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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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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도 무작정 처벌 안 했다

등록 2003-01-03 00:00 수정 2020-05-03 04:23

한국전쟁 당시 남과 북에서 모두 융통성 있게 넘어갔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2001년 11월 어느 날 늦은 저녁 한 청년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청년은 곧 군대에 가야 하는데 현재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로 고민 중이라며 나의 조언을 구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그 젊은이에게 “장하다, 당신의 양심을 지켜 꿋꿋이 살아라”라고 말해주지 못했다. 대신 나는 요즈음 웬만한 벤처기업들도 다 병역특례를 신청할 수 있는데, 눈 딱 감고 4주간 군사훈련 받으면 안 되겠느냐고 말했다.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 편안하게 만드는 선한 눈빛을 가진 청년은 조용히 웃어주었다. 그가 바로 한달쯤 뒤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으로는 수십년 만에 처음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한 오태양씨였다.

전쟁 때는 비무장병과로

평화주의자이며 불교신자인 오태양의 병역거부 선언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운동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지만, 우리는 오태양 이전에 이미 1만여명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양심의 명령에 따라 병역이나 집총을 거부해 징역을 살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대부분이 여호와의 증인이고, 100명 안팎은 흔히 안식교라 불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소속 젊은이들이었다.

이 땅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의 역사는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까지 징병제를 확대한 1944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일제의 총알밥으로 전선에 끌려갔지만, 적지 않은 청년들은 일제의 입장에서 볼 때 괘씸하기 짝이 없게 ‘병역기피’를 했다. 이때 징병을 기피해 지리산 등에 숨어든 ‘비국민’(非國民) 청년들 중에는 민족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사상을 견지하고 반일의 입장에서 징병을 거부한 사람들도 있고, 또 명확한 반일의식 때문은 아니더라도 남아 있는 가족들의 생계 때문이나, 전선에서 죽을까 두려워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당시에도 전쟁과 관계된 일체 행위에 동참할 것을 거부한다는 종교적 양심에 따라 징집을 거부해 처벌을 받았다. 그들은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전쟁과 관련된 어떤 일에도 동참하거나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있고, 또 처벌을 받는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3월이라면 이북이 한참 전쟁준비에 힘쓸 때인데, 이때 인민군에 징집된 안식교 청년들이 종교적 신념을 내세워 끝까지 집총을 거부하자 인민군 당국은 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들 중 일부는 재징집됐는데, 전쟁 기간 중임에도 이들이 집총을 거부하자 총살시킨다고 위협을 가하기도 했지만, 인민군은 결국 이들을 비무장 병과인 피복창에 근무하도록 하거나 장애인들로 구성된 비무장 후방부대에 편입시켰다.

남쪽도 사정은 비슷했다. 대구 피난길에 징집된 안식교인은 집총을 거부해 9일간 영창에 갇혔다가 지휘관의 배려로 집총훈련 없이 비무장요원으로 복무할 수 있었다. 물론 당시에 군형법의 기능을 수행한 국방경비법에도 최고 사형까지 시킬 수 있는 항명죄가 있었지만, 양심적 집총거부자들에게 적용되지는 않았다. 집총거부자들에 대한 처리 기준이 없다 보니 소대에서부터 연대까지 어떤 상급자나 지휘관을 만나느냐에 따라 처리가 천차만별이었다. 간혹 집총거부자들에 대해 이해심을 갖고 이들을 비무장요원으로 근무토록 배려해주는 지휘관들이 있었던 반면, “사람 만들어준다”며 살인적인 구타를 가하거나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물통에 집어넣고, 실신했다가 깨어나면 다시 반복하고, 총살시킨다고 위협하는 것이 더 보편적이었다. 이러다 보니 집총거부자들 중에 너무 심하게 얻어맞아 의병제대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삼육대학 오만규 교수가 편집한 에 실려 있는 안식교인들의 수기는 참으로 눈물겹다. “빨갱이보다 더 악질”인 ‘비국민’으로 몰려 무자비하게 얻어맞고, “나는 미쳤다”라고 외치면 모든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유혹이며, M1 소총을 거꾸로 입에 물고 30분 이상을 버티고, 4시간이 넘게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이단의 종교에 빠져 미쳐버린 자들을 “사람 만들어준다”는 너무나 ‘인간적’인 방침에도 몽둥이를 쥔 자들이 규정한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는 청년들이 계속 나오자, 군당국은 이들을 사법처리하기 시작했다.

결국 흔들리고 만 안식교회 지도부

양심에 따른 집총거부가 법적으로 처벌받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전쟁과 관련된 일체 행위에 가담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당연히 군에 입대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전문용어로 완전거부자(complete objector)들이다. 반면 안식교인들은 군대에는 입대하지만 집총을 거부하고 비무장병과에서 근무하기를 원하는 비전투원(noncombatant), 또는 양심적 협력자(consciencious cooperator)들이다. 징집 자체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민간법정에서 병역기피로 처벌받았다면, 안식교인들은 일단 군에 입대한 뒤 집총을 거부해 항명죄로 처벌받았다. 1956년에는 예비역 훈련에 소집된 안식교인들이 집총을 거부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70여일 만에 석방됐다. 현역입대자가 집총을 거부해 항명죄로 처벌받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뒤인 1958년의 일이다. 논산훈련소에서 집총을 거부한 신학생 출신 안식교인 청년 2명이 6개월형을 선고받은 것을 시발로 1년에 10여명씩의 안식교 청년들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형량은 길어야 1년 이내였다.

한편 정부에서도 안식교인들을 처벌 일변도로만 대한 것은 아니다. 1957년 4월3일 국방부 장관 김용우는 장관 특명 ‘국방총제2288호’를 통해 각 군 참모총장에게 안식교인 병사들을 위생병 또는 기타 직접 무기를 휴대치 않는 병과에 가급적 배치할 것을 명령했다.

집총거부자들에 대한 처벌이 강화된 것은 5·16군사반란으로 군사정부가 들어선 이후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반란범들의 세상에서 집총거부자들에 대한 형량은 점차 늘어나 5년, 6년씩 징역이 선고됐다. 그런데 이렇게 장기 징역형을 때리다 보면 이들이 한번에 병역이 면제가 되어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당국은 이들을 1년 반에서 2년 정도의 징역을 선고하고, 형을 마치고 나오면 다시 훈련소로 보내 또 집총거부를 하게 해 징역을 보내고 해서 세번, 네번씩 징역을 살렸다. 이 끔찍한 조치에 대해 대법원은 1965년 집총군사훈련을 받으라는 명령을 수회 받고도 그때마다 이를 거부한 경우에는 명령횟수만큼 항명죄가 즉시 성립한다고 손을 들어주었다.

1963년에 처음 입대해 6년에 걸쳐 네번 징역을 살고 나온 채의국 목사는 몸이 엄청나게 쇠약해진 상태였으나 다시 논산훈련소로 보내졌다. 그는 마침 훈련소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졌는데, 그를 불쌍히 여긴 훈련소에서는 훈련소 5수생이 된 그를 한달간 입원시켜주었고, 그래서 다시 집총을 강요받지 않고 이등병을 달 수 있었다. 앞으로 또 어떤 시련이 벌어질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는 자대에 배치됐는데, 연대장이 기록을 보고 깜짝 놀라며 “너같이 믿음이 굳은 놈은 처음 봤다. 내 부하가 2천명인데 너 하나 못 봐주겠느냐”며 절대로 그를 건드리지 말라고 해 ‘무사히’(!) 병역을 마칠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안식교회 지도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외국 선교사들을 대신해 한국인 목사들이 교단의 지도부에 올라서고, 또 이들의 자제들이 군대에 갈 연령이 되자 안식교회의 상층부는 동요했다. 특히 1960년대 중반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이후, 한국 사회의 군사화 경향은 눈에 띄게 나타났다. 1968년 1월21일 이북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을 시발로 프에블로호 나포사건, 향토예비군 설치, 울진·삼척지구의 무장공비 침투사건, 주한미군 감축, 국가비상사태 선포, 고등학교와 대학에서의 군사훈련 실시, 유신체제의 확립으로 치달려간 역사 속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설자리는 더욱 좁아진 것이다.

특정종교에 대한 특혜인가

1970년대에 교회 간부들과 삼육대 교수들은 훈련소에서 집총을 거부한 청년들을 찾아가 집총거부의 신념을 철회하도록 설득했다. 삼육대 오만규 교수는 안식교도로서 가장 오래 징역을 산 최방원씨가 1970년 12월 네 차례에 걸쳐 도합 7년6개월간 징역을 살고 출소했을 때 교회가 그의 석방 소식을 교인들에게 전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 무엇이 시대의 변화를 이보다 더 극적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라고 탄식한다. 1975년을 마지막으로 안식교회의 집총거부 전통은 오랜 기간 단절됐다가, 2002년 봄 한 청년이 집총거부를 선언해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한편 1970년대에 들어와 박정희 정권은 병역기피 일소를 다짐하면서 모든 기피자들을 색출해 일단 군대로 끌고 갔다. 1974년부터는 병무청 직원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이 모임이 갖는 장소를 포위해 젊은 사람들은 다 군대로 끌고 갔다. 이렇게 되자 여호와의 증인들도 병역법 위반이 아닌 항명죄로 처벌받게 된 것이다. 군대나 학교에서 단체기합 받아본 사람들은 다 알지만, 매도 같이 맞아야 덜 아픈 법이다. 그런데 안식교도들이 집총거부를 포기하자 여호와의 증인들은 시쳇말로 ‘독박’을 쓰고 시범 케이스로 얻어맞게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공산괴뢰를 쳐부숴야 할” 중차대한 시기에 총을 잡으라는 국가의 명령을 거부할 뿐 아니라, 국기에 대한 경례도 거부하고, 자식이 죽어가도 수혈도 거부하는 존재로 비쳤다. 그러니 그들은 보수적인 기독교에 의해 이단으로 배척될 뿐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국가주의·가족주의·반공주의에 의해 철저히 왕따를 당하게 된 것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펴는 주장의 하나가 이를 인정하는 것은 자칫 특정종교- 그것도 이단- 에 대한 특혜가 아닌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양심의 자유 문제는 특정종교 신도들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모든 종교신자, 나아가 모든 시민에게 해당되는 문제다.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삼는 근대국가에서 이단문제는 종교 내부에서 풀어야 할 것이지, 국가가 개입할 문제는 아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특정종교에 대한 특혜가 아니라 특정종교에 대한 국가권력의 부당한 박해와 차별을 중지하자는 것이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이 땅의 청년학생들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감옥에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싸웠으며, 기득권을 버리고 대중들 속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토록 치열하게 반독재민주화운동을 벌여온 한국의 청년학생들 중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현재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인해 투옥된 1500여명의 젊은이들은 단 1명 나동혁씨를 제외하고 반독재민주화운동에 몸바친 투사들의 후배는 결코 아니다. 오직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소수파 종교의 신자들만이 국가의 박해에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실천하여 감옥에 갔던 것이다.

쟁기를 벼려 칼을 만드는 십자군의 후예들

한국의 민주투사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실천하지 못한 것은 한국에서 얼마나 국가주의와 군사주의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어려서부터 당연히 군대에 가야 하는 것으로 배워온 한국의 청년학생들은 군대를 거부하는 것이 양심의 자유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청년학생들이 반정부 활동으로 인해 징역형을 선고받을 경우 대부분 병역이 면제되는 사실도 그들이 병역문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민주화운동가들이 80년대의 옥중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을 보며 사상의 자유가 무언지를 깨닫게 됐다면, 2000년대의 민주시민들은 옥중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 청년들을 보며 양심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서구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이 실현돼온 역사는 기독교 평화주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2001년 처음으로 우리 사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가 제기됐을 때 국방부보다 더 열심히 쌍지팡이를 들고 반대하고 나선 것은 이 땅의 주류 기독교였다. 한국전쟁이 한국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계기가 되었던 탓일까 우리의 기독교인 대다수는 그리스도인이므로 무기를 들 수 없다고 죽음을 택한 막시밀리아누스 등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의 후예라기보다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쟁기를 벼려 칼을 만드는 십자군의 후예들이다.

양심적 병역거부 토론회에서 만난 군목 출신의 한 목사님은 한때 군대가 1주일에 새로운 신자를 5천명씩 만들어내던 복음전파의 ‘황금어장’이라고 말한다. 물론 초코파이는 그 미끼였고, 나도 그 미끼를 문 한 마리 붕어였다. 어떤 목사님은 한발 더 나아가 “왜 교회 안 나갔나” 하면 “시정하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군대는 ‘황금어장’ 정도가 아니라 ‘가두리 양식장’이라고 말한다. 군사주의와 국가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곳이 어디 기독교뿐이겠는가마는, 한국 기독교는 정말 자기를 되돌아봐야 한다.

감리교신학대학장을 오래 지낸 홍현설 목사는 일찍이 1959년에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 청년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양심 때문에 집총거부를 한 것에 대해 비난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며 양심적 비전론자들을 보호하는 법령이 제정되지 못하는 것을 “우리나라에 아직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탄’했다. 전체 국민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이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초대형 교회가 즐비한 우리나라가 아직도 기독교의 영향력이 부족한 것일까 기독교 평화주의의 핵심적 실천과제인 양심적 병역거부는 언제까지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단들의 짓거리로 교살돼야 하는가

우리나라, 해도 너무한다

총을 잡지 않는 것만 양심이고 총을 드는 것은 비양심적인 일인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을 위한 운동에 미력하나마 발을 담그고 있지만, 나 자신의 양심은 총을 잡는 것을 견디지 못할 만큼 여리고 예민하지는 않다. 아니, 독립군과 항일빨치산들의 무장투쟁을 전공하고 찬양해온 내가 무기를 드는 행동을 비양심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전쟁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외적의 침략을 받았을 때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총을 잡고 전선으로 나가는 것 역시 필요하고 숭고한 일이다.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40여개국이지만, 우리나라처럼 가혹하게, 우리나라처럼 철저하게, 우리나라처럼 많은 인원을 처벌하는 나라도 없다. 우리나라를 제외하고 전 세계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로 수감 중인 양심수는 200~300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1600명이다. 과연 우리가 지켜야 할 나라가, 자신의 양심 때문에 도저히 총을 들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을 엄벌해야만 하는 그런 그악스러운 나라여야 하는가

한홍구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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