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소묘, 자꾸 이런 거 가져올 거야?”
2022년 4월 출간한 <사랑의 모양> 인쇄감리(디자인한 의도대로 인쇄가 잘 나오는지 관리·감독하는 것) 때 인쇄소 기장님이 던진 말. 색이 은은할수록 인쇄는 까다롭다. 기장님은 이어서 외쳤다. 세피아(흑갈색)톤이 젤 힘 들어!
그림책을 펴내면서 가장 빈번히 대면하는 사람은 인쇄소 기장님이다. 책은 사람이 만든다. 이 명제의 의미를 다시 새겨야 했다. 책을 만든다고 할 때 보통은 저자나 편집자를 떠올릴 텐데, 물리적 관점에서 책은 기계가 만들고 기계는 사람이 돌린다.(아트북이나 일부 독립출판물은 기계를 쓰지 않기도 하지만.) 같은 데이터라도 기계에 따라, 기계를 돌리는 기장님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
그림책은 복제품이면서 동시에 예술작품인 독특한 사물이다. 그림책을 만드는 이들은 모든 공정에 깊게 관여한다. 그림이 중심이고 원화라는 기준점이 있으며 작가가 사용한 재료, 표현한 선과 색감, 분위기, 주제의식에 부합하도록 종이 선택부터 인쇄, 제본, 후가공까지 책의 꼴을 섬세히 구상한다.
그런데 막상 제작에 들어가면 하나부터 열까지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그럼에도 슬픈 현실 속에서 대안을 찾아가는 기쁨 또한 있다. 지난겨울에 펴낸 <두 여자>는 그림작가인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가 제본실의 색과 위치를 고려해 작업한 작품이다. 하지만 국내 제본 방식과는 맞지 않아 제작처에서 묘안을 내줬다. 그림에서 붉은 실이 드러나야 하는 부분이 세 곳이어서 본문을 16·12·16쪽 세 묶음으로 나눠 중철(中綴·실 등으로 중심을 엮음)을 하고 각 묶음을 다시 사철(絲綴·실 등으로 묶음의 접힌 부분을 다시 엮음)을 하는 것으로. 이 방법은 실이 듬성듬성 보이는 원서와 달리 촘촘하게 박힌다. 작가에게 샘플을 보였고, 이대로 좋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기껏 붉은 실로 제작해놓고 보이지 않으면 무용하므로 180도 펼쳐지는 광개제본을 해야 하는데 그림책처럼 본문의 두께가 얇은 책은 공정이 복잡해 제본소에서 꺼린다. 단가가 높고 내구성은 약해 어린이책이 대부분인 그림책 시장에서 출판사들마저 선호하지 않으니 사장되다시피 했다. <두 여자>는 긴 협의 끝에 초판 부수를 늘려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림책의 위상은 올라가는데 제작은 갈수록 어렵다. 제작 현장 전문가의 연령은 높아만 가고 신규 인력은 들어오지 않은 지 오래다. 이주노동자가 제작 현장 자리를 채운 상황에서 팬데믹은 치명타였다. 늘 박한 제작 단가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결국 관련 제작처는 하나둘 문을 닫았다. 실정은 이렇지만 제작과 관련한 지원이나 관심은 전무해 보인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발표한 2022년 주요 사업 소개 자료는 총 74쪽인데, 단 한 쪽에 ‘인쇄, 인쇄인’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인쇄소 기장님이 시쇄지(시험인쇄한 결과물)에 루페(인쇄물에 눈을 대고 확인하는 확대경)를 놓고 눈을 댄다. 망점을 살피고 색들의 분포를 본다. “소묘 ‘또 이런 거’ 가져왔느냐”고 타박하면서도 미세한 조정을 해나간다. 인쇄기가 돌아간다. 허리께만큼 쌓인 본문 종이는 재단돼 실로 묶인다. 이어서 제본과 후가공까지, 그 전 과정에 여러 손이 함께한다. 이들을 믿고 그림책 작가는 다채로운 실험을 펼칠 수 있다.
이쯤에서 19세기 영국의 예술가이자 사상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현대의 생활예술’이라는 강연에서 한 질문을 던질밖에.
“이 모든 훌륭한 것들을, 여러분은 갖겠습니까, 아니면 내던지겠습니까?”(<아름다움을 만드는 일>, 정소영 옮김, 온다프레스 펴냄) 내던지지 않으려면 부디, 우리는 책 만드는 손들을 지금보다 훨씬 더 추앙해야 해요.
글·사진 지우 오후의소묘 편집자
*책의 일: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소개합니다. 직업군별로 4회분 원고를 보냅니다. 3주 간격 연재. 그림책, 그것도 어른을 위한 그림책을 전문으로 내는 1인 출판사 ‘오후의소묘’ 지우 편집자가 바통을 이어받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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