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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국밥] “니들 따로국밥 묵어봤나?”

등록 2003-10-23 15:00 수정 2020-05-02 19:23

서울의 육개장을 변형한 대구의 자존심… 60년 세월 동안 한결같은 ‘국일식당’의 맛

10여년 전 미술사학자 유홍준, 소설가 유시춘, 경상대 교수 김덕현 등 천하의 말쟁이 7~8명이 인사동 어느 한정식 집에서 어울린 적이 있었다. 정치 이야기에서부터 대학 이야기, 문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말쟁이들답게 동서고금 세상만사를 넘나들다가 마지막에는 음식 이야기에 이르렀는데, 자연스레 각자가 자기 고향의 특별한 음식이나 자기가 먹어본 맛있는 음식 이야기를 풀어놓기에 바빴다. 유홍준 교수는 남도 문화유산 답사길에서 맛본 해남 천일식당의 떡갈비 예찬에 열을 냈고, 유시춘씨는 설악산 단풍구경 길에 들린 하진부 부일식당 산채정식의 담백한 맛을 기억해냈다. 이렇게 술꾼은 술꾼대로, 맛꾼은 맛꾼대로 자기가 접해본 ‘진미’를 이야기하는데, 안동이 고향인 김덕현 교수만이 할 말이 없는 듯 입맛을 쩍쩍 다셨다. 이러고저러고 말의 성찬이 한바탕 훑고 지나간 뒤 잠시 화제가 끊어질 즈음 김덕현 교수가 한마디 불쑥 던졌다. “니들 간고등어 먹어봤나?”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들 배꼽을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눈치 빠른 독자들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기본적으로 먹을거리가 부족하던 50·6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그것도 안동과 같이 내륙 깊숙한 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 시절에 어쩌다 맛보던 특미, 진미는 소금에 절이다 못해 소금 자체가 아닌가 싶은 간고등어가 거의 유일했다. 초여름 보리 이삭이 익어갈 무렵 농촌의 어머니들은 지난 장날 꼬깃꼬깃 장롱에 넣어 둔 지전 몇장을 간고등어와 바꾼 뒤, 품앗이 일꾼들의 반찬으로 파, 마늘, 고춧가루 빨갛게 양념하여 바작거리게 졸이거나, 화로에 불씨 담아 석쇠에 누르스름하게 굽는다. 푸슬한 보리밥 한 그릇을 후딱 비우고 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배가 고파오던 그 시절, 물에 말은 밥 한 숟가락에 간고등어 한점 집어 입에 넣으면 그 짭잘한 맛에 밥알이 씹히는지도 모르고 목으로 넘어가니, 안동 사람 김덕현에게 이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있었을까?

안동에 간고등어가 있다면 대구에는 따로국밥이 있다. 대구의 따로국밥은 서울의 육개장이 변한 것이다. 1700년대 말의 백과서 에 의하면 “개장이란 개고기에 흰파를 넣고 끓인 구장(狗醬)을 말하는데, 국을 끓여 고춧가루를 뿌리고 흰밥을 말아서 먹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개고기를 끓인 개장(狗醬)이 식성에 맞지 않는 사람은 대신 쇠고기를 쓰고, 이를 육개장이라 했다고 한다. ‘육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서는 ‘육’(肉)자가 들어가면 쇠고기를 가리킨다. 대구의 따로국밥은 서울식 육개장처럼 고기를 잘게 찢어서 얹는 것이 아니고, “고기를 썰어서 장에 풀어 물을 많이 붓고 끓이되 썰어 넣은 고기점이 푹 익어 풀리도록 끓인다. 파잎은 썰지 않고 그대로 넣고 기름 치고 후춧가루를 넣는다”는 1869년의 조리서 에서 소개한 육개장 조리법에 가깝다.

지난 9월 말, 30여년 전 민청학련 사건에서 고문과 조작으로 무고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세상을 떠나신 여정남, 하재완, 송상진, 도예종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러 이철, 여익구 등과 함께 대구를 찾았다. 1974년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투옥된 이래 지금까지 줄곧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임구호, 강기룡, 임규영 등 대구의 친구들과도 오랜만에 만나 밤새 통음하며 회포를 풀었다. 일반적인 경북·대구 정서와는 ‘따로’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그 고장 출신 독재자들과 맞서온 이들의 외로운 투쟁이 눈물겨웠다.

이튿날 쓰린 속도 풀 겸 음식이야기 취재도 할 겸 나만 ‘따로’ 20여년 전 한번 들렸던 ‘국일따로국밥’(053-253-7623)을 찾았다. 그때는 그저 짜고 매웠다는 느낌뿐이었는데, 가만히 국밥에 들어간 쇠고기·파·선지·기름 등을 음미하면서 먹으니 목으로 넘어가는 국물맛이 시원하고도 개운하다. 1946년 고 서동술씨로부터 시작되어 이제 손자 서경덕(40)씨까지 이어오니, 국일식당이 어느새 60년의 역사를 자랑하게 되었다. 대구 시민들이여, 어느 자리에서든 음식 이야기가 나오면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말하시라. “니들 국일식당 따로국밥 묵어봤나?”

김학민 |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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