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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공간] 설추위 겪어봐야 사람의 진면목을 안다

김정희 고난 상징하는 국보 <세한도> 국가 품으로
등록 2021-01-01 07:42 수정 2021-01-10 01:42
<세한도>는 김정희가 어려웠던 제주 유배 시절 변함없이 그를 도운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로 그려준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는 김정희가 어려웠던 제주 유배 시절 변함없이 그를 도운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로 그려준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공자는 설추위 이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네 계절을 지나도 시들지 않는다. 설추위 이전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이고 설추위 이후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이다.
공자는 설추위 이후를 특별히 칭찬했다. 지금 그대(제자 이상적)가 나에게 이전이라고 더한 것도 없고, 이후라고 덜한 것도 없다. 그래서 이전의 그대를 칭찬할 것이 없지만, 또한 이후의 그대는 공자의 칭찬을 받을 만하다.” (1844년 김정희가 쓴 <세한도> 후기)
유배 시절 제자 이상적 위해 그린 그림

2020년 12월9일 문재인 대통령은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손창근 선생을 청와대로 초청해 감사 인사를 했다. 손 선생은 아버지 손세기 선생 때부터 소장해온 <세한도>(歲寒圖·국보 180호) 등 300여 점의 문화재를 2018년부터 2020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날 문 대통령은 청와대 본관 입구까지 나와 손창근 선생을 마중했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문 대통령은 손 선생에게 “신문에서 <세한도>를 두고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라고 표현했다. 제 안목으로도 <세한도>는 우리나라 국보 서화류 가운데 최고”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 “‘세한’이라는 말이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 국민의 상황을 그대로 표현한다. 국민께 큰 힘과 희망,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한도>는 1844년 제주 대정현에서 4년째 유배돼 있던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이다. 당파 싸움에 휘말려 제주에 유배된 자신을 변함없이 대하는 제자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발문(후기)을 썼다. 통역관인 이상적은 중국 연경(베이징)에까지 가서 귀한 책들을 구해다 머나먼 제주의 김정희에게 보내주곤 했다.

김정희는 변치 않는 이상적의 우정을 ‘세한’이란 두 글자로 표현했다. 세한은 ‘설추위’인데, 설 전후 날씨가 가장 춥다고 해서 ‘한겨울, 맹추위’라는 뜻으로 쓰인다. 추사의 발문 가운데 “설추위 이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는 문장은 <논어> 자한편 27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어려운 시절이 되면 사람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세한도>는 조선의 문인화 가운데 최고로 평가받는다. 소박하지만 깊은 그림과 조선 최고의 글씨가 어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집과 나무는 은유적이다. 네 그루의 나무 가운데 오른쪽 늙고 앙상한 소나무는 김정희, 그 옆의 전나무는 이상적, 왼쪽 전나무 두 그루는 초의선사와 제자 허련을 상징한다고 알려졌다. 가운데 청나라풍 집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연행(베이징 방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김정희는 조선 왕가 사위 집안의 종손으로 유복하게 자랐다. 고조부 김흥경은 영의정,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이금)의 사위, 친아버지 김노경은 판서였다. 김정희 본인도 성균관 대사성과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김정희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으나, 7살 때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가 돼 서울 월성위궁으로 왔다. 월성위궁은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하면서 영조로부터 받은 집이다. 바로 북쪽으로 영조의 사저였던 창의궁이 있었다.

김정희가 삶의 대부분을 보낸 월성위궁은 서울 종로구 적선동 일대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차도로 바뀌고 새 건물이 들어서 현재는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박승화 기자

김정희가 삶의 대부분을 보낸 월성위궁은 서울 종로구 적선동 일대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차도로 바뀌고 새 건물이 들어서 현재는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박승화 기자

당파싸움 휘말린 추사, 말년 9년간 유배

김정희 집안과 조선 왕가의 관계는 실록에 잘 나온다. 1774년 영조는 과거 합격자들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김정희의 양아버지인 김노영에게 “네가 사는 동네가 바로 나의 옛집과 같은 동네다. 내 경호부대(용호영)의 현악단(삼현)을 특별히 내려줄 테니 오늘 합격인사(유가)를 하라”고 말했다. 김노영은 영조의 사위 김한신의 손자였다.

이런 특별 대우는 순조(이공) 때까지 이어졌다. 1819년 과거의 논술(제술) 부문에서 김정희가 수석으로 합격하자, 순조도 김정희에게 음악을 내려주라고 지시했다. 순조는 “김한신의 제사를 모시는 자손이 합격했으니 기쁘고 다행스럽다. 김한신의 부부묘에 비서(승지)를 보낼 테니 제사를 지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조선 왕가와의 특별한 관계도 김정희를 구원하지 못했다. 영·정조 시기를 거치면서 당파싸움은 서인 중 노론 일당의 승리로 끝났고, 다시 일가 독재로 바뀌고 있었다. 불행히도 김정희 집안은 최대 권력 가문인 장동(신안동) 김씨와 불화했다.

한 이유는 1826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김정희가 비인 현감 김우명의 부정부패를 고발해 파직시킨 일이다. 이 일로 김우명이 김정희에게 원한을 품었는데, 그가 신안동 김씨였다. 다른 이유는 김정희가 장동 김씨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풍양 조씨 조인영, 안동 권씨 권돈인 등과 가까운 친구였다는 점이다.

집안을 보호해주던 순조가 1834년 세상을 떠나자 장동 김씨의 눈 밖에 난 김정희는 유배됐다. 1840~1848년 제주 대정, 1851~1852년 함경도 북청 등 두 차례 9년 동안이었다. <세한도>도 이때 그렸다. 1844년 <세한도>를 선물받은 이상적은 그해 겨울 사신으로 중국에 가서 이 그림을 선보였고, 무려 16명의 중국 지식인이 이 그림에 시를 붙였다. 뒤에 오세창 등 3명이 글을 더해 원래 69.2㎝였던 이 그림의 가로 길이는 10m에 이르게 됐다.

<세한도>는 이상적의 손을 떠나 1930년대 경성제국대학 교수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후지쓰카 지카시의 소유가 됐다. 그러나 서예가 손재형이 일본에까지 찾아가 몇 달 동안 팔 것을 간청했다. 그 정성에 감동한 후지쓰카는 돈을 받지 않고 조선에 돌려줬다. 손재형은 나중에 문화재 수집가인 손세기에게 <세한도>를 팔았고, 그의 아들 손창근 선생이 2020년 2월 정부에 기증했다.

일본인 소유 거쳐 2020년 2월 국가로

김정희가 살던 집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먼저 그가 태어나 자란 집(1786~1793)이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잘 보존돼 있다. 그가 유배 생활을 한 집(1840~1848)은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복원돼 있다. 그가 두 번째 유배 뒤 자리잡은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과지초당(1852~1856)도 복원돼 있다. 다만 삶의 대부분을 보낸 서울 종로구 적선동 월성위궁(1793~1840)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월성위궁 터는 현재 경복궁 서십자각 터 네거리 부근으로 추정된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홍순대 지음, <그림 속에 숨겨진 조선 역사>, 인문서원, 2020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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