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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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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아버지가 남긴 사진 4장

경북 의성 출신 자생적 사회주의 운동가 박종근, 한국전쟁에서 전사하다
등록 2021-01-12 11:17 수정 2021-01-13 05:55
아내 이숙의가 평생 품에 간직한 빛바랜 사진, 박종근의 20대 초반 시절. <이 여자, 이숙의> (삼인, 2007)

아내 이숙의가 평생 품에 간직한 빛바랜 사진, 박종근의 20대 초반 시절. <이 여자, 이숙의> (삼인, 2007)

빨치산의 딸 ‘박소은’은 평생 아버지 품에 안긴 적이 없었다. 세상에 태어난 1948년 4월21일, 아버지는 집에 있지 않았다. 집은커녕 38도선 이남에도 없었다. 엄마 뱃속에 회임 중일 때, 그러니까 미처 태어나기도 전인 1947년 12월에 아버지는 38도선 이북으로 올라갔다. 결혼한 지 6개월 만이었다. 야속하게도 왜 그때 가족을 버리고 떠났을까? 탄압을 피하려고 그랬겠거니 짐작하지만, 그 이유를 몰랐고 그 이후로도 똑바로 알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 박종근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월남했으나, 집에는 들르지도 않은 채 산으로 올라갔다. 경북도당 위원장이자 제3유격지대 사령관으로서 산악지대의 빨치산 활동을 이끌기 위해서였다. 결국 그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1952년 3월엔가 ‘태백산 총사령관 박종근 사살’이라는 대서특필된 신문 기사를 통해 아버지의 최후를 알았다. 딸의 나이 네 살 때였다. 요컨대 소은이는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아빠의 체취를 느끼지 못했고, 전적으로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만 자라야 했다.

1941년 3월14일, 20살 때 ‘독립청년회’ 사건으로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 중 촬영한 ‘범죄자’ 식별용 사진. <빨치산자료집 1>(한림대, 1996)

1941년 3월14일, 20살 때 ‘독립청년회’ 사건으로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 중 촬영한 ‘범죄자’ 식별용 사진. <빨치산자료집 1>(한림대, 1996)

증명사진으로 처음 만난 20대 때 아버지

어머니는 76살 평생 빛바랜 증명사진 한 장을 소중히 간직했다. 딸이 아버지 존재를 어렴풋하나마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었다. 거기에는 한 청년이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고 있다. 머리를 짧게 깎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다. 하지만 혈육이라는 실감이 들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딸 소은이 미처 본 적이 없는, 좀더 젊었을 적의 아버지 사진이 있다. 소화16년(1941년) 3월14일,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찍은 것이다. 형무소에 수감된 범죄자를 식별하기 위해 강제로 찍은 것이었다.1 소년형무소는 만 18살 미만 범죄자를 수용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사진 속 인물은 검정 학생복을 입고 있다. 소년형무소 수감자들의 평상시 복장이었을 것이다. 가슴에는 식별용 이름표가 붙어 있다. 한자로 ‘신정종근(新井宗根)’이라고 쓰여 있다. ‘아라이 소네’라고 읽는다. 일본식 창씨명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모든 이가 강제로 일본식 씨명으로 바꿔 불리던 때였다.

도대체 왜 소년형무소에 갇혔을까? 일본 형무소 당국은 모든 수감자의 개인별 카드를 작성했는데, 거기에 그의 죄명이 적혀 있다. ‘치안유지법과 육군형법 위반’이었다. 치안유지법이란 천황제 국가체제의 변혁과 사유재산제도 반대를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하거나 그에 가입한 자를 처벌하는 악법이었다. 반체제 비밀결사를 탄압하기 위한 법이었다. 주로 사회주의운동과 독립운동 참가자를 체포·투옥하는 데 쓰였다. 육군형법은 1941년쯤 민간인에게도 곧잘 적용됐는데, 이른바 군사 스파이 혐의자를 처벌하는 용도였다. 산업시설과 공장 등을 염탐해, 가상 적국인 소련에 넘길 우려가 있다는 명목을 씌우곤 했다. 요컨대 수감자인 소년 박종근은 사상범이었던 것이다.

뒷날 박종근이 작성한 <이력서>와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고향인 경북 의성군 안계면의 보통학교를 6년간 마친 뒤, 부산과 황해도 신천 등지를 전전하며 상점 점원과 정미소 급사 등으로 일했다. 그때 일터에서 만난 몇몇 종업원에게서 사상적 감화를 받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피억압 민족의 일원이라는 정치적 각성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 시절의 박종근. 1948년 27살 때 찍은 사진이다. 독립기념관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 시절의 박종근. 1948년 27살 때 찍은 사진이다. 독립기념관

소년 사상범 박종근의 비밀결사 활동

행동에 처음 나선 것은 열일곱 살 되던 1938년이었다. 그해 3월 고향으로 되돌아온 그는 ‘독립청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공개단체인 야학과 농촌진흥조합 등을 무대로 삼아 활동한 결과 약 40명의 회원을 모았다고 한다. 회원은 주로 향리에서 고락을 나누며 성장한 친구들과 그의 모교인 안계보통학교 동창생들이었다. 이 단체의 비밀운동은 미성숙했다.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그 어느 지도자도 없었으며, 어떠한 조직적 계열 또는 연락도 없는 순전히 내 독자적인 아주 의식성이 어린 운동이었다”고 한다.2

그래서일까, 결성 1년 남짓 만에 비밀이 노출되고 말았다. 1939년 4월 이 결사의 구성원들은 일망타진됐다. 박종근이 체포된 곳은 해외였다. 만주국 수도 신경(오늘날 창춘)에 가서 해방운동과 삶의 새 진로를 모색하려던 참이었다. 신경에서 붙잡힌 그는 조선으로 압송됐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1년 가까이 경찰서에서 취조받았고, 대구지방재판소 안동지청에서 1940년 10월31일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인천소년형무소에서 복역 뒤 만기로 석방됐다고 한다. 입소 연월일은 소화 15년(1940년) 11월8일이고, 출소 연월일은 소화 17년(1942년) 11월7일이었다.

출옥한 뒤에도 박종근은 ‘반성’하지 않았다. 출옥 뒤 해방에 이르기까지 그는 고향에서 농사짓는 한편, 정미소와 미곡창고 사무원으로 일했다. 이 기간에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했다고 뒷날 술회했다. 현실 생활과 비밀결사 운동 경험에 더해 몰래 읽은 사회주의 서적의 영향력이 그렇게 이끌었다고 한다. 급기야 해방 전야인 1944년 12월 사회주의 비밀서클을 조직했다. 4명으로 이뤄진 소규모였다. 박종근은 나중에 스스로 평하기를, “의식성과 이론의 부족에다가 아무런 지도자도 없고 다른 조직과 연결 없는 고립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경험이 해방 뒤 그를 투철한 사회주의자로 나아가게 하는 전환점이 됐다.

딸 소은이 미처 보지 못한, 또 하나의 아버지 사진이 있다. 짙은 색 양복에 화려한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다. 와이셔츠가 눈부시게 희다.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의 연령층에 속한 건강한 남성상이다. 엷은 미소를 띠고서 앞을 바라보고 있다. 이마에 두 줄 주름살이 있고 광대뼈가 약간 솟은 터라 질박하면서도 신뢰감을 준다. 높지 않은 콧대에 두꺼운 입술이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러시아 모스크바 당학교에서 작성한 개인 파일에 보관된 사진이다. 러시아로 출국하기 전 평양에서 찍었거나, 아니면 모스크바에서 증명용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1948년 8월께 박종근 모습이었다.

박종근이 젊은 아내와 유복자를 남겨두고, 38도선 이북으로 올라간 이유는 ‘당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조선 노동당 중앙부는 그를 모스크바에 유학시키기로 결정했다. 해방 뒤 박종근은 민중운동의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박종근은 1945년 8월부터 두 달 동안 의성군 안계면의 면인민위원회 결성에 참가해 부위원장에 선임됐다. 그해 10월부터는 의성 읍내로 진출해 조선공산당 의성군당 선전부장으로서 일했다. 의성군 내에서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1946년 10월 민중항쟁 때는 의성군당 조직부장으로서 의성군 투쟁의 총책임자 역할을 했다. 11월에는 그에 대한 책임으로 경찰 수배를 받았다. 탄압을 피해 서울로 올라온 박종근은 1946년 11월부터 월북하던 이듬해 12월까지 당 중앙위원회 선전부의 선전선동과장으로 일했다.

제3유격지대 사령관 박종근의 최후. <빨치산자료집 1>(한림대, 1996) 국사편찬위원회

제3유격지대 사령관 박종근의 최후. <빨치산자료집 1>(한림대, 1996) 국사편찬위원회

박헌영 “열성적 투쟁” 높은 평가

박종근의 헌신성과 업무능력의 탁월함은 당 지도부의 눈에 띄었다. 당시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재임 중이던 박헌영은 그를 가리켜, “박종근 동무는 당 사업에 정력적으로 참여했고 당 업무와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 열성적으로 투쟁하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3

박종근의 러시아 유학 기간은 2년간이었다. 모스크바의 당학교 내부 기록에는 그가 “1948년 9월15일부터 1950년 7월1일까지 조선당학교에서 수학”했다고 적혀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모스크바에 체류 중이었음이 눈에 띈다. 아마 최초 계획으로는 4년 이상 유학이 예정됐겠지만 전쟁 발발로 단축됐던 것 같다. 서둘러 유학을 종료하고 풍전등화에 놓인 조선 혁명을 구하기 위해 하루속히 귀국해야만 했다.

성적표가 남아 있다. 그에 따르면 2년간 모두 14개 과목을 수강했다. 그중에는 자본주의 정치경제학, 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 소련공산당사, 소련 국제관계와 대외정책의 역사, 법과 소비에트 건설, 세계의 정치·경제 지리, 당건설론, 러시아문학, 러시아어 등이 포함됐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사회주의 건설의 정책 문제를 중시했음을 엿볼 수 있다. 시험 점수가 명시된 과목은 12개였는데, 모두 5점 만점에 5점을 받았다. 오늘날 한국 대학 제도에 비하면 ‘올 A+’를 받은 셈이다.

2000년 9월 초, 6·15 공동선언 이행 사업의 하나로 ‘비전향 장기수 송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며칠 뒤였다. 벌써 53살 중년 부인이 된 딸 소은은 장기수 선생들이 함께 모이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통일광장’이란 곳을 찾았다. 그곳에 가면 장기수들이 구해놓은 자료 속에 아버지에 관한 기록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딸 소은은 그 자리에서 또 하나의 아버지 사진을 대면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아버지의 최후 사진을 맞닥뜨린 것이다. 거기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주검이었다. 몇 번의 복사를 거쳤는지 윤곽선이 흐려진 흑백사진이었다. 허리와 허벅지 두 군데에 밧줄이 꽁꽁 묶여 있었고, 잘린 머리가 목 위에 부자연스레 얹힌 상태였다. 영문 설명이 쓰여 있었다. 게릴라 지도자 박종근, 제3유격지대 사령관. 1952년 2월17일 한국 쪽 군경 합동작전 때 203410 지점 근처에서 사살됐다고 적혀 있었다.4

흑백사진 속 숨진 아버지 모습에 전율

딸 소은은 아버지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에 직접 총알이 박히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등을 타고 흐르는 피가 굳어서 조여들듯이 온몸이 경직되어”왔으며, 책상을 꽉 붙잡아야만 했다.5 소은은 생애 처음으로 아버지 존재를 뚜렷이 실감했던 것 같다.

아! 그랬구나. 자신의 삶에서 아버지가 왜 부재했는지, 그 부재의 의미가 우리 역사와 관련됐음을 똑똑히 보았다. 이제야 아버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 없이 자랐던 어린 시절, 6개월의 짧은 신혼 생활 뒤 50여 년의 긴 세월을 홀로 견뎌야 했던 어머니의 인생이 한꺼번에 뇌리에 떠올랐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新井宗根(朴宗根)>, 1941년 3월14일 촬영,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2. 박문우(박종근), <자서전>, 2쪽, 1948년 8월10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9 л.14-16.
3. Зам.Председатель ЦК Трудовой партии Южной Корея Пак Хенен(남로당 부위원장 박헌영),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на заместителя заведующего отделом пропаганды ЦК Трудовой Паприи Южной Кореи, Пак Чен-гын (남조선노동당 중앙위 선전차장 박종근에 대한 평정서), 1948년 7월31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9 л.9.
4. ‘사진: Guerrilla leader Pak Chong Kun’, <빨치산자료집 1>(문건편 1),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486쪽, 1996년.
5. 박소은, ‘느닷없는 사모곡: 남북 해외로 조각난 나의 가족사’, <이 여자, 이숙의>, 삼인, 423쪽,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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