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락치까지 강요한 가장 비열한 국가범죄… 진실 밝힐 의문사진상규명위는 벽에 부딪혀
정성희, 한희철, 이윤성, 김두황, 한영현, 최온순….
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이들은 전두환 일당이 군사반란과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한 이후 자행한 이른바 녹화사업에서 희생된 젊은 넋들이다. 그들이 목숨을 잃은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 우리는 아직도 녹화사업의 실체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의 소위 수많은 ‘업적’(?) 가운데 필자같이 박정희를 형편없는 대통령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인정할 수 있는 게 녹화사업이다. 박정희가 벌거벗은 산을 녹화하려 했다면, 전두환 일당은 ‘붉게 물든’ 대학생들의 머릿속을 ‘녹화’하려는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웠다. 그것도 강제징집이라는, 국방의 의무를 정권안보에 이용하는 악랄한 발상을 통해서.
개인적인 ‘씁쓸한’ 기억
녹화사업이란 전두환의 집권 초기에 강제징집된 학생운동 출신 대학생들을 ‘특별정훈교육’으로 순화한다는 명목으로 보안사가 마련한 계획이다. 이 사업에 따라 강제징집된 사병들에 대한 강압적인 사상개조와 학생운동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불법연행과 수사가 자행됐고, 엄청난 육체적·정신적 가혹행위가 가해졌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보안사가 녹화사업 대상자들에 대해 관제 프락치 공작을 강요했다는 점이다. 즉 이들에게 휴가를 줘서 내보내 과거에 함께 활동한 동료·선후배들의 행적과 동향을 파악해 보고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너 하나쯤 죽어도 안전사고로 보고하면 그만이다”라는 협박 속에서 엄청난 고문을 당하며 녹화사업 대상이 된 사병들의 인간성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녹화사업에 대하여 ‘씁쓸한’ 기억을 갖고 있는 필자는 ‘객관적’으로 서술할 위치에 있지 않다. 필자 자신이 녹화사업의 1기 대상자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굳이 ‘씁쓸한’이란 말을 쓴 까닭은 너무나 운좋게 필자는 가혹행위를 당하지 않았고, 프락치 공작도 강요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녹화사업 대상자라는 같은 운명에 놓였다가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끝내 살해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그분들께 늘 마음의 빚을 지고 살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의 군사반란 이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분들이 목숨을 잃었고, 의문사라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했다. 이들 의문사 사건의 대부분은 국가기관이 가해자로 추정되는 사건들인데, 피해자 신분을 보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접수된 85건 가운데 군인이 25건으로 가장 많다. 그 중 공식적인 녹화사건 관련자가 모두 6명이다.
1980년대 초반의 녹화사업은 군이 국방의 의무를 처벌의 수단으로 악용하고, 나아가 프락치 공작을 강요하였다는 점은 씻을 수 없는 범죄행위다. 역사사회학의 세계적인 대가인 찰스 틸리는 국가의 성립 자체를 조직범죄로 보고 국가의 행동양식을 조직범죄와 견주기도 했지만, 녹화사업은 그런 국가폭력이나 국가범죄 가운데서 가장 비열하고 치사한 것이었다. 녹화사업과 강제징집은 단순히 보안사만이 관련된 것이 아니라, 문교부, 병무청, 국방부, 육·해군본부, 검찰 등 정부의 여러 부서가 간여한 종합적인 범죄행위였다.
박정희 정권 때는 그래도 순진했다
아들이, 동생이 감옥에 가는 대신 군에 간 것을 다행이라고 여긴, 등록금까지 주지 않고 억지로 군대에 보냈다가 사망통지서를 받은 부모와 형제들의 가슴에 못을 박은 비열한 행위가 녹화사업이었다. “군대에 가면 운동권에서 멀어지겠지 하는 생각에 보냈는데, 그게 동생 죽으러 가는 길인지도 모르고,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하는 길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보내려고 했던 것이 이제 평생 한으로 남았습니다”라고 김두황씨의 형 김두원씨는 말한다. 가족이 사진을 치워버리자 그저 아들 얼굴만 그림으로 그리던 어머니는 곧 아들의 뒤를 따랐다.
우리나라에서 강제징집을,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이용한 것은 1971년 10월의 교련반대 데모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박정희 정권은 학원의 군사화에 반발하는 대학생들을 경찰력만으로는 막을 수 없자 위수령을 발동하여 대학을 군홧발로 짓밟고, 전국 각 대학에서 학생운동 핵심인물 170여명을 제적하여 군대로 보내버렸다. 그런데 이들이 한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다 보니 전국의 대학생들끼리 자연히 연결되었고, 그때 맺은 인간관계가 74년 민청학련을 조직할 때 요긴한 밑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박정희 시절의 강제징집은 좀 순진한 구석이 있어서 아직까지는 녹화사업처럼 학생운동 출신 사병들을 프락치 공작에 이용하려는 비열한 시도는 없었다.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9년 10월 전국의 각 대학은 정부의 강요에 의해 학칙을 개정하여 지도휴학제를 도입했다. 휴학이란 원래 학생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었지만, 이제 학교당국- 실제로는 공안당국- 이 학생들을 강제로 휴학시켜 군에 보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실제로 이 제도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지도휴학 대상이 되어 일부는 군에 끌려가고, 일부는 반유신데모를 주도하여 군대 대신 감옥을 택하기도 했다. ‘문제학생’을 강제징집하여 군에 보내는 발상은 뒤의 녹화사업 사례에서 보듯이 당시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와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전두환이 집권한 80년 당시 학생운동 주역들 가운데 검거되었다가 석방되거나 6개월 정도의 단기형을 살고 출옥한 사람들은 군대로 보내졌다.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를 차지한 그해 12월에는 서울대에서 학회들의 연락모임이 적발되어 이른바 ‘무림’사건이 일어났고, 이듬해 초에는 부산대에서 ‘부림’사건, 그리고 전국민주학생연합을 결성하려던 시도가 적발되어 ‘학림’사건이란 이름이 붙었다. ‘무림’이니 ‘부림’이니 ‘학림’이니 하는 이름은 관련학생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수사기관에서 임의로 이름 붙인 것인데, 어떤 증언에 따르면 동백림 사건의 ‘림’자를 따서 돌림자로 삼았다고 한다.
6대 독자와 소아마비 장애인까지 입영
이 사건 관련자들은 대체로 A, B, C 세 등급으로 나뉘어 A급은 감옥으로 가고, B급과 C급은 군대에 강제입영되었다. 그리고 81년 12월5일, 정부는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를 통해 학생운동과 관련된 학생들을 조기입영시키기로 했다. 조직사건이 아니더라도 단순시위에서 검거된 학생들도 강제입영되기 시작했다. 대학생이 휴학해 학적 변동자가 되어 빠르면 1개월, 늦으면 6개월 이상이 지나야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특수학적 변동자’들은 집에서 밥 한끼 먹을 틈도 없이 수사기관에서 군대로 직행했다.
이때 강제입영된 사람들 가운데는 군대에 갈 만한 상황이 아닌 사람들이 많았다. 필자처럼 신체검사를 받고 군에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는 안경을 벗으면 기어다닐 정도로 눈이 나빠 이미 신체검사에서 면제를 받은 선배도 있었고, 습관성 탈골로 면제대상이 분명한 사람도 있었다. 어떤 증언에 따르면 심지어 6대 독자나 소아마비 장애인까지 군에 끌고갔다고 한다. 이윤성씨는 만 20살이 안 돼 징집연령에 해당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가 60고령인 2대 독자로 시력도 극도로 나빴는데도 군에 강제징집되어 결국 녹화사업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월북을 기도하여 보안대에서 조사받았다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쓴 채.
녹화사업은 전두환 정권 출범 이후 본격적으로 강제징집된 학생들이 제대할 시기가 가까워지면서 시작되었다. 81년 1월에 입대한 무림사건 관련자들 가운데 교련교육으로 인해 병역단축 6개월을 받은 사람들은 83년 3월 말께 제대하도록 되어 있었다. 전두환 일당은 국방의 의무를 악용해 ‘문제학생’들을 학원에서 분리했지만, 학원시위는 가라앉지 않았고, 이제 강제징집된 학생들이 줄줄이 학원으로 돌아가게 되자 어떤 대책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에 보안사는 82년 9월 사령부 대공처에 중령 서의남을 책임자로 하는 5과(심사과)를 신설하고, 그들의 용어로 ‘문제발생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적극적 예방대책’을 세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과정에 전두환이 깊이 개입했다는 점이다.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 최경조의 증언에 따르면, 보안사 간부들과의 청와대 만찬에서 운동권 출신 입대자들이 불온낙서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전두환이 “야, 최경조, 너 인마 뭐하는 거야”라고 질책하여 특별정훈교육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보안사의 특성상, 그리고 보안사령관 출신인 전두환과 보안사의 특수한 관계를 놓고 볼 때 당시 전두환의 이런 발언은 ‘명백한 지시’였다.
80년 이후 군에 강제징집된 학생들의 수는 약 1100명으로 추산된다. 군이 정확한 자료를 내놓지 않아 실상을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81년 11월부터 83년 11월 사이의 입대자 447명 가운데 82년 9월부터 녹화사업이 외형상 중단되는 84년 11월까지 모두 256명이 교육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이 통계는 축소된 것으로 무림사건 관련자 등 81년 11월 이전에 입대한 사람들은 빠져 있다.
새까만 쫄따구에 ‘부탁’했다?
88년 12월 5공청문회에서 당시 보안사령관 박준병은 프락치 공작을 일부 시인했다. 그런데 그는 정보수집과 관련하여 일부 관계자들이 사병들에게 ‘부탁’한 사례가 있었을 것이라고 발뺌했다. ‘부탁’이라니! 군대에 ‘부탁’이라는 게 있을까? 더구나 서슬푸른 보안대의 수사관들이 새까만 쫄따구에게 ‘부탁’을 하겠는가? 83년 5월에 이윤성, 6월에 김두황, 7월에 한영현, 8월에 최온순이 연달아 목숨을 잃었다. 이들이 겨우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목숨을 끊거나 죽음을 당해야 했겠는가?
친구를 팔라는 프락치 공작은 국방의 의무를 지는 사병들을 공작정치의 도구로, 아니 자신의 출세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던 보안사 요원들의 비열한 인간성 파괴행위였다. 일부는 친구들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다 아는 정보를 물어다주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그 좋은 휴가기간에 아무도 만나지 않고, 전화도 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다가 귀대하기도 했고, 일부는 어쩔 수 없이 몇 가지 사실이나 이름을 대주고는 평생을 괴로워해야 했다. 녹화사업은 단순한 정훈교육이 아니었다. 몇몇 비전향 장기수들은 과거 박정희 시대의 강제 전향공작에서도 단순히 전향서에 도장을 찍는다고 전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동지를 팔아야만, 그래서 다시는 과거의 동지들과 만날 수 없게 되어야만 전향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전두환의 보안사는 ‘순화’의 기준을 단지 교육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렇게 반인륜적인 수준에서 강요했다. 그리고 일부 보안사 요원들은 학생들을 이용하여 출세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프락치 공작을 강요했다. 당시 보안사는 공작예산의 절반가량을 이 사업에 쏟아부을 정도로 녹화사업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흉흉한 소문으로 떠돌던 프락치 공작과 학우들의 사망소식에 관한 학원괴담은 84년 3월에 제적생과 해직 근로자를 위한 기도회에서 처음으로 종합적으로 제기되었으며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여론이 거세지자 정부는 84년 9월에 ‘소요 관련 대학생 조기입영제’를 폐지했고, 이어 녹화사업의 전담부서인 보안서 3처5과도 폐쇄했다. 그러나 녹화사업이 전면 중단되지는 않았다. 90년의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에서 보듯이 학생운동 관련자들을 이용한 프락치 공작과 민간인들에 대한 사찰은 계속되었다. 전 국민이 입대예정자, 군복무자, 전역자이거나 그 가족인 이 땅에서, 누구도 보안사의 촉수를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군사정권 시기에 일어난 의문사를 파헤치기 위해 설치된 국가기관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다. 이 기관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아들딸을 가슴에 묻은 부모님들이 421일이라는 오랜 기간 국회 앞에서 농성을 해 겨우 얻어낸 것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출발도 힘들었지만, 그 권한은 너무나 미약했다. 의문사 사건은 모두 군·보안사·안기부·경찰·검찰·교도소 등 힘 있는 기관과 관련된 사건들이다. 그러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는 이들 기관을 상대할 아무런 수단이 없다. 기껏해야 출석요구에 불응하는 사람에게 과태료를 물릴 수 있을 뿐인데, 그나마 과태료를 어떤 방식으로 부과할지에 관한 절차도 확실치 않다.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시한이 오는 9월로 예정되어 있기에 의문사에 책임이 있는 기관들은 시간 끌기로 일관하고 있다. 진상규명위원회에서 관련자의 인적 사항을 요구하면 몇달씩 묵히다가 주민등록번호, 당시 주소·본적 등을 한 가지씩 알려주는 식이다. 자료를 요구하면 폐기하였다거나 아니면 어떤 자료인지 구체적으로 문건명을 적시하라고 한다. 도대체 밀실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정보기관의 문건명을 진상규명위원회가 어떻게 적시할 수 있단 말인가?
전두환 자녀들과 비슷한 연배인 희생자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경우 가해자들로부터 참혹한 사건들의 묻힌 진실을 끌어낼 수 있었던 유력한 도구는 사면권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 자신이 가해자였던 사건까지 포함하여- 을 말해주는 대가로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진술인이 기소되지 않도록 불처벌을 약속했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희생해 진실을 사들이는 이 방식을 놓고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2001년 4월 한국을 방문한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란데라 박사는 처벌을 통한 정의 구현을 바라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진실고백을 한 사람을 사면한다는 조항이 헌법재판소에까지 올라갔다고 전했다. 남아공의 악명높던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분리정책의 앞잡이들이 어떻게 사랑하는 가족들을 고문하고, 살해하고, 그리고 그 시체를 불태우거나 악어가 우글거리는 강 속에 처넣었는지를 들어야 했던 가족들이 가해자들의 처벌을 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남아공은 처벌에 앞서 진실을 택했고, 진실에 근거한 화해를 추구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의문사의 가해자로서 음습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공소시효의 완성이란 면죄부를 손에 쥐고 있다.
녹화사업은 단지 의문사 6건의 개별적인 사건 모음이 아니다. 이는 국가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진 지시에 의해 관련기관이 총동원되어 자행된 체계적인 국가범죄다. 힘 없는 민주당과 과거 국가범죄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인사들이 득시글거리는 한나라당은 여론에 떠밀려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시민사회 내에서 의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대부분 진상규명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이 운동을 밖에서 지원할 시민사회의 일꾼들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녹화사업으로 의문사한 정성희씨는 일기에서 언론이 제 구실을 못할 때 국민은 무기력해진다고 언론을 질타했다. 그 언론들은 의문사를 외면한 것처럼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도 외면하고 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고군분투해온 진상규명위원회는 이제 녹화사업의 최고책임자 전두환의 소환을 준비하고 있다. 녹화사업의 희생자들은 전두환의 자식들과 비슷한 연배다. 무능한 대통령과 여당, 무책임하고 뻔뻔한 야당, 그리고 무관심한 시민사회의 합작으로 어쩌면 저 녹화사업을 비롯한 의문사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게 될 날이 가까워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아남은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 회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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