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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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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는 정말 민족의 상징인가

등록 2002-06-27 00:00 수정 2020-05-03 04:22

일본국적 배 안에서 영국인 선장을 산파로 태어나 ‘붉은악마’ 속에서 펄럭이기까지

월드컵의 열풍 속에 온 나라가 붉게 물들었고, 우리 현대사에서 어쩔 수 없이 붉은색과 상극을 이루었던 태극기는 그 ‘붉은 무리’들의 상징으로 펄럭이고 있다. 그동안 국기 게양대에서 고고하게 펄럭이던 태극기,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희한한 주문의 대상이 되며 경건주의·엄숙주의의 상징이던 태극기는 두건으로, 치마로, 배꼽티로, 애교 있는 스티커로 다시 태어나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섰다. 올해는 태극기가 태어난 지 만 120년이 되는 해. 태극기가 이렇게 대중 속으로 파고든 것은 태극기의 짧지 않은 파란만장한 역사에서 처음이다.

마건충이 도안… 일본서 첫 게양

원래 국기를 갖고 있지 않았던 조선은 국기 문제로 운요호(雲揚號) 사건 등에서 일본에 곤욕을 치르고, 문호개방을 강요받았다. 그 뒤 조선에서 국기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김홍집(金弘集) 일행이 중국의 황준헌(黃遵憲)이 쓴 이란 책을 가져오면서부터였다. 이 책에서 황준헌은 청의 용기(龍旗)를 그대로 쓰라고 사용하라고 권했다. 이는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만천하에 알리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청에 조선은 어떤 색의 용기를 사용하면 되겠냐고 물었다. 이에 청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조선 국왕의 깃발인 용을 그린 네모난 기가 중국의 용기와 비슷하니 국기로 써도 좋다면서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 발톱이 다섯개인 오조룡(五爪龍)은 천자의 상징이니 제후국인 조선 국기의 용은 발톱을 네개로 하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조선이 청의 국기를 그대로 쓰는 일은 없었지만, 태극기의 탄생에도 청의 입김은 깊숙이 작용했다. 태극기가 박영효가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만들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그 도안을 누가 처음 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청의 사신으로 조선에 와 조선과 미국 간의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체결을 주도한 마건충(馬建忠)과 김홍집 간의 필담을 담은 (淸國問答)을 보면 태극기의 도안자는 바로 마건충이었다. 1882년 4월11일 마건충은 김홍집과의 회담에서 개인의견임을 전제로 조선의 국기를 흰 바탕에 태극 그림을 사용하고 주위에는 팔괘를 그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이런 회담이 있은 뒤 7월에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조선은 제물포조약에 따라 대관(大官)을 파견하여 일본에 사죄할 것을 강요받았다. 이때 사신으로 간 박영효는 일본 국적의 메이지마루(明治丸)란 배를 타고 갔는데, 이 배의 선장은 영국인 제임스였고, 조선주재 영국 총영사 애스턴도 동승했다. 박영효는 애스턴과 조선 국기에 관해 협의하였는데, 애스턴은 선장 제임스가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느라 각 나라의 국기에 정통한 사람이므로 그의 조언을 받으라고 충고했다. 제임스는 마건충의 도안대로 8괘가 다 들어가면 복잡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따라 그리기 힘들다고 충고하였고, 이에 따라 태진손간(兌震巽艮) 4괘를 들어내고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만 남기면서 상하좌우에 있어야 할 정괘를 45도 왼쪽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태극기가 처음 게양된 곳은 일본 고베의 박영효 일행 숙소였다. 태극기는 중국인의 기본 도안에 일본에 사죄하러 가는 일본 국적의 배 안에서 영국인 선장을 산파로 해서 태어나 조선 사람들에게 선보이기도 전에 일본에 나부끼는 기구한 운명을 갖게 된 것이다.

태극·괘 모양 싸고 끊임없이 시비

태극기뿐 아니라 최근에 일본에서 국가라는 공식적인 지위를 얻은 기미가요 역시 영국인 작곡에 독일인의 편곡을 거쳐 태어났으니, 동아시아에서 근대국가의 상징을 만들어내는 과정에는 외세의 침탈과 개입이 짙었던 것이다. 태극기는 탄생과정에서 외세가 깊게 개입했을 뿐 아니라, 그 내용도 우리 고유의 문화나 전통이 아닌 중국의 에서 빌려온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사전’(繫辭傳)의 “태극이 양의(兩儀: 음양)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생하고 사상이 8괘를 생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태극기의 기본원리인 태극과 4괘는 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듯 출생과정도, 그 내용도 우리나라 사람이나 우리 고유의 것보다는 외국인과 외국적인 내용이 지배적이고, 애국가의 작사자로 확실시되는 윤치호(尹致昊)처럼 박영효도 말년이 친일로 얼룩지다 보니 민족주의자들의 입장에서 태극기를 민족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것이 조금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온 시도가 ‘태극기의 한국화’ 또는 ‘탈중국화’였다. 한 예로 1957년 ‘우리국기보양회’에서 펴낸 을 보면 태극팔괘를 단군성조(檀君聖祖)의 가르침에 따라 고래 조선에서부터 국기로 사용하였다고 하고 있다. 또 대한민국국기선양회에서 1995년에 태극기 변천사 전시회를 하면서 펴낸 도록에는 1392년에 제작되었다는 범종이 실려 있는데, 이 종에는 현재의 태극기와 흡사한 4괘를 가진 태극기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만일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이 종의 실물은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이 단체는 태극기가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승만 정권 아래서 문교부 장관을 지냈고, 박정희 시절에는 박정희와 국무위원들에게 1년여에 걸쳐 국난극복사를 강의한 바 있는 이선근(李瑄根)은 이집트와 로마, 아테네, 비잔티움에서 멀리 미국 원주민의 토기 등 고대 유물과 신라의 곡옥(曲玉)에 이르기까지 태극 모양과 조금이라도 유사한 모양을 찾아내어 태극이 중국의 전유물이 아니라 ‘상고 인류 공통의 우주관’을 상징한다고 강변했다.

1949년 국기제정위원회가 현재의 도안대로 태극기의 모습을 확정한 이후에도 태극기의 음양의 각도와 괘의 배열을 둘러싸고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태극기의 모양이 에는 별로 소양이 없었을 영국인 선장의 조언에 따라 보기 좋게 8괘를 4괘로 줄이고, 4괘의 위치도 네 구석으로 배열하다 보니 당연히 깨나 한다는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태극기의 모양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독립문에도 태극기가 조각되어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 현재와는 괘의 위치가 다르게 배열되어 있다. 이탈리아와의 축구경기에서도 관중석 벽을 따라 여러 형태의 옛 태극기가 게양되었는데, 괘의 위치나 음양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윤봉길 의사는 폭탄을 던지러 가기 전에 백범 김구 선생과 대형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남겼는데, 사진 속의 태극기는 지금을 기준으로 보면 ‘잘못’(!) 게양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사진첩에는 이를 오늘날의 기준에 맞게 ‘바로잡아’ 놓아 쓴웃음을 짓게 한다.

일본 순사들의 놀라운 재활용 정신

의 해석에 근거해서 태극기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자 이선근은 1959년에 태극기의 도안은 중국의 주역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며 태극기에 대해 “중국식 역학자의 사고방식”을 갖고 “더 이상의 부질없는 해석은 누구나 삼가야 한다”면서, “금후에는 누구든지 문교부가 이미 결정한 대로” 따라야 하며 “국기 도안의 역학적 해설을 고집하거나 함부로 내세우지도 말아 달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현재 서점에서 볼 수 있는 태극기에 관한 많은 책들의 대부분도 현재의 태극기를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면서 나름대로 바로 그린 태극기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 이런 엄포로 태극기를 둘러싼 시비를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극기의 복잡한 내력을 고려하면 초등학교에서 태극기를 잘못 그렸다고 벌받는 학생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게 된다. 물론 태극기를 받아쓰기에서 태국기로 잘못 써서 벌받는 학생들에게까지 동정심을 표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말이다.

일제강점기, 나라도 빼앗기고, 말도 글도 빼앗기고, 사람들의 성과 이름마저 빼앗겨버린 빼앗긴 들에 태극기가 휘날릴 곳은 없었다. 대한독립의군부 등에서 태극기 게양운동을 벌였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일은 당시에는 사회주의자들도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점이다. 조선의용군의 경우 일부 젊은 층은 붉은 깃발을 내걸 것을 주장했지만, 당시 통일전선의 분위기와 태극기의 상징성을 고려하여,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권유로 태극기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시인의 말처럼 도둑처럼 해방이 왔다. 가장 재빨랐던 것은 일본 순사로 있던 조선인들이었다. 일장기의 원을 반을 먹으로 칠하고 귀퉁이에 4괘를 그려 순식간에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나왔으니, 그 재활용 정신(!) 하나만큼은 알아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태극기가 해방 이후 꼭 일장기 위에서 친일파들의 보신 수단으로 다시 태어난 것만은 아니었다. 앞치마에도 그리고, 이불 홑청 떼어내어 그리고, 처녀 때 장만한 옥양목 치마를 한번도 안 입고 고이 간직해두었다가 쫙 찢어 사발을 대고 태극을 그린 아주머니들도 많았다. 그렇게 그린 태극기에서 태극 모양이 좀 틀리고 4괘의 위치가 바뀐다고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 그런 분들이 딸 혼숫감에 그려주어 태극기가 다시 태어날 때가 태극기의 역사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해방이 되어 태극기에게 봄날이 왔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라는 반조각이 났지, 일장기가 나부끼던 자리는 성조기가 펄럭이지, 좌우대립은 극도로 격화되고, 게다가 일장기에 절하던 친일파들이 태극기를 높이 휘둘러대는 정신없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북에서 새로운 국기를 제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구한국의 군주정체에 맞던 국법이나 국기가 신조선의 인민정권에 맞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이북 공산주의자들은 일제강점기 태극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인정했으나, 해방된 지 2년 동안 이북에 “선진적이며 인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헌법”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새 국가에 조선시대의 법전인 이 필요 없는 것처럼 낡은 태극기도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새 국기, 이른바 인공기를 만들어 1948년 7월10일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 제2일 회의 중에 그 기를 내걸었다. 1948년 10월이 되자 남로당에서는 이른바 ‘인공기 게양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0월5일 새벽을 기해 전국적으로 태극기가 걸렸던 많은 자리에 인공기가 내걸렸다. 남로당원들은 일반 주택가보다 학교나 면사무소 같은 공공건물마다 인공기를 내걸었고, 서울에서는 심지어 독립문과 중앙청에까지 인공기가 내걸렸다.

‘국기 경례 거부’ 여호와의 증인들의 곤욕

한국전쟁 이후 독재정권들은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를 휘날리자는 ‘우리의 맹세’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자”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제정하고, 국기강하식 때면 전국에서 모두 행인들을 ‘동작 그만’의 상태로 만들었으며, 심지어는 극장에서도 애국가가 울릴 때면 관객들이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국민’의 애국심이 솟구치리라고 독재정권이 기대했을까? 독재자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어느 누가 바쁜 걸음을 재촉하다가 말고 길바닥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듣는 것을 좋아하며, 연인이나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러 간 극장에서 벌떡벌떡 일어나며 애국심을 되새기겠는가? 독재권력이 노린 것은 태극기와 애국가를 통해 사람들을 길들이려는 것이었다. 태극기와 애국가에 대한 경배를 통해 그 뒤에 숨은 독재자에게 조건반사적으로 복종하게끔 만드는 것, 그것이 국민의례가 넘쳐나던 시기에 독재자들이 노린 것이다. 이 시기에는 학원에서도 군사주의·국가주의가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종교적 신념에 따라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곤욕을 치르고, 줄줄이 퇴학당하기 시작했다. 사법부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를 ‘사교·이단 집단의 비애국적 행동’으로 몰아붙이면서 교내 질서가 지켜져야 한다고 못박았다. 이 같은 사법부의 판결은 헌법상의 권리인 종교의 자유를 고등학교 학칙이나 교내 질서보다 하위에 두는 행위였다.

독재자들이 태극기와 애국가를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많이 이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태극기나 애국가가 파시즘적 국가권력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민주세력에서도 큰일이 있으면 태극기를 들고 나오고, 비장한 마음으로 애국가를 부르곤 했다. 한 예로 1975년 8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의문의 죽임을 당한 장준하 선생의 장례식 때는 동지들이 임시정부에서 쓰던 오래된 태극기를 그의 관에 덮어 애국자의 마지막 길을 전송했다. 관동군 다카키 마사오에게 죽임을 당한 광복군 장준하는 그렇게 태극기를 덮고 이 땅을 떠났다.

1980년 광주에서 전두환 일당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분들을 급히 구해온 관에 모실 때 살아남은 시민들은 대형 태극기를 구해다가 한장 한장 덮어드렸는데, 어찌나 많은 분들이 죽었는지 광주시내에 태극기가 동이 났다고 한다. 태극기는 광주시민들이 그렇게 망월동에 묻힐 때 함께하기도 했지만, 광주의 학살자들이 민주정의당을 만들고, 대통령에 취임하는 놀음을 하는 현장에도 어김없이 나부꼈다. ‘황국신민서사’의 동생 격인 ‘국기에 대한 맹세’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학살자들이 휘두르던 태극기는 사라졌지만, 광주의 시민들과 함께 묻힌 태극기는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망월동 구묘역을 신묘역으로 이장할 때 20여장이나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열사들의 민주정신으로 불후(不朽)의 태극기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한국현대사에서 온갖 영욕을 함께한 태극기가 감정을 갖고 있다면 가장 민망했던 때는 80년대 학생들의 성조기 소각사건 때가 아니었을까? 광주 이후 반미의 무풍지대였던 한국은 갑자기 세계에서 반미운동이 가장 치열한 곳이 되었고, 학생들은 광주학살의 배후로 미국을 지목하고, 성조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부는 성조기를 불태운 학생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학생들이 태극기를 태운 것도 아니고, 또 정작 미국에서는 성조기를 불태우는 행위가 헌법상의 표현의 자유로 인정받는데 말이다.

통일조국까지 간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

1987년 6월항쟁 때도 학생들과 시민들이 태극기를 많이 들고 나왔지만, 태극기가 본격적으로 시위현장에서 쓰인 것은 1988년의 통일운동 때부터일 것이다. 젊은 학생들은 태극기로 온몸을 감싸고 눈물을 흘리며 결연히 통일의 의지를 불태웠다. 70년대나 80년대 초반의 학생시위 현장에서 종종 태극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태극기를 독재정권이 학생운동을 빨갱이로 모는 것에 맞서 빨갱이 공세를 막아주는 호신부처럼 들고 나온 것이었다면, 80년대 후반의 태극기는 의미가 달랐다. 1986년 이후 학생운동에서 민족해방 사상이 널리 퍼지고, 재일동포 지도자인 배동호 선생의 이 널리 읽히면서 ‘애국’이란 독재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민중들이 되찾아야 할 소중한 덕목으로 부활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 내 조국의 아들로 태어난’ 젊은이들이 가야 할 길을 노래한 이란 노래가 애창되었다. 물론 학생운동 일각에서는 이런 태도를 민족주의적 편향이고, 민족주의는 파시즘이나 독재권력과 쉽게 결합한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90년대 이후 한동안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다가 요즈음 태극기는 다시 때아닌 전성시대를 맞았다. 그리고 빼앗겼던 붉은색은 다시 살아났다. 이북의 노동당 행사에서도, 빨갱이들의 본고장인 소련의 붉은 광장에서도 수십수백만명이 길거리를 가득 메운 이런 붉은 물결은 있어본 적이 없었다. 30대 후반 이상이면 반공 포스터에나 그렸을 붉은악마는 이제 온 국민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동계올림픽 때 김동성 선수가 태극기를 내팽개쳤다면서 비난하던 가 네티즌들한테 혼이 날 때부터 조금 감지되기는 했지만, 이미 젊은이들은 태극기에 대해 군사독재정권이 강요하던 엄숙주의·경건주의를 벗어던졌다. 과연 온 나라를 붉게 물들인 붉은악마 현상이 레드콤플렉스의 진정한 극복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동원이 아닌 자발적인 참여, 그리고 이 집단적 열광 속에서도 분명히 발견되는 개인주의는 과연 민족주의가 나치즘이나 일본의 군국주의 같은 광기로 가는 데 충분한 안전판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일본인들이 히노마루를 흔들며 닛폰을 외치는 것은 섬뜩한 일일까? 이 모든 열풍은 그저 축구경기를 둘러 싼 90분 내셔널리즘으로 국한될 것인가? 한국 현대사의 맥락에서 보면 민족주의의 빅뱅과 레드콤플렉스의 약화 조짐이라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일이 동시에 벌어지는 현상은 축구 4강의 신화만큼이나 신기한 일이다.

국가라는 조직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국기는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절대로 스포츠 내셔널리즘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도 국가대항전이 열릴 때면 국기는 지금보다 더 힘차게 나부낄 것이다. 그러나 이 바라는 것처럼 주석궁을 국군 탱크가 점령하지 않는 한, 태극기나 애국가가 통일조국에서 계속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때는 몇 차례 실험을 해본 단일기처럼 남과 북 모두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남과 북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상징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홍구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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