀌고, ‘연애’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19년 이후였다. 남자들끼리 당당하게 상을 받고 여자들은 작은 상이나 부엌에서 쭈그리고 앉아 밥을 먹던 당연한 가족의 질서가 도전받고 온 가족이 오순도순 지내는 행복한 가정이 젊은 세대의 열망으로 떠올랐다. 이런 가족의 조건은 깨이고 교육받은 신식 남녀의 자유연애를 통한 결합이었다. 자신이 분명한 의지로 선택한 상대만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부모가 정해줘 조혼했던 구여성 아내를 버리고 신여성과 진실한 생을 살아야 한다는 논리가 교육받은 남성들 사이에서 번져나갔다. “요즘 계집애들은 걸핏하면 사랑 사랑 하니 모두들 기생이 되었단 말이냐”는 소설 (이광수) 속 중년여인의 분개대로 막 싹튼 연애는 기성세대와의 갈등과 결별을 의미했다.

권보드레씨는 ”세계 개조의 목소리가 높던 시절 연애는 개조론의 대중적 변종이었고 새로운 가치인 행복에 이르기 위한 주요한 통로였으며, 문화·예술·문학의 유행을 자극한 주원천이었다”고 말한다.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지식인들이 주창했던 새 유행인 개조론은 개인의 차원으로 내려와 자유롭게 애인을 선택하자는 신연애관으로 한 시대를 달뜨게 했던 것이다. 또 가족과 남녀 관계의 틀이 이전 세대와 완전한 결별을 고하던 이 시기에 형성된 사랑과 연애, 가족의 이미지를 80년이 지난 우리도 공유하고 있다.

우리식대로 살아온 근대를 찾아서…

근대를 다룬 요즘 책들의 또 다른 특징은 이론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찾으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근대 연구는 주로 우리의 근대는 왜 실패했는지 원인을 찾거나, 그 반작용으로 18세기 초부터 우리에게 근대 자본주의의 싹이 있었다는 이론(내재적 발전론)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이런 사조들이 급격히 퇴조하면서 그렇다면 ‘우리의 근대는 무엇인지’를 다시 고민해야 했고,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꼭 도달해야 할 정해진 근대의 기준을 해체하고 서구의 근대만이 아닌 다양한 근대의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이 최근의 출판물로 결실을 맺고 있다.

젊은 국문학자 이승원·오선민·정여울씨가 지은 은 1876년에서 1910년까지 근대 초기를 “사랑조차 계몽의 담론으로 포섭되던 불의 시대, 계몽과 국민 만들기의 광풍이 휩쓸었으나 우울과 절망보다 열정과 생동감으로 끓어넘치는 유쾌한 근대”였다고 본다. 정여울(서울대 국문학과 박사과정)씨는 “튼튼한 국민이 되자는 열망이 강하던 이 시기에는 평양에서 운동회가 열리면 10여개 지방에서 사람들이 구경을 오고 고관대작들이 기생과 함께 와서 천막을 치고 여러 날 동안 구경하는 흥겨운 잔치판이 벌어졌다”며 “우리의 근대는 분명히 한계도 있었지만, 삶의 열망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경이로운 집단체험, 계몽이 교훈이나 억압으로 다가가지 않고 삶의 활력이던 때, 내 삶도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던 시대”였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는 서구인들의 강한 육체를 능가하기 위해 체조로 단련하고 위생관리에 힘쓰며, 꿈 이야기(몽유록)의 형식으로 꿈 속에서 을지문덕, 강감찬을 만나 우국의 심정을 털어놓는 문학작품이 인기를 얻으며, 기생이 를 열렬히 구독한 끝에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는 자필 편지가 신문 1면에 실리고, 어른들의 (퇴폐적인) 연극장 출입을 비판하는 아이의 눈물겨운 연설이 성인들을 깨우치던 ‘변화의 시절’ 이야기가 펼쳐진다. 물론 이런 열망은 현실 곳곳에서 좌절했지만, 암울하게만 생각했던 이 시기의 뒷면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크다. 정여울씨는 “우리는 해방 이후 너무나 재미없는 근대, 훈육하는 근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근대라면 몸서리를 치지만 이 시대를 그런 선입견으로 재단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정선태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의 은 우리 근대의 좀더 어두운 면, 민족과 힘에 대한 집착 때문에 굴절된 근대에 초점을 맞춘다. 박은식과 신채호, 루쉰과 나쓰메 소세키 등의 작품을 보면서 한국과 일본, 중국의 근대를 넘나들고, 지금도 세력이 막강한 민족담론과 종교가 어떻게 번역되고 수용되는지를 현실과 연관시키면서 보여준다.

근대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근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삶의 변화를 느낀 이들은 여성일 터. 이배용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와 이노우에 가즈에 가고시마국제대학 조교수 등 한국과 일본의 학자 9명이 쓴 은 근대 초기 한국과 일본의 근대 여성상을 파고든다. 일제 시기 대표적 여성 사회주의자이던 허정숙의 “우월권을 가진 남성으로부터 인격을 유린당하는 것은 신여성이나 구여성이나 마찬가지다.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싸우는 여성은 가사를 돌볼 수 없거나, 가사를 돌보기 위해서는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 없게 되는 자가당착에 빠지지만 여성의 진정한 해방, 이성간의 사랑, 생활의 안정, 가정의 문제, 직업과 일에서 여성이 갖는 근본적 고통을 해결할 열쇠가 필요하다”는 말은 지금의 여성에게도 울림을 갖는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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