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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우리와 다른 그들

사료에 뿌리내린 상상력 보여주는 곽재식의 역사소설 <역적전>
등록 2021-10-07 15:10 수정 2021-10-08 02:07
곽재식 지음, 알에이치코리아 펴냄

곽재식 지음, 알에이치코리아 펴냄

역사란 곧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민족이나 국가의 기원과 내력을 밝히고 그것이 어떻게 이어져왔는가를 탐구하는 일이야말로 역사의 제1 목표라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눈길이 가는 건 과거와 현재의 ‘같음’보다는 ‘다름’ 쪽이다. 과거라는 ‘낯선 나라’를 탐험하며 지금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즐거움, 그리고 현재를 절대화하지 않는 겸손함이야말로 역사가 주는 선물이 아닐까?

곽재식의 역사소설 〈역적전〉은 이러한 ‘다름으로서의 역사’를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광개토왕이 무위를 떨치던 시절 가야의 다라국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그간 한국 역사물의 ‘흥행 공식’을 정면으로 들이받는다. 우선 소설에는 ‘남성 영웅’이 없다. 광개토왕의 정복전쟁은 사건 전개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만, 그는 등장인물이라기보다 태풍 같은 일종의 자연재해로 묘사된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의 시시가미 같은 존재인 셈이다.

자연재해의 위치로 물러난 남성 영웅의 빈자리를 메꾸는 건 평범한 사람들이다. 백제 남자 사가노와 가락국 여자 출랑랑, 역적죄로 붙잡혀온 이들을 심문하는 다라국 판관 하한기를 비롯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각각은 역사에 개미 눈곱만큼의 족적도 남기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며 사건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누군가의 사소한 행동이 다른 누군가의 희비를 가른다. 광개토왕 같은 자연재해급 인물이 역사의 큰 방향을 결정한들, 그 디테일을 만들어가는 건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란 이야기다.

게다가 이들 ‘고대인’은 우리 ‘현대인’의 상상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역적전〉의 사람들은 강과 바다를 마치 고속도로처럼 자유롭게 이용한다. 백제 도성에 살던 사가노는 주인인 협지와 함께 배를 타고 왜국으로 가려다 신라 군함을 만나 가락국에 정착한다. 출랑랑 역시 집안이 몰락한 뒤 해적질하며 살아간다. 바다를 오가는 대규모 상단을 이끄는 선주인 용녀는 육상권력에 예속되기는커녕 이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하기까지 한다. 근대 이전까지 장거리 이동, 그것도 바다를 통한 이동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리라는 통념은 이렇게 무너진다.

단순히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차라리 사납고 강인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여성 등장인물들 역시 이 책의 매력이다. 최고의 칼잡이이자 무자비한 ‘성격파탄자’인 출랑랑과 그의 라이벌인 여당아, 가야를 좌지우지하는 거물인 용녀까지, 힘 좀 쓰는 사람은 모두 여성이다. 오히려 사가노나 하한기처럼 남성 쪽이 훨씬 조신하다. 물론 지은이가 친절하게 주석을 달았듯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잘못된 건 오히려 남존여비가 아주 옛날부터 계속돼왔다는 오늘날의 편견일지도 모른다.

소설로서의 재미는 물론 역사적 탄탄함까지 갖춘 이 책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고대사 인식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역사적 상상력’을 내세우며 현재의 욕망을 은밀하게 과거에 투사하는 소위 ‘유사역사학’ 추종자들에게, 〈역적전〉은 상상력이란 결국 사료에 탄탄히 뿌리를 내릴 때만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우아하고 발랄하게 보여준다. 낙랑군을 어떻게든 한반도 밖으로 몰아내려고 무리수를 두고, 호남 일대의 일본식 전방후원분을 애써 무시하는 사람들의 책장에 한 권씩 놓아주고 싶은 책이다.

유찬근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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