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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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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문학상 대상 수상작] 한 사람이다

제12회 손바닥문학상 ‘차별’ 주제 공모 대상 수상작
등록 2020-12-19 02:04 수정 2020-12-20 09:12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주민이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을 때, 주현과 유선은 거실 소파에 앉아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의 얘기는 주민이 거실에 들어서자 끊어졌다. 주민이 집에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둘이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 뒤늦게 주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왔어?” 유선이 놀랐는지 허둥대며 말했다. “왔으면 왔다고 기척이라도 내고 들어오지.”

“둘이서 무슨 얘기 해?”

주민이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바깥 공기가 찬지 마스크 안쪽으로 습기가 가득 찼다.

“응, 아냐.” 유선은 뭐가 아니라는지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걸어갔다. “배고프지? 우유 줄까?”

“안 마셔.”

주민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유선은 냉장고를 열고 우유를 꺼냈다. 그사이 주현은 소파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가면서 주민의 오금을 자기 무릎으로 한 번 툭 쳤다. 그 바람에 다리가 휘청한 주민이 주현을 돌아보는 사이 주현이 말했다.

「일찍 좀 다녀.」

그러고는 재빨리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주민이 벙찐 얼굴로 주현의 뒷모습과 뒤이어 닫힌 문을 멍하니 보는 사이 유선이 식탁에 우유를 따른 머그잔을 올려놓았다. 그 우유잔을 보며 주민이 말했다.

“안 마신다니까.”

“마셔. 마셔야 키 크지.”

투정을 부리는 주민에게 짐짓 엄하게 말하며 유선은 식빵 세 조각을 꺼내 프라이팬에 굽기 시작했다. 주민은 키가 이 정도면 됐지 더 클 필요 있냐고 구시렁대며 패딩 점퍼를 벗어 자기 방 의자 위로 던져두고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았다. 그러는 사이 유선은 다 구운 식빵에 잼을 발라 반으로 접고는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주민의 맞은편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주민이 잼을 바른 빵을 하나 집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유선은 주민의 앞에 앉아 주민이 먹는 모습을 한동안 가만히 보았다.

“맛있어?”

“응.”

유선이 묻는 말에 주민은 빵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우유의 비릿한 향도 빵과 같이 먹으니 괜찮았다. 그런 주민을 유선은 턱을 괴고 앉아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그 눈길을 모르는 척 주민은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유선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다 먹고, 너무 늦지 않게 자라.”

그러고는 거실의 불을 끄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주민은 홀로 식탁 조명 아래 앉아 남은 빵을 먹었다.

빵을 다 먹은 주민은 남은 그릇을 개수대에 담가놓았다. 우유가 조금 남아 모른 척 버려버릴까 생각했지만 우유를 마셔야 키가 큰다는 유선의 말이 떠올라 다 마셔버렸다. 키가 조금이라도 더 크면 좋은 점이 분명 있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대규모로 착취당하는 젖소들을 생각하면 남은 우유를 버리는 일은 못할 짓이었다.

주민은 자기 방에 들어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옷에 먼지가 묻었을 테지만 그런 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피곤했다. 오늘 하루도 길었다. 갑자기 눈까지 오는 바람에 더 고됐다. 이런 하루도 오늘로 끝이었다. 집에 늦게 들어오는 일도 더는 없을 터였다. 내일부터는 얼마 남지 않은 방학을 즐기면 그만이었다. 이번 방학이 끝나면 2학년이 되고, 그 이듬해엔 수능을 봐야 했다. 그러니 이번 방학이 끝나면 공부에만 집중하자고, 그때까지 얼마 되지 않는 동안이라도 제대로 놀아두자고 주민은 다짐했다.

주민은 침대에 누운 채로 손을 뻗어 의자에 던져둔 점퍼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냈다. 잠금 화면을 풀고 날짜 앱을 켠 주민은 손가락 끝으로 화면을 짚어가며 날짜를 셌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이제 일도 끝났고 월급도 곧 들어온다. 벌써 해방감이 느껴졌다. 주민은 들뜬 마음으로 일어나 앉아 가방을 정리하려다 그제야 편의점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챙겨온 사실을 떠올렸다. 그 샌드위치를 가방에서 꺼내 껍질을 깠다. 막 한입 베어 먹으려는데 문득 자신이 오늘 저녁은 먹었는지 유선이 묻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빵을 구워주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간식이었다. 밤늦게 집에 들어온 지가 벌써 한 달째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그렇지. 주민은 유선이 요즘처럼 자신을 신경 쓰지 않은 적도 없었던 듯 여겨졌다.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한번 든 서운한 마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아까 집에 들어올 때 유선이 주현과 둘이서만 하던 얘기는 뭐였을까. 역시 나보다 주현이를 더 좋아한다니까. 주민은 대수롭지 않은 척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손에 든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 통장 계좌의 입출금 현황에서 친구에게 전에 빌린 돈의 액수가 눈에 들어왔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 액수를 보자니 목이 좀 멨지만 우유를 더 마시진 않았다.

유선의 아침은 아이들 식사와 출근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학기 중에는 점심이 급식으로 나오니 아침 정도는 간단히 먹여도 괜찮을 텐데 유선은 꼭 밥과 찌개를 챙겨 먹이려 애썼다. 아이들이 방학해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알아서 자기 밥 정도는 챙겨 먹을 나이가 되었는데도 유선은 손수 밥상을 차리려 했다.

유선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주민이 중학교 2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아침으로 과일이나 시리얼, 토스트 정도를 먹였다. 유선 자신의 출근 준비로 바쁘기도 했고, 학교에서 알아서 간식을 챙겨 먹으리란 생각에서였다. 점심은 급식을 먹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저녁 정도만 직접 밥을 해서 먹이면 됐다. 그마저도 퇴근길에 사온 포장음식으로 챙겨줄 때가 많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랬던 유선의 식사 준비가 달라진 건 주민이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 학교 체육대회에서 반 대표로 농구경기에 나갔던 주민이 그해에 처음으로 농구경기에 나가지 못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 키 때문이었다. 중학생이 되어 키가 급속도로 자란 다른 아이들과 달리 주민의 키는 앞선 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민이 아무리 그전까지 농구를 잘했다 하더라도 키에서 오는 기량 차이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그해 처음으로 주민은 후보 선수로서 벤치에 앉아 다른 아이들이 경기를 뛰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유선은 그 이야기를 주민과 같은 반 친구의 엄마에게 들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주민을 따라 같이 농구를 하던 남자아이의 엄마였다. 그전까지는 체육대회에서 후보로만 뛰던 자기 아이가 이번에 처음 선발대표로 경기에 나선 일이 퍽 자랑스러웠던지 그 엄마는 신이 나서 유선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은 유선은 주민이 매년 나가던 농구대회에 나가지 못하게 된 일이 그동안 자신이 먹여온 부실한 아침식사 때문인 것만 같았다. 유선은 그날 이후 아이들 아침으로 밥과 찌개를 챙겨주려 애썼다. 너무 바빠 어쩔 수 없이 예전처럼 간단히 먹일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오늘 아침도 유선은 아침식사를 위해 전날 미리 준비해둔 재료로 찌개 끓일 준비를 했다. 방학인데도 부지런히 일어난 주현이 자기 방에서 나와 욕실로 들어갔다. 주현이 욕실에서 세수하고 입을 헹구는 사이, 유선은 찌갯거리에 적당히 물을 부은 냄비를 불 위에 올려두고 안방에 들어가 출근 준비를 했다. 주현이 다 씻고 귀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는 듯 귀를 만지며 욕실을 나서는데 무언가 끓는 소리가 났다. 부엌에 가보니 찌개가 끓어 넘치려 했다. 주현이 불을 줄이는데 어느새 부엌으로 돌아온 유선이 자신의 손가방을 식탁 옆자리에 올려두며 말했다.

“찌개 다 끓었네? 엄마가 할게, 가서 앉아.”

유선이 주현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밀어내자 주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식탁의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같이 해도 될 식사 준비를 혼자 하려는 유선을 보며 주현은 아마 유선이 직접 밥을 차려주는 일에서 어떤 뿌듯함을 느끼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뿌듯함을 같이 나눠도 괜찮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지만 주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얘는 아직 자나? 가서 좀 깨워봐라.”

유선이 밥을 그릇에 담으며 혼잣말을 하다 주현에게 주민의 방이 있는 쪽을 손짓하며 말했다. 그 말에 주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민의 방으로 갔다.

방문을 여니 주민이 이불을 돌돌 말고 자는 모습이 보였다. 주현은 주민을 깨우려 손을 들다 생각을 바꿔 손 대신 한쪽 발을 들고는 주민의 옆구리에 올려두고 흔들었다.

“밥.”

주현이 주민을 발로 흔들며 말했지만 주민은 돌돌 만 이불 속으로 더욱 웅크릴 뿐이었다.

“밥 먹어.”

“안 먹어.”

주현이 조금 더 세차게 흔들자 주민은 웅얼대는 소리로 대꾸하며 이불 속으로 더 웅크릴 뿐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 말에 주현은 주민을 좀더 흔들려다 옆구리에 올려둔 발을 들어 주민의 엉덩이를 한 번 툭 치고는 방을 나왔다.

“안 먹는대?”

식탁에 밥그릇과 찌개그릇을 올리던 유선이 혼자 주민의 방에서 나오는 주현을 보고는 물었다. 그 물음에 주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에 앉았다.

“방학하고 나서는 다 같이 아침 먹은 일이 없네.”

유선이 주민의 몫으로 담았던 밥그릇을 식탁에 올려놓고는 혼잣말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 자신을 빤히 보던 주현의 시선을 뒤늦게 알아챈 유선은 주현에게 웃는 얼굴로 손짓해가며 말했다.

“우리끼리 먹자. 모자라면 여기서 덜어 먹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아 말없이 밥을 먹었다. 그릇과 식탁을 오가는 수저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주민은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피곤한지 하품하며 방을 나서는 주민의 귓가에 노랫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주현이 보는 텔레비전에서 나는 소리였다.

“소리 좀 줄여!”

주민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주현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한주현!”

주민이 조금 더 큰 소리로 주현을 부르자 주현은 그제야 주민을 돌아봤다.

“소리 좀 줄이라고.”

주민이 손짓까지 하며 말하자 주현은 그제야 인상 쓰며 소리를 조금 줄였다. 주민은 그런 주현을 가만히 보다 주현이 거실 바닥에 등받이 삼아 기대앉은 소파에 올라가 누웠다. 텔레비전에는 뮤지컬 공연 실황이 한창이었다. 주민의 귀에도 익숙한 뮤지컬 넘버들이 자막과 함께 나오는 그 영상을 주현은 꼿꼿이 앉아 쳐다보았다. 노랫말 자막 하나하나를 모두 빨아들일 듯 집중한 모습이었다. 그런 주현을 보자 장난기가 동한 주민이 자기 발로 주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주현을 불렀다.

“야, 야.”

주민의 장난에 주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주먹을 휘저었다. 자신을 건드리는 주민의 발을 쳐내려고 애쓰면서도 주현의 눈은 텔레비전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야~아.”

주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현의 눈앞에 손을 흔들며 애교 부리듯 부르자, 주현은 짜증을 참는 듯 입을 앙다문 얼굴로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 영상을 잠깐 멈추고는 주민을 돌아보았다.

“왜?”

짜증을 참으며 묻는 주현의 얼굴이 우스운지 주민은 실실 웃으며 눈짓으로 텔레비전을 한번 힐끗 가리키며 물었다.

“재밌냐?”

「재밌으니까 보지. 재미없는 걸 억지로 보겠어?」

주현이 말소리도 내기 싫은지 수어를 했다. 주민은 그런 주현의 기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실실 웃으며 자신도 손말을 했다.

「저 뮤지컬 이번에 내한공연 한다는데.」

주민의 말에 주현이 퉁명스레 말했다.

「알아.」

「보러 갈래? 자막도 나온다는데.」

「자리 다 나갔을걸.」

「아직 남았으면?」

「서울에서 하는데?」

「가면 되지.」

「비싼데, 저거?」

「보면 되지.」

서서히 표정이 풀리는 주현의 얼굴을 보며 주민이 여전히 실실 웃으며 말했다.

“너 복지카드 있잖아.”

그 말에 주현이 다시 굳어진 얼굴로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좀, 철 좀 들어라. 저거 아니더라도 돈 나갈 데가 얼마나 많은데….”

그 말에 주민은 할 말을 잃고 주현을 멍청히 쳐다보았다. 주현은 그런 주민을 쏘아보듯 한번 흘겨보고는 다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잠깐 멈췄던 영상이 다시 시작되며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주민의 귀에는 어떤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주민은 그제야 어제 유선이 주현과 한 얘기가 돈과 관련된 일이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하긴, 이래저래 돈 나갈 곳이 많았다. 주현의 보청기 가격만 해도 이제는 대부분 보험처리가 됐지만 그마저도 5년에 한 번뿐이었다. 보청기를 잃어버리거나 고장이 나면 자비로 부담해야 했다. 파손이나 분실에 대한 보험 서비스를 제공하는 보청기 브랜드도 있었지만, 주현이 사용하는 보청기는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주의해야 했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다보면 보청기를 잃어버리거나 고장 낼 일이 많았다. 체육활동에서의 부주의나 아이들의 장난과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특히 문제였다. 보청기가 신기하다고 만지작거리거나 빼가서는 장난치다 보청기를 못 쓰게 하기 일쑤였다. 보청기가 아니더라도 돈이 들 곳은 많았다. 지금이야 신생아나 노인을 대상으로 지원금이 나온다지만 주현이 청력 정밀검사를 받을 때는 비용이 꽤 많이 들었다고 들었다. 거기에 요즘도 발음 교정을 위해 언어치료를 받으니 그 비용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무슨 일인지 얘기해주지 않았을까.

주민은 어제의 일에 대해 좀더 생각해보았다. 이번에도 누군가 주현의 보청기를 고장 냈는지도 몰랐다. 그 누군가는 보청기 가격을 듣고는 그만큼의 금액을 전부 보상하기는 힘들다 했겠지. 유선은 주민이 그 사람에게 강하게 항의해야 한다고 화낼까 걱정했을 테고. 그래서 나한테만 말을 안 했는지도 몰라.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한창 이어지던 주민의 생각은 주민이 자신의 다리에 무언가 따끔함을 느끼며 끊어졌다. 주민이 고개를 들어 보니 주현이 자신의 다리를 한번 철썩 때리고는 주민을 노려보고 있었다.

“전화 받으라고.”

주현의 말에 주민은 그제야 자기 방에서 거실로 나올 때 챙겨 나온 휴대전화가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주민은 휴대전화를 들어 액정화면에 뜬 번호를 한번 보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주현은 통화하는 주민을 위해 텔레비전 소리를 조금 더 줄였다. 주민은 그런 주현을 의식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걸어가며 휴대전화 너머 상대방에게 말했다.

“저 어제 다 끝났는데요.”

주민이 자기 방에 들어와 문을 닫으며 전화 속 상대방에게 하던 말을 계속했다.

“원래 이번 달만 하기로 했는데요.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잖아요.”

무슨 일이 있는지 전화 속 상대방이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주민의 휴대전화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어렴풋하게 새어나왔다.

“아, 안 되는데. 저도 이제 곧 개학이라서요.”

주민이 곤란한 듯 말하자 상대가 무슨 말인가를 더 했다. 그 말에 주민이 발끈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죠. 그건 정해진 날짜에 주셔야죠!”

주민의 말에 상대방도 목소리를 높인 듯 휴대전화에서 새어나오는 소리가 아까보다 크게 들렸다.

“그 부분은 첫날에 얘기 들어서 저도 아는데. 아니….”

말이 끊긴 주민은 한동안 상대의 말을 듣기만 했다. 다시 차분해진 상대의 목소리는 이제 무언가를 부탁하는 듯했다. 그 말을 가만히 듣던 주민이 마침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내일까지만 더 나가면 되죠? …예.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네.”

통화가 끝난 주민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외출 준비를 했다. 주민이 물을 묻혀 뻗친 앞머리와 뒷머리를 정리하는 동안 주현은 여전히 아까와 같은 자세로 텔레비전 화면만 바라봤다. 그 화면 속 뮤지컬 공연이 막바지에 이른 듯 아까보다 세차게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주민은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뮤지컬 공연 실황이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까지 다 보고 나서야 주현은 텔레비전을 껐다. 그러고는 피곤한지 귀에 꽂은 보청기를 뽑아 소파 앞 탁자에 올려둔 보관함에 넣어두고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주현이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길 때 하는 습관이었다.

오늘은 몇 시에나 들어오려나.

이번에 방학을 한 뒤로 평일이면 매일 밤 늦게야 집에 돌아오는 주민이었다. 그전에도 이런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한 달 내내 이러기는 처음이었다. 주민이 늦는 까닭을 알면서도 주현은 신경이 쓰였다. 주민이 혹시 나쁜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을까 괜한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도 주현이 보기에 유선은 자신과 달리 주민에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그 점이 주현에게는 유선이 주민을 믿기 때문에 주민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에게는 간섭만 하는 유선의 태도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역시, 언니를 더 좋아하는 게 분명해. 이런 생각을 하던 주현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주현은 체육복에 점퍼까지 챙겨 입고 헤드폰을 목에 걸친 모습으로 방을 나왔다. 그러고는 거실 탁자 위에 올려둔 보청기를 챙겨 귀에 꽂고는 목에 걸었던 헤드폰을 머리 위로 걸쳐 썼다. 헤드폰에 연결된 휴대전화로 음악을 틀자 둔탁한 드럼과 둥둥거리는 베이스가 주현의 두 귀로 울려 퍼졌다. 주현은 휴대전화가 빠지지 않게 점퍼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고는 집을 나섰다.

유선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엔 아무도 없었다. 유선은 손만 씻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소파에 쓰러지듯 기대앉았다. 지친 듯 깊은 한숨을 몰아쉬던 유선은 문득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바닥에 던져둔 자신의 손가방을 뒤졌다. 그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낸 유선은 곧바로 메신저 앱의 가족 대화방에 들어가 메시지를 남겼다.

―주현이 어디 갔니?

―주민이는 오늘도 늦니?

아직 아무도 읽지 않아 메시지 옆 숫자가 그대로인 그 대화창을 유선은 한동안 바라봤다. 그러다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는 휴대전화를 소파 앞 탁자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다시 가방을 뒤져 퇴근길에 병원에서 받아온 팸플릿을 꺼냈다. 전날 주현과 얘기한 내용이었다. 유선은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이미 몇 번을 읽어본 내용이었다. 병원에서 상담받고 팸플릿을 받아오기 전부터 아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유선은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게 좋을지 잘 판단이 서질 않았다.

내가 선택할 일이 아니야.

훑어보던 팸플릿을 접고 탁자에 올려놓으며 유선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내가 선택할 일이 아니야. 스스로 선택해야 할 일이야. 나는 그 선택만을 따라가주자.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왠지 불안한 유선이었다.

그때 유선의 휴대전화 화면이 밝게 빛나며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나 공설운동장. 운동 좀 하다 들어갈게요.

주현이었다. 달리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주민은 아직도 메시지를 읽지 않았는지 유선과 주현이 보낸 메시지 옆에 읽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숫자 1이 찍혀 있었다. 유선은 슬슬 저녁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부터 갈아입으려 방으로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로 주현의 메시지에 답장을 남겼다.

―저녁 준비할게. 너무 늦지 않게 와라.

그러다 뒤늦게 생각난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둘 다.

주현은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며 유선이 보낸 그 메시지를 읽었다. 운동장 육상트랙을 한참 달리다 잠깐 쉬는 참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로 들어오며 가슴 가득 비린내가 났다.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빠른 템포의 드럼 소리가 심장박동에 맞춰 쿵쿵댔다. 땀 때문에 답답해진 주현은 헤드폰을 벗고 점퍼의 지퍼를 내리고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몸에 난 땀이 어느새 해가 떨어진 저녁 공기에 식으며 서서히 열기가 가라앉았다.

주현은 텅스텐 조명 아래 자신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운동장을 도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걷거나 뛰었다. 무선이어폰을 꽂은 젊은 여성도 있었고 귀에 아무것도 꽂지 않은 젊은 남성도 있었다. 해가 떨어져 어두운 가운데도 선글라스를 낀 노년 남성도 있었고 안경을 낀 중년 여성도 있었다. 모두 자기 몸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이곳에 나온 사람들이었다.

어느 정도 땀이 식은 주현은 다시 지퍼를 여미고 천천히 달렸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달리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듯했다. 유선에게 오늘은 좀 늦을 것 같다고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달리면서 휴대전화를 쓸 수는 없었다. 주현은 그저 지금 운동장을 달리는 자신의 두 다리와 호흡의 감각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저 내일까지 늦어요.

주민은 메시지 입력창에 쓴 문장을 가만히 보았다. 아직 전송 버튼은 누르지 못했다. 유선이 보낸 메시지를 한 시간여 지나서야 확인한 참이었다. 더 늦기 전에 답장해야 했다. 그런데도 주민은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자신이 작성한 메시지를 한동안 들여다보던 주민이 마침내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런 뒤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입고 있는 조끼의 주머니로 휴대전화를 쏙 집어넣었다.

주민은 편의점 아르바이트 중이었다. 이번 달 내내 집에 늦게 들어간 까닭은 이 때문이었다. 방학 동안 한 달만 경험 삼아 해보겠다고 유선을 설득해 겨우 하게 된 일이었다. 그런데 그 한 달을 다 채우고 나서도 이틀을 더 일하게 됐으니, 주민은 혹시 유선이 뭐라 하지는 않을지 걱정이었다. 유선은 아직 주민이 내일까지 아르바이트를 더 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모르지만 말이다.

주민의 아르바이트는 원래라면 어제 끝나야 했다. 주 5일 근무로 4주 동안만 일하기로 했는데 어제가 딱 그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편의점 사장이 헷갈릴까봐 지난주에 미리 얘기했건만, 오늘 갑자기 사장이 전화해서는 새로 뽑은 알바생이 다음 주부터 일하기로 했다며 내일까지만 더 나와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애초에 다음 근무자를 뽑을 때까지 일하기로 했다며 오늘과 내일 일을 하러 나오지 않으면 월급 지급일이 늦어질 수 있다고 협박까지 하니, 주민은 사장 말을 따를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주민이 일하는 편의점은 주택가에 있었다. 찾아오는 손님이라고는 그곳 주민이 대부분이었다. 가까운 곳에 얼마 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지만 그쪽에도 편의점이 두 군데나 있어 그곳 주민이 이곳까지 오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에 찾아오는 손님도, 사가는 물건도 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일이 편하지는 않았다. 재고는 매일 들어왔고, 그런 만큼 매일 매대와 상자 정리를 해야 했다. 나이 많은 손님들은 반말을 하기 일쑤였다. 겨울이라 호빵이나 군고구마 같은 계절상품도 신경 써야 했다. 눈이 오는 날에는 가게 앞에 눈이 쌓이지 않게 비질하고 염화칼슘을 뿌려야 했다. 할 일을 다 끝내고 손님도 딱히 없을 때 앉아서 쉴 수 있는 정도가 일할 때 그나마 좋은 점이었다.

“어서 오세요.”

유선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잠깐 멍하니 앉아 있던 주민은 누군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종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인사했다.

“일 안 하고 뭐 하냐.”

그 말에 주민은 고개를 들어 가게에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주민이 아는 사람이었다.

주현은 주민이 편의점에서 누군가와 얘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편의점 밖에 서 있는 탓에 안에서 오가는 두 사람의 말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다만 두 사람이 말하는 태도로 보아 서로 잘 아는 사이 같다는 생각만 해볼 따름이었다. 둘은 같은 또래로 보였는데 친구 사이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주현은 생각했다. 주민과 얘기하는 사람의 자세는 어딘가 불량하게까지 보이는 데 반해, 주민은 어려운 사람을 대하듯 억지로 웃는 얼굴을 보였기 때문이다.

운동장을 걷고 뛰기를 반복하던 주현이 이곳까지 온 까닭은 주민이 보낸 메시지 때문이었다. 내일까지 늦는다는 주민의 메시지에 주현은 주민이 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내일이면 끝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르바이트에 관해 주민이 주현에게 얘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주현은 주민이 아르바이트한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유선이 작성한 보호자동의서를 보았던 것이다. 주민이 아르바이트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던 주현은 주민이 일하는 곳으로 몰래 한번 찾아가봐야겠다고 줄곧 생각했다. 그러다 오늘, 주민의 메시지를 보고 이제야 찾아온 것이다.

편의점에서 주민과 얘기하던 그 사람은 하던 얘기를 다 마쳤는지 이제는 편의점 매대를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도시락 종류가 진열된 매대 앞에 선 그 사람은 두 손으로 커다란 도시락 하나를 꺼내 들여다보더니 주민에게 무어라 얘기했다. 주민이 손짓하자 그는 신난 듯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도시락을 주민에게 가져갔다. 주민은 도시락을 들고 잠깐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바코드리더기를 들어 도시락을 찍고는 계산대 버튼을 몇 번 누르더니 손에 든 도시락을 그 사람에게 내밀었다. 그 사람은 신이 나서 도시락을 받아들고는 주민에게 인사하고 편의점을 나섰다. 편의점을 나서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주민과 그 상황을 모두 지켜본 주현의 눈이 마주쳤다. 주민이 놀란 눈으로 주현을 봤다. 그러다 주현이 있는 곳으로 나오려 했다. 주현은 그런 주민을 못 본 척 뒤돌아 뛰어갔다.

유선은 혼자 식탁에 앉아 휴대전화의 대화창만 바라보았다. 내일까지 늦는다는 주민의 메시지를 끝으로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집에 돌아왔을 주현도 아직 집에 오지 않았다. 연락도 없이 이러기는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유선은 걱정됐지만 괜찮으리라고, 별일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오후에는 애들 아빠와 꽤 오래 통화했다. 일주일 만이었다. 애들 아빠는 지난주 전화로 얘기한 내용에 대해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결과를 듣고 싶어 했다. 좀더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유선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만 말했다.

“좋은 기회잖아.”

애들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유선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최선인지는 여전히 확신이 서질 않았다. 주현의 인공와우 수술 얘기였다.

지난주 애들 아빠가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와서는 이번 달 양육비 지급이 늦어진 점을 사과하면서 처음 그 얘기를 꺼냈을 때, 유선은 적잖이 당황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애들 아빠는 인공와우 수술이 만 15살을 기준으로 보험 적용 기준이 달라진다면서 얼마 남지 않은 주현의 생일이 오기 전에 수술을 받으면 어떻겠냐고 했다. 우리가 듣는 소리를 주현에게도 들려주고 싶다면서 말이다. 그 말에 유선은 주현과 얘기해보겠다고 했다.

그 통화 이후 유선은 온종일 멍한 기분이었다. 그동안 주현이 조금 불편한 부분이 있었을지 몰라도 그런대로 잘 지내왔다고만 생각했다. 우리 세 식구가 남다를 것 없는 평범한 가정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생각은 이제 보니 유선 자신만의 착각으로 여겨졌다. 누가 뭐라 해도 주현은 청각장애인이었다. 그런 주현을 위해 유선 자신은 지금껏 무얼 했던가. 주현이 더 나은 청력을 갖도록 노력한 일이 있었던가. 유선은 그런 자신이 못되게만 느껴졌다. 애들 아빠의 인공와우 수술 제안이 그런 자신을 비난하는 말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처음 그 이야기를 주현에게 했을 때, 주현은 수술받고 싶지 않다고 딱 잘라 말했다. 지금 생활에 자신은 만족한다고 했다. 뮤지컬을 좋아하고 즐겨 보지만 딱히 소리를 잘 듣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했다. 그 말에 유선은 조금 더 생각해보자는 말로 주현을 설득하려 했다. 어쩌면 지금이 유선 자신이 듣는 소리를 주현에게 똑같이 들려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과, 아직 어린 주현이 자신의 철모르는 선택 때문에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주현이는 언제 오니?

그때의 생각에서 벗어나려는 듯 유선은 가만히 들여다보던 휴대전화의 대화창에 빠르게 메시지를 입력했다. 그 메시지의 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유선은 문득 무슨 생각에선지 입력한 메시지를 전부 지웠다. 그러더니 새 메시지를 입력하고는 곧바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알았다. 너무 늦지 않게 들어오렴.

내일까지 늦는다는 주민의 메시지에 대한 유선의 답장이었다.

주민은 편의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유선이 남긴 메시지를 보았다. 딱히 뭐라 더 할 말이 없어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집어넣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주민의 오금을 툭 쳤다. 그 바람에 다리가 휘청한 주민이 고개를 돌리자 우습다는 듯 깔깔대는 얼굴과 몸짓으로 주민을 가리키는 주현의 모습이 보였다. 주민은 새끼손가락으로 자기 귀에 걸린 끈을 풀어 마스크를 벗고는 말했다.

“뭐야?”

그 말에 주현도 주민을 따라 마스크를 벗더니 여전히 깔깔대는 얼굴로 물었다.

「이제 끝났어?」

“어, 여긴 어떻게 알았냐.”

「그걸 왜 모르냐.」

주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현을 보았다. 엄마한테 들었으려나. 둘은 자연스럽게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주민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너 아까도 오지 않았어?” 주민이 손이 시린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왜 그냥 갔어. 추운데 들어와서 기다리지.”

그 말에 주현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다 짐짓 밝은 손짓으로 말했다.

「그냥 주변 좀 둘러보느라. 동네 좋더라. 아파트 주변에 공원도 있고.」

주현의 그 말을 끝으로 둘은 말없이 걸었다. 주민은 다시 마스크를 꼈다. 주현도 마스크를 꼈다. 밤공기가 찼다.

한참을 말없이 걷다가 주민이 문득 자신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휴대전화를 몇 번 톡톡 두드리더니 주현에게 화면을 내밀었다. 그 화면을 보던 주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뭐야? 진짜야?”

주현이 놀라 묻는 말에 주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이걸 했대….”

주현의 그 말에 주민이 다시 마스크를 벗고 말했다.

“그날이 네 생일이잖아. 일부러 날짜 맞춰서 미리 했지.”

주현은 주민의 휴대전화 화면을 다시 한번 봤다. 주현이 좋아하는 뮤지컬의 내한공연 티켓의 예매 확인 창이 차가운 밤공기 속에 밝게 빛났다. 주현과 주민, 유선의 몫까지 세 장이 나란하게 예매돼 있었다. 주현은 한동안 휴대전화의 그 화면을 보았다.

“이거 땜에 친구한테 돈까지 빌렸잖아. 너도 아까 봤지?”

주현이 예매 확인 창을 볼 만큼 보고 주민에게 휴대전화를 돌려주자 주민이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까 나한테 도시락 받아갔던 애 있잖아. 유통기한 오늘까지인 걸 어떻게 하나 찾아내서는….”

그 말에 주현은 아까 어딘가 좀 불량해 보인다 생각했던 그 사람을 떠올렸다. 그 친구에게서 돈을 빌렸구나.

“이제 곧 알바비 나오니까 그때 갚아야지.”

주민이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하자 주현이 대꾸했다.

“얘길 하지. 내 거 복지카드로 예매하면 할인되는데.”

“그럴 틈이 어딨냐. 티켓 바로바로 나가는데.”

주민이 웃으며 덧붙였다.

「어차피 패키지 티켓이라 할인율은 똑같아.」

둘은 6차선 도로를 앞에 두고 보행자 신호를 기다렸다. 저 멀리 신호등 너머로 유선이 주민과 주현을 기다리고 있을 아파트가 보였다.

“지난주부터 엄마가 인공와우 수술 얘기를 하시네.”

주현이 신호를 기다리며 남 얘기 하듯 말했다. 신호등을 보던 주민이 그 말에 놀란 듯 주현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인공와우 수술이라면 주민도 인터넷으로 알아본 일이 있었다. 비용이 많이 드는 데 비해 그 효과는 개인차가 심했고, 수술 뒤 받을 훈련도 힘든데다 그나마 남은 청력을 잃을 수 있는 등 부작용이 심한 수술이라 했다.

“엄마는 조금이라도 나한테 세상의 소리를 들려주고 싶은가봐.”

주현이 말을 잇는 사이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둘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나는 별로 받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횡단보도를 절반쯤 건널 무렵 주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 마음 생각하면 내 생각만 계속 고집해도 될지 걱정도 돼.”

주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주현이 자신과 같은 소리를 듣게 되면 어떨지 생각해본 적은 있었지만 그에 관해 주현은 어떤 마음이었을지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주현은 주현인데 수술받은 뒤엔 다른 주현이 될 것 같은 막연한 기분이 들 뿐이었다.

“모르겠어. 엄마 말 때문인지 요즘엔 전보다 소리를 더 잘 듣게 되면 어떨까 조금은 궁금하기도 한데….”

횡단보도를 다 건너 맞은편 보도에 발을 디디던 주현이 그 자리에 서서 주현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무서워.」

그 말을 끝으로 주현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겨울 밤공기가 두 사람을 무겁게 짓눌렀다. 얼마 뒤 주현이 다시 집을 향해 걷자 주민은 그제야 마스크를 갖춰 쓰고 주현 뒤를 따랐다.

주민과 주현이 아파트 단지에 들어설 때쯤 눈이 쏟아져 내렸다. 주민은 아주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일하는 동안 눈이 내렸다면 어제에 이어 오늘도 다시 편의점 앞을 치워야 했을 것이다.

눈이 무서운 속도로 쏟아졌다. 주민과 주현이 아파트 단지 입구를 지나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단지 전체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주민과 주현의 머리와 어깨에도 그새 눈이 쌓였다. 둘은 아파트 통로 입구 앞에서 머리와 어깨를 털고 발을 굴렀다. 그렇게 얼마 동안 쌓인 눈을 털어낸 둘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얗게 변한 아파트 지상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말 한마디 없이 고요한 풍경이었다. 그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던 둘에게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다가왔다. 그 기척에 주민이 등을 돌려 돌아봤다. 그러고는 주현의 어깨를 한 번 툭 쳤다. 주현은 돌아볼 생각이 없는지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만 올려다볼 뿐이었다. 모든 걸 조용히 덮어버리는 저 힘은 어디서 왔을까. 그 힘이 놀랍게만 느껴졌다. 그런 주현의 어깨를 주민이 몇 번 더 작게 흔들자 주현은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언제 내려왔는지 유선이 서 있었다. 유선은 눈 구경을 하던 주민과 주현을, 그 두 사람의 눈을 하나하나 천천히 번갈아 바라보고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올라가서 밥 먹자.” 

기은

기울어진 이곳에서 / 수상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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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를 헤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듯한 기분에 조금 빠르게 걸어보지만 이내 막다른 벽을 마주합니다. 같은 자리를 몇 번이고 맴돌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전에 겪은 다른 미로들을 떠올리며 다시 천천히 길을 걷습니다. 여전히 더디지만 전보다 조금은 더 나아갑니다. 그렇게 나아가다보면 어느새 미로를 빠져나오기도 하고, 끊임없이 나오는 벽에 지쳐 포기하기도 합니다. 이번엔 운이 좋았습니다. 어떻게든 이 미로를 빠져나왔으니 말입니다.
글쓰기는 미로찾기와 비슷하단 생각을 해봅니다. 매번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한참을 헤매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그 부족함을 채우려 애씁니다. 애쓰지 않으면 이 미로를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꾸역꾸역 이 미로를 어떻게든 빠져나오면 이곳에 들어서기 전보다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일부러 이 미로를 다시 찾아드는 까닭은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이번에 빠져나온 제 미로를 좋게 봐준 세 심사위원님과 <한겨레21> 관계자님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좋아하고 챙겨 읽던 작가님들과 매체에서 제 글을 읽는 일만으로도 모자라 상까지 주신 데에 어떤 말로 이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시험 준비로 활동에 참여하지 못했는데도 제 수상 소식에 기쁘게 축하해주신 다짜고짜 글모임분들께도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무엇보다 언제나 믿음과 사랑으로 응원해주시며 세상 보는 시선을 알게 해주신 부모님과 곁에서 묵묵히 응원해주는 동생에게 가장 큰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차별’을 주제로 한 글로 상 받는 일이 부끄럽게만 느껴집니다. 제가 쓴 글에서 저의 부족함과 부주의함이 드러나지는 않을까 두렵기도 합니다. 그 글에서 저 스스로도 미처 알지 못한 부족함과 부주의함이 있다면 그건 모두 제 잘못입니다. 이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잊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가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기울어진 이곳에 사는 이상 저 자신도 기울어질 수밖에 없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 기울기를 바로잡는 방향으로 작게나마 걸어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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