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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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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의 원조는 친일파였다

등록 2002-12-04 15:00 수정 2020-05-02 19:23

기독교 지도자는 미국 평정하자며 ‘平康美洲’로 개명… 후천성 반미결핍증의 웃기는 역사

지난 11월30일 대학로에서는 미군 궤도차량에 의해 목숨을 잃은 두 여중생을 추모하고, 책임을 져야 할 미군에 대해 무죄평결을 내린 미군의 재판에 항의하며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개정을 촉구하는 집회가 있었다. 이 집회의 첫머리에는 수십명의 남녀 대학생들이 미국에 대한 항의로 삭발을 단행했다. 100년 전 단발령에 저항하면서 “내 목은 잘라도 내 머리는 못 자른다”고 외친 최익현의 후예들이 바리캉 앞에 스스로 머리를 내놓았다. 난데없는 야외 이발소가 설치되고, 학생들이 의자에 앉자 삭발을 위해 포대기를 두른다. 한반도기였다. 흰 바탕에 그려진 한반도가 찬 겨울공기 속에서 서글프도록 푸르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문에 버티고 선 지도교사나 학생부의 눈을 피해 얼마나 애지중지하던 머리였을까 1960년 1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동두천 여인 삭발사건에서는 미군이 미군기지에 몰래 들어간 두 여인의 머리를 밀어버렸는데, 오늘은 여학생들이 머리를 깎는다. 이런 모습의 딸을 보며 우실 어머니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난다고 목이 메는 파르라니 머리 깎은 여학생의 모습 위로, 눈을 부릅떴을 최익현의 모습과 초점을 잃은 동두천 사건의 두 여인의 모습이 겹치면서 나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신미양요, 350명 전사했어도 격퇴

우리와 미국은 참으로 특별한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두 나라의 기구한 만남은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1871년의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 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라 부르지만, 한-미 관계의 첫 장을 전쟁으로 여는 것이 못마땅해서인지 교과서는 이를 전쟁이라 부르지 않는다. 당시 조선은 350명이 전사하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미군을 ‘격퇴’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여가 지나 1882년 조미수호조약을 맺었다. 조미수호조약에는 다른 열강들과 체결한 불평등조약과는 다른 한 조항이 삽입되어 있었다. 이른바 ‘거중조정’(good offices) 조항인데, “만약 다른 열강이 체약국 정부에 대해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대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체약당사국은 그러한 사건에 관하여 통지를 받는 대로 원만한 타결을 위하여 거중조정을 다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조선 조정은 이 거중조정 조항을 하나의 군사동맹에 준하는 내용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한 반면, 미국은 의례적인 표현으로 여겼을 뿐이다. 그러나 이 조항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많은 조선인들, 특히 고종의 미국에 대한 처절하도록 안타까운 짝사랑의 근원이 되었다.

보수적인 지식인들은 화이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미국을 금수의 나라로 여겼지만, 개화파 지식인들은 미국을 영토적 야심이 없는 부유한 나라, 공의와 신의를 중시하며 외국과 체결한 조약을 엄수하는 모범적인 문명개화국, 자유와 인권 등 인류보편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세계 등 극히 호의적으로 보았다. 민씨 정권의 핵심인물로 미국을 둘러본 민영익(閔泳翊)은 미국을 둘러본 뒤 “나는 암흑에서 태어나 광명 속에 들어왔다가 다시 암흑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물론 당시의 개화파 지식인들이 모두 미국에 대해 일방적인 짝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개화파 관료로 외무대신 등을 역임하면서 미국과의 교섭에 나선 김윤식(金允植)은 이미 1895년에 “미국 사람들은 말만 떠벌리지 하나도 행동으로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또 유길준(兪吉濬)은 1885년에 쓴 에서 당시 조미수호조약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뜬 분위기에 대해 미국은 멀리 대양 건너편에 있으며, 우리나라와 별로 관계가 없으며, 그들이 말로는 도움을 줄 수 있을지언정 군대를 동원해서 구원해줄 수는 없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고종은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너무나 미국에 기대려 하였다. 호암 문일평(湖岩 文一平)은 그의 명저 의 결론에서 한국이 세상 돌아가는 것과 미국의 정책을 알지 못하고 한갓 그네들에게 의뢰하려고만 하여 미국인 고문을 초빙하고 미국인에게 많은 이권을 양여하는 등 “아무쪼록 미국인의 환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원조를 크게 기대하였음”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미국 정부가 미약한 한국을 위해 전 책임을 질 리가 없다는 점에서 돌이켜 생각하면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고 탄식했다.

미국 비판에 기독교 인사들 대거 동원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테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정부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태프트-카쓰라 밀약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일본이 묵인하는 대가로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는 것을 묵인했다. 루스벨트는 이런 밀약이 한 부분을 이루는 러일전쟁의 종결을 위한 포츠머스 강화회의를 주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을사조약으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자 제일 먼저 미국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해방 뒤에 미국이 돌아왔을 때 사람들 사이에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말고, 일본놈 일어나니, 조선사람 조심해라”라는 말이 널리 퍼진 것도 이런 기억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미국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애증이 교차하고 있었다. 3·1운동 당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상당한 동력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베르사유 강화화의에서 이 꿈이 깨진 뒤에도 미국에 대한 인식이 결정적으로 악화되지는 않았다. 1920년 미국 의원단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각 언론은 미국을 세계의 광명으로, 미국 의원단의 방문을 가뭄 끝의 단비로 찬양하는 등 미국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사회주의가 퍼지면서 미국도 제국주의 국가라는 인식이 퍼지고, 1921년에서 1922년까지 열린 워싱턴 세계군축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역시 외면하자 독립운동가들은 미국을 명백한 제국주의 국가로 인식하게 되었다. 김규식과 여운형 등은 해방 직후 미군정이 가장 선호한 지도자들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미국에 대한 실망에서 모스크바로 눈을 돌려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이 주최한 제1차 극동노력자회의에 참가하여 미국을 규탄했다. 특히 김규식은 “자국의 이타주의 지향성과 민주주의 원칙의 범세계적 적용을 그토록 떠들어온 위대한 미공화국”이 가면을 벗어던지고 “영국·프랑스·일본 등 악명높은 3대 흡혈귀 국가와 가증할 4강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흡혈귀 국가가 되었다고까지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자들이 미국을 규탄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1935년 코민테른 7차대회가 반파쇼인민전선 노선을 내걸고, 미국과 소련이 2차대전에서 연합국으로 손잡고 싸우게 되자 사회주의자들은 미국에 대한 비판을 거두었다. 그 대신 친일파들이 “귀축미영(鬼畜美英)을 박멸하자!” 즉, 미국귀신이나 영국귀신, 미국짐승이나 영국짐승을 때려잡자라고 목이 터지게 외치게 된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기념하는 시에서 한 시인은 나 같은 역사가들에게까지 이렇게 호령한다. “이날에/ 영미의 세대가 끝나고/ 아세아의 세대가 시작되니라/ 오직 이렇게 그대는 써라/ 역사가야.”

이 암흑의 시기에 일제에 의해 강압에 의해, 또는 자발적으로 친일시를 쓰고 “귀축미영을 박멸하자”는 나팔수가 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특기할 점은 미국에 대한 비판에는 기독교 인사들이 대거 동원되었다는 사실이다. 앞에 인용한 시를 쓴 사람도 형제가 요한과 요섭이라는 기독교 이름을 나누어 가진 유명한 문인이다. 분단 이후 한국 기독교계의 대표적 지도자가 된 어느 목사는 아예 창씨명이 平康美洲였다. 미국 대륙을 평정한다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미국과 기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니 일본으로서도 기독교인들을 동원해 미국을 공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깊이 참여한 조지 오글 목사는 반미의 무풍지대였던 한국이 가장 강력한 반미운동의 본거지가 된 것이 너무나 드라마틱한 일이라 했지만, 미국에 의해 육성된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 ‘반미성전’(反美聖戰)의 열렬한 전사가 되었다가 다시 친미파로, 미국신사로 둔갑한 것 역시 너무나 드라마틱한 일이 아니었을까

후천성 반미결핍증의 이상한 증상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 기독교인들의 반미가 꼭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를 윤치호(尹致昊)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그는 일기에서 “수세기 동안 유색인종에게 복속과 치욕을 준 너희들의 뽐내던 과학과 발견, 그리고 발명을 가지고 지옥으로 가라”라고 썼다. 공개적인 글이나 좌담에서 행한 발언이라면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 보아줄 수 있지만, 남이 보지 않는 일기에까지 이렇게 쓴 것을 보면 친일인사들의 반미성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치호는 미국 유학시절 황인종이라는 이유로 숙소를 구하지 못해 역에서 밤을 새우는 등 심한 인종차별을 당해 죽고 싶을 정도의 좌절감에 빠지기도 한 인물이다. 독실한 기독교도이기도 했던 그는 미국의 유색인종 차별을 몸으로 겪으면서 이 문제를 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윤치호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찬양했으며, 을사조약 체결 이후 미국이 맨 먼저 이를 승인하자 미국에 대한 원망과 분노에 떨었다. 이런 그의 태도는 105인 사건 이후 그가 왜 일본의 대륙진출에 동조하면서 백인종을 무릎 꿇게 만드는 것에서 대리만족을 구하였는가에 대한 해답의 단서를 제공한다.

일제강점기에 국내의 명사들이 대대적으로 반미성전에 앞장섰다면,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상류층들은 집단적으로 몹쓸 병에 걸려버렸다. 어떤 의사들은 이 병을 후천성 반미결핍증이라 부르는데, 일부에서는 이 병이 후천성이 아니라 선천성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이 한때 반미의 열렬한 선구자()였던 점을 본다면 후천성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의 자식들이 수직감염되는 사례가 빈발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후천성이던 이 병이 선천성 유전병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한번 이 병에 걸리면 여간해서는 고쳐지지 않고, 반미의 ‘반’자만 보아도 화들짝 놀라고 흥분해서 날뛰게 된다.

이 병의 특징은 멀쩡한 두 발을 갖고서도 자신이 홀로 설 수 없다고- 증세가 심해지면 홀로 서서는 안 된다고까지- 생각하면서, 자신의 두 발로 대지에 굳건히 내려 서려는 건강한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두들겨패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이 병의 병원균은 뇌 속 깊이 침투하여 환자 스스로 병에 걸린 사실을 부인하게 만들기 때문에 환자들이 절대로 약을 복용하지 않고, 완강히 치료나 요양을 거부하게 한다. 모든 치료를 거부하면서, 건강한 사람들이나 이 병에 걸렸다가 건강을 되찾은 사람들에 대해 살의에 가까운 적개심을 품는 공격성 때문에 허준 같은 명의가 있다 해도 환자를 돌보기 어렵다.

흔히 진보적인 사람들은 이 몹쓸 병에 잘 안 걸린다고 생각하는데, 해방 직후 상황을 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해방 직후의 대표적 좌파 지식인의 한 사람인 박치우(朴致祐) 같은 사람은 ‘조선에 반미론자가 없는 이유’라는 글까지 썼다. 이 글에서 그는 ‘조선민족은 은혜를 원수로서 갚는 따위의 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타도 양키’를 부르짖던 친일파마저 ‘보살도 오히려 부러워할 정도의 관용정책’을 실시한 ‘무제한 무차별적인 박애주의자’인 미국에 대해 ‘반미적 언동 같은 것은 엄두도 내려는 자가 전무(全無)’하다는 것이다. 박치우가 미국이 왜 친일파에 대해 박애정책을 폈는지 이유를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도 반미결핍증이 상당히 진척된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러나 친일파에 대해 보살도 부러워할 정도의 관용정책을 펴던 미국과 미국의 비호를 받는 친일파들이 진보적·민족적 입장을 견지한 사람들을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박치우 같은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후천성 반미결핍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조선에 반미론자가 없는 이유’ 같은 글을 쓴 자신이 미워서였을까 박치우는 빨치산을 키워내는 강동정치학원의 정치부원장이 되었다가 뒤에 빨치산 부대의 정치위원이 되어 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전선에 몸을 바쳤다.

반미를 이야기하던 이들은 다 죽고…

박치우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겠지만, 해방 직후 미국을 환영하던 진보적인 사람들이 뒤늦게나마 미국의 대한정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통렬하게 깨닫기 시작할 무렵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제대로 된 반미운동이 뿌리내리기도 전에 민간인 학살이 이 땅을 휩쓸고 지나갔고, 반미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죽었다.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들도 굳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학살의 무덤 위에 선 대한민국을 장악한 친일파들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한탄강 일대의 들쥐들이 들녘을 뒤덮은 전사자들의 시체를 파먹고 유행성 출혈열 균을 키워갔듯 학살의 무덤 속에서 후천성 반미결핍증 병원균은 걷잡을 수 없이 배양되었다.

한국전쟁 직전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 이 땅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반미의 무풍지대가 되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각종 정치적 탄압의 수단이 목표로 삼은 것은 다 통일운동과 민족자주를 주장하는 세력이었다. 이승만의 저격미수범도 사형을 받지 않던 시절 조봉암은 처형되었다. 그리고 민족일보의 청년 사장 조용수, 통혁당 사건, 인혁당 사건, 남민전 사건 등에서 사형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통일을 이야기하던- 통일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히 미국 이야기가 나오게 되어 있다- 사람들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군 범죄를 비롯해서 미국에 비판적인 기사를 신문이나 잡지에서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의 병영국가 건설이 본격화된 유신시대가 되면 미국에 비판적인 기사는 신문에서 사라져버린다. 올곧은 언론인들을 학살한 유신시대에 편집인인 김대중 같은 인물들이 승승장구했고, 가장 민감하게 사회문제를 전달해야 할 언론은 후천성 반미결핍증 환자들의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홍길동의 10대손 홍만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미국을 비판하던 소설 같은 작품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만이 온 산하에 가득했던 시절이다. 미국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기사를 찾아볼 수 없게 만든 박정희를 일부 인사들이 마치 반미와 자주국방의 기수인 양 떠받드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미국이라면 꺼뻑 죽던 이 땅에서 반미라는 불온한 움작임이 시작된 것은 1980년 5월 광주를 겪고 난 뒤의 일이다. 광주항쟁 당시 시민들은 미국이 7함대를 파견하자 민주국가인 미국이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7함대를 보낸 것이라고 좋아했다. 그러나 이는 오해도 엄청난 오해였다. 미국은 전두환 일당이 광주시민들의 정당한 저항을 마음놓고 짓밟는 동안 이북을 견제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반미의 무풍지대였던 한국을 1980년대에 가장 강렬한 반미운동을 전개하는 나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워낙 오랜 기간 반미라는 말을 감히 꺼낼 수 없었던 까닭에 반미운동의 점화가 쉽지는 않았다.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의 경우 학생들은 미국의 광주학살에 대한 지원에 항의하러도 아니고, 다만 미국이 광주학살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물어보러’ 들어간 것이다. 물론 당시 학생들의 의식수준이 이 정도에 머물러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후천성 반미결핍증이 워낙 널리 퍼져 있다 보니 학생들은 조심스럽게 첫 발을 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우리 사회에 후천성 반미결핍증에 대한 백신을 공급하기 위해 김세진·이재호 열사는 자기 몸을 불살라야 했다.

젊은 세대가 비추는 서광

국방의 의무를 지러간 젊은이들을 전경으로 차출하여 치안유지에 돌리는 위헌을 일삼은 자들은 그것도 모자라 전경들을 미군기지 앞에 배치한다. 이 세상 어느 천지에 경찰이 군대를 지켜주는 꼴은 있어 본 적이 없다. 더구나 미군은 언필칭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와 있다는 존재가 아닌가 후천성 반미결핍증이 맹위를 떨치는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꼴불견이다. 80년대 중반 반미가 아주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면, 지금은 그런 엄숙함과 무거움 없이 자연스럽게, 아주 대중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미운 놈 미워할 줄 알고, 기분 나쁘면 나쁘다고 말하는 젊은 세대들. 그들은 김남일 선수가 미국 선수 8명과 맞장을 뜨자고 눈을 부릅뜬 것에 환호하고, 안정환 선수의 오노 세리머니에 열광하는, 후천성 반미결핍증에 대한 항체를 갖고 있는 세대다. 이 젊은 세대의 힘은 불치병으로 알려진 후천성 반미결핍증의 치료에도 서광을 비추고 있다. 미국의 양자가 되지 못해 안달하던 사람들조차 SOFA의 불평등성을 이야기하니 대통령 선거가 좋긴 좋다. 체육관에서 끼리끼리 모여 대통령을 뽑던 시절 후천성 반미결핍증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지 않았던가

한홍구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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