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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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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의 사슬, 욕망의 뿌리

등록 2002-11-22 00:00 수정 2020-05-03 04:23

성적 대상화 일삼는 도구로 다양하게 활용…인류사의 치부로 지금도 흔적 남아 있어

얼마 전에 ‘성폭력 방지 팬티’라는 해괴망측한 이름의, 쇠줄을 부착해 당기면 벗겨지지 않는다는 성폭력 방지 기능 팬티가 나와서 화제를 모았다. 일부 사회단체에서는 이에 대해 “현대판 정조대다. 끝까지 저항하면 강간은 불가능하다는 식의 잘못된 통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비난성명과 더불어 불매운동을 벌일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정조대라면, 십자군 전쟁 당시 성지 탈환을 위해 장기간 원정에 나선 영주나 기사들이 부인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철갑 팬티’에 쇠를 채우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지만 정조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미 고대부터 존재했으며, 근대에 들어서도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유럽 여러 나라에서 판매됐다.

동서양 막론하고 은밀하게 거래

그리스의 스파르타에서는 ‘헤라클레스의 매듭’이라 부른, 처녀들의 은밀한 부분을 모직띠로 두르고 묶었다가 신혼 첫날밤에 신랑이 풀도록 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한 의미의 정조대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결혼 적령기 처녀에게만 강요했고, 이러한 순결을 지키려는 습속은 다른 지역에서도 흔히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고대 에티오피아에서는 여자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실로 대음순을 봉합했다. 생리현상에 필요한 부분을 제외한 어떠한 출구도 막았고, 혼롓날이 잡혀져야 비로소 실을 끊어 개봉했다. 이렇게 음부를 봉쇄하는 방법은 이집트와 아시아는 물론 고대 로마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현재 파리의 클뤼니 중세박물관이나 암스테르담의 섹스박물관에 보관 중이거나 전시된 형태의 정조대들은 중세 이탈리아에서 기원했다. 특히 14세기 무렵 파도바를 다스린 독재자 프란체스코 다 카라라가 궁전의 모든 여성에게 정조대를 채웠다는 역사적 사실은 너무도 유명하다.

정조대는 남자가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착용하게 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간혹 있었는데, 14세기 프랑스 시인 기욤 드 마쇼가 쓴 자전적 시에서 진기한 사례를 발견한다.

“아,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나를 포옹했네/ 그리고 열쇠 하나를 꺼냈네/ 그것은 황금으로 만든, 명인의 손길이 닿은 것/ 아름다운 그녀가 말했네/ 이 열쇠를 소중히 간직해주세요/ 절대로 잃어버리지 마세요/ 왜냐하면 이것은 내 보물의 열쇠/ 당신만을 위해 황금으로 만들었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소중하게 간직하세요/ 내 오른쪽 눈보다 이것을 더 사랑해주세요/ 이것은 나의 명예, 나의 재산/ 이것이야말로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랍니다.”

남성도 간혹 착용… 특수 목적 기구도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이 만든 는 정조대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벨트는 십자로 엮은, 아주 유연하고 얇은 철판 두장으로 돼 있고 벨벳으로 덮여 있다. 한장은 허리 위를 둥그렇게 두르게 돼 있다. 다른 한장은 넓적다리 사이를 지나 그 끝이 다른 한장의 양쪽 끝과 연결된다. 이렇게 연결된 세개의 끝부분을 자물쇠로 모두 채웠다. 자물쇠를 여는 비밀은 오로지 남편만이 알고 있었다. 넓적다리 사이를 지나는 판에는 아내의 정조가 지켜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구멍이 있어 볼일을 보는 데 곤란함이 없도록 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에는 정조대 제조업자들의 상품소개서가 시중에 나돌았다. ‘강간 방지기구, 여성의 정조를 지키는 보호기구’라는 제목 아래 ‘호신구와 간단한 열쇠 120프랑, 호신구와 고급 장식 열쇠 180프랑, 호신구와 은열쇠 세트 320프랑’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또한 1885년에 발행된 어떤 자료에는 ‘산화방지를 위해 기구 안쪽을 은으로 만들고 금박을 했습니다. 이 기구는 원하는 바대로 앞뒤의 보호가 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항에 유의하기를 바랍니다. 뒤쪽을 보호하고자 할 경우 다소 문제가 생길 염려가 있습니다. 또한 뒤쪽의 욕구를 원활하게 만족시키려면 가지고 와서 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앞의 욕구는 기구를 부착한 채로 만족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기구는 열쇠로 안전하게 채우도록 돼 있습니다. 앞부분만 300프랑, 앞뒤 양쪽은 500프랑. 측정을 부탁드리는 치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치구(恥丘) 위에서 허리까지, 그리고 치구의 너비’.

특수한 목적의 정조대도 있었는데, 이른바 ‘자위방지용 정조대’. 일반적인 정조대와 대체로 비슷했지만 앞부분이 조금 달랐다. 의료용으로 개발됐으나 본래 목적과는 다르게 쓰였고 청소년용도 있었다.

여성의 권익이 향상되기 시작한 근대에 들어 정조대는 사회문제가 돼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다. 1882년 4월20일치 스페인 일간지 은 다음과 같은 사건을 보도했다. “어제 오후, 부오나비시타의 세논 마로트 판사는 중요사건을 처리해야만 했다. 익명의 젊은 여성이 조그만 기구 하나를 벗겨줄 것을 호소했는데…. 십자군 전쟁 때 성지로 향하기 전 부인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채운 기묘한 기구였다.” 그리고 신문은 정조대를 채운 자가 동거하던 의사임을 밝혔다. 넉달 뒤에 같은 신문은 판사가 피의자인 의사로 하여금 열쇠를 가지고 법정에 출두할 것을 명령했고, 단순 경범죄로 사건을 처리했음을 이어서 보도했다.

보이지 않는 정조대가 떠돌고 있다

정조대 역사는 한 욕망이 또 다른 욕망을 없애거나 억압하고자 한 인류사의 치부였다. 그 역사는 중세만이 아닌 지금 우리가 사는 21세기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목격한다. 그러나 간통죄가 아직도 적용되는 우리 사회에서 우리들은 누구나 보이지 않는 정조대를 차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도상학연구가 alha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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